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수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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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이상 운동해본 적이 없었고 그냥 쉬는 것이 유일한 치료 방법이었다. 그러다 경기가 있으면 불려나가 사나흘 연습하고 뛰었다. 91년에는 왼쪽 발목에다 어깨까지 다친 상태에서 경기에 나섰다. 압박붕대를 칭칭 동여매고 뒤뚱거리며 뛰었지만 어시스트도 하고 결승골도 넣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런 그의 플레이를 두고 '대단한 투혼'이라며 극찬했다. 하지만, 김병수 본인은 후에 생각하니 그 무책임함에 너무나 화가 났다고 한다.
한 달 이상 운동해본 적이 없었고 그냥 쉬는 것이 유일한 치료 방법이었다. 그러다 경기가 있으면 불려나가 사나흘 연습하고 뛰었다. 91년에는 왼쪽 발목에다 어깨까지 다친 상태에서 경기에 나섰다. 압박붕대를 칭칭 동여매고 뒤뚱거리며 뛰었지만 어시스트도 하고 결승골도 넣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런 그의 플레이를 두고 '대단한 투혼'이라며 극찬했다. 하지만, 김병수 본인은 후에 생각하니 그 무책임함에 너무나 화가 났다고 한다.


1988년 청소년 대표로 선발되었을 때. 당시 한국일보 전상돈 기자(현 스포츠투데이 부국장)는 '한국 축구에 김병수 시대가 오고 있다'며 '한국 축구의 약점으로 지적되던 미드필더의 발굴'이라고 대서특필했다.
1988년 청소년 대표로 선발되었을 때. 당시 한국일보 전상돈 기자(현 스포츠투데이 부국장)는 '한국 축구에 김병수 시대가 오고 있다'며 '한국 축구의 약점으로 지적되던 미드필더의 발굴'이라고 대서특필했다.  


청소년 대표를 거쳐 그가 국가대표팀에 선발된 것은 대통령배(현 코리아컵) 대회를 앞둔 89년 6월. 그런데, 당시 대표팀 [[이회택]] 감독은 그의 경기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1년 내내 놀다가 고연전에나 나오는 선수였기 때문이다.}} '하도 옆에서 김병수 김병수 해가지고 하는 수 없이 뽑았다'는 것. {{ㅊ|그러고보니 [[박지성|현대 축구의 영웅]]도 [[허정무|허카우터]]가 인맥빨로 뽑았다고 했었지.}} 그리고 그의 플레이를 본 [[이회택]] 감독은 그 해 8월 소련과 미국 원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너는 무조건 이태리에 데려갈테니 이 길로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병원에 갈 수 없었다.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측에서는 차일피일 미룰 뿐 일언반구 이야기가 없었다. 그리고, 그해 고연전에 출전했다. {{*| 차후 이 때를 회상하며 인터뷰하기를  "운동하면서 소원이 있었는데, 그게 뭐냐면 딱 한번만이라도 몸이 완전한 상태에서 게임을 해보는 거였어요."라고... 완치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어떨까 라는 안타까움이 든다.}}
청소년 대표를 거쳐 그가 국가대표팀에 선발된 것은 대통령배(현 코리아컵) 대회를 앞둔 89년 6월. 그런데, 당시 대표팀 [[이회택]] 감독은 그의 경기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1년 내내 놀다가 고연전에나 나오는 선수였기 때문이다.}} '하도 옆에서 김병수 김병수 해가지고 하는 수 없이 뽑았다'는 것. {{ㅊ|그러고보니 [[박지성|현대 축구의 영웅]]도 [[허정무|허카우터]]가 인맥빨로 뽑았다고 했었지.}} 그리고 그의 플레이를 본 [[이회택]] 감독은 그 해 8월 소련과 미국 원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너는 무조건 이태리에 데려갈테니 이 길로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병원에 갈 수 없었다.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측에서는 차일피일 미룰 뿐 일언반구 이야기가 없었다. 그리고, 그해 고연전에 출전했다. {{*| 차후 이 때를 회상하며 인터뷰하기를  "운동하면서 소원이 있었는데, 그게 뭐냐면 딱 한번만이라도 몸이 완전한 상태에서 게임을 해보는 거였어요."라고... 완치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어떨까 라는 안타까움이 든다.}}


