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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 = 개요 = | ||
'''90년대 한국축구의 | '''90년대 한국축구의 열약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미완의 천재'''<br /> | ||
대한민국 출신의 [[서울 이랜드 FC]]의 감독. | 대한민국 출신의 [[서울 이랜드 FC]]의 감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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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재활 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몸도 추스르기 전에 경기에 출전하고, 그러다 같은 부위를 다시 다치기를 여러번 반복하면서 그는 서서히 선수로서의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가 태극마크를 달고 마지막으로 공식 경기에 출전한 것은 세번째 수술을 받고 꼭 1년 뒤인 92년 1월 바르셀로나 올림픽 최종예선이었다. | 특별한 재활 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몸도 추스르기 전에 경기에 출전하고, 그러다 같은 부위를 다시 다치기를 여러번 반복하면서 그는 서서히 선수로서의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가 태극마크를 달고 마지막으로 공식 경기에 출전한 것은 세번째 수술을 받고 꼭 1년 뒤인 92년 1월 바르셀로나 올림픽 최종예선이었다. | ||
1992년 올림픽 아시아 예선에서 선발되었는데, 이에 관한 일화가 있다. 당시 [[김삼락]] 감독이 당시 올림픽 대표팀 총감독을 맡고 있던 [[데트마르 크라머]] 감독 | 1992년 올림픽 아시아 예선에서 선발되었는데, 이에 관한 일화가 있다. 당시 [[김삼락]] 감독이 당시 올림픽 대표팀 총감독을 맡고 있던 [[데트마르 크라머]] 감독[* 일본 현대 축구의 아버지라 불리며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독일 국적의 감독. 1968년 멕시코 시티 올림픽에서 일본 올림픽 축구 동메달을 획득했다. 그 공로로 3등급 국가 훈장을 받았다. 이후 서독 국가대표팀의 수석 코치, 미국 국가대표팀 감독,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 [[아인라흐 프랑크푸르트]] 감독, [[바이어 04 레버쿠젠]] 감독을 역임한 이후 올림픽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다.]의 훈련 방식 등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사사건건 부딪혔는데, 당시 [[고려대학교]] 소속이던 김병수를 대표팀에 선발했다. 당연히 크라머는 노발대발했고, 이후 김병수의 훈련을 지켜보다가 빼어난 활약을 보고 [http://sports.news.naver.com/kfootball/news/read.nhn?oid=311&aid=0000000744 '축구 인생 50년 만에 만난 천재다. 독일로 데려가고 싶다']고 극찬할 정도였다. | ||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최종예선 한일전에서 경기 종료를 1분 남기고, 극적인 발리슛 결승골을 성공시켜 대한민국의 본선 진출을 이끌었다. 이후 다시 발목 부상이 재발하면서 끝내 올림픽 본선 엔트리에는 합류하지 못하였다. |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최종예선 한일전에서 경기 종료를 1분 남기고, 극적인 발리슛 결승골을 성공시켜 대한민국의 본선 진출을 이끌었다. 이후 다시 발목 부상이 재발하면서 끝내 올림픽 본선 엔트리에는 합류하지 못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