당시 그의 발목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오른쪽 발목 인대가 1인치, 왼쪽 발목 인대는 0.9인치가 늘어난 상태였다. 90년 1월에 가서야 경찰병원에서 오른쪽 발목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어릴적 포철 축구단 숙소에서 만났던 [[최순호]]가 수술비 일체를 부담해 주었다. 6월엔 학교측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스쿠바 대학에서 왼쪽 발목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3개월만에 일어났다.
당시 그의 발목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오른쪽 발목 인대가 1인치, 왼쪽 발목 인대는 0.9인치가 늘어난 상태였다. 90년 1월에 가서야 경찰병원에서 오른쪽 발목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어릴적 포철 축구단 숙소에서 만났던 [[최순호]]가 수술비 일체를 부담해 주었다. 6월엔 학교측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스쿠바 대학에서 왼쪽 발목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3개월만에 일어났다.  


그의 복귀 경기는 다시 고연전. 1년만에 그라운드에 나섰지만 그의 감각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는 이날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3대 2로 고대가 승리. 다음날 스포츠 신문엔 '고대 황금발 김병수 - 비극은 끝났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고질적인 부상이 그리 쉽게 고쳐질 리 없었다. 부상이 재발한 것이다. 한참을 쉬다가 91년 1월 스쿠바 대학에서 다시 수술을 받았다.
그의 복귀 경기는 다시 고연전. 1년만에 그라운드에 나섰지만 그의 감각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는 이날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3대 2로 고대가 승리. 다음날 스포츠 신문엔 '고대 황금발 김병수 - 비극은 끝났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고질적인 부상이 그리 쉽게 고쳐질 리 없었다. 부상이 재발한 것이다. 한참을 쉬다가 91년 1월 스쿠바 대학에서 다시 수술을 받았다.  


특별한 재활 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몸도 추스르기 전에 경기에 출전하고, 그러다 같은 부위를 다시 다치기를 여러번 반복하면서 그는 서서히 선수로서의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가 태극마크를 달고 마지막으로 공식 경기에 출전한 것은 세번째 수술을 받고 꼭 1년 뒤인 92년 1월 바르셀로나 올림픽 최종예선이었다.
특별한 재활 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몸도 추스르기 전에 경기에 출전하고, 그러다 같은 부위를 다시 다치기를 여러번 반복하면서 그는 서서히 선수로서의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가 태극마크를 달고 마지막으로 공식 경기에 출전한 것은 세번째 수술을 받고 꼭 1년 뒤인 92년 1월 바르셀로나 올림픽 최종예선이었다.  


1992년 올림픽 아시아 예선에서 선발되었는데, 이에 관한 일화가 있다. 당시 [[김삼락]] 감독이 당시 올림픽 대표팀 총감독을 맡고 있던 [[데트마르 크라머]] 감독<ref>일본 현대 축구의 아버지라 불리며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독일 국적의 감독. 1968년 멕시코 시티 올림픽에서 일본 올림픽 축구 동메달을 획득했다. 그 공로로 3등급 국가 훈장을 받았다. 이후 서독 국가대표팀의 수석 코치, 미국 국가대표팀 감독,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 [[아인라흐 프랑크푸르트]] 감독, [[바이어 04 레버쿠젠]] 감독을 역임한 이후 올림픽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다.</ref>의 훈련 방식 등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사사건건 부딪혔는데, 당시 [[고려대학교]] 소속이던 김병수를 대표팀에 선발했다. 당연히 크라머는 노발대발했고, 이후 김병수의 훈련을 지켜보다가 빼어난 활약을 보고 [http://sports.news.naver.com/kfootball/news/read.nhn?oid=311&aid=0000000744 '축구 인생 50년 만에 만난 천재다. 독일로 데려가고 싶다']고 극찬할 정도였다.
1992년 올림픽 아시아 예선에서 선발되었는데, 이에 관한 일화가 있다. 당시 [[김삼락]] 감독이 당시 올림픽 대표팀 총감독을 맡고 있던 [[데트마르 크라머]] 감독<ref>일본 현대 축구의 아버지라 불리며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독일 국적의 감독. 1968년 멕시코 시티 올림픽에서 일본 올림픽 축구 동메달을 획득했다. 그 공로로 3등급 국가 훈장을 받았다. 이후 서독 국가대표팀의 수석 코치, 미국 국가대표팀 감독,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 [[아인라흐 프랑크푸르트]] 감독, [[바이어 04 레버쿠젠]] 감독을 역임한 이후 올림픽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다.</ref>의 훈련 방식 등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사사건건 부딪혔는데, 당시 [[고려대학교]] 소속이던 김병수를 대표팀에 선발했다. 당연히 크라머는 노발대발했고, 이후 김병수의 훈련을 지켜보다가 빼어난 활약을 보고 [http://sports.news.naver.com/kfootball/news/read.nhn?oid=311&aid=0000000744 '축구 인생 50년 만에 만난 천재다. 독일로 데려가고 싶다']고 극찬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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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고려대에 속해있던 선수들은 [[박진섭]], [[최철우]], [[조세권]], [[박동혁]], [[이성재]], 박민서 등이었다. {{*|하지만 당시 [[연세대학교]]에는 장대일 서동원 이동욱 성한수 등 프로1순위 선수들을 줄줄이 배출하고 정상남 정재곤 서기복 이승엽 같은 스타 선수들이 버티고 있었다.}} 그 해 [[연고전]]은 연세대의 2:0 승리였다.
그 당시 고려대에 속해있던 선수들은 [[박진섭]], [[최철우]], [[조세권]], [[박동혁]], [[이성재]], 박민서 등이었다. {{*|하지만 당시 [[연세대학교]]에는 장대일 서동원 이동욱 성한수 등 프로1순위 선수들을 줄줄이 배출하고 정상남 정재곤 서기복 이승엽 같은 스타 선수들이 버티고 있었다.}} 그 해 [[연고전]]은 연세대의 2:0 승리였다.


하지만, 경기 내용은 고대의 압도적 우세였다. 페널티킥 두 개를 실축하는 바람에 패전의 멍에를 썼지만, 스타 플레이어에게 의존하는 선이 굵은 전통적인 팀 컬러 대신 개인 전술과 아기자기한 조직 플레이를 중요시하는 섬세하고 효과적인 축구를 펼쳤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경기 내용은 고대의 압도적 우세였다. 페널티킥 두 개를 실축하는 바람에 패전의 멍에를 썼지만, 스타 플레이어에게 의존하는 선이 굵은 전통적인 팀 컬러 대신 개인 전술과 아기자기한 조직 플레이를 중요시하는 섬세하고 효과적인 축구를 펼쳤다는 평가를 받았다.  


설욕 무대는 그해 10월 울산에서 열린 대학 선수권 대회였다. 1회전에서 연대와 맞붙어 접전 끝에 3 대 3 무승부를 기록한 다음 승부차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아주대학교]]와 [[대구대학교]]를 연파하며 결승에 오른 [[고려대학교]]는 [[양현정]]이 이끌던 [[단국대학교]]를 4 대 3으로 꺾고 우승컵을 안았다.
설욕 무대는 그해 10월 울산에서 열린 대학 선수권 대회였다. 1회전에서 연대와 맞붙어 접전 끝에 3 대 3 무승부를 기록한 다음 승부차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아주대학교]]와 [[대구대학교]]를 연파하며 결승에 오른 [[고려대학교]]는 [[양현정]]이 이끌던 [[단국대학교]]를 4 대 3으로 꺾고 우승컵을 안았다.  


고려대에서 코치 발령을 기다리다 포항으로 내려간 것은 98년 11월이었다. 김병수는 포철공고의 코치를 맡게 된다. 이후 첫 출전한 문광부 장관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지도자로서의 첫걸음을 상큼하게 내디딘 셈. {{*|페어 플레이를 강조하고 절대로 거친 반칙을 못하게 했다. 스포츠맨쉽이 제일 중요한다고 선수들에게 역설했다.}}
고려대에서 코치 발령을 기다리다 포항으로 내려간 것은 98년 11월이었다. 김병수는 포철공고의 코치를 맡게 된다. 이후 첫 출전한 문광부 장관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지도자로서의 첫걸음을 상큼하게 내디딘 셈. {{*|페어 플레이를 강조하고 절대로 거친 반칙을 못하게 했다. 스포츠맨쉽이 제일 중요한다고 선수들에게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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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FA컵 16강에 오를 때 [[성남 FC]]와의 경기를 앞두고 [http://www.spotvnews.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20000 드레싱 룸]을 취재한 기사가 올라왔다.
2015년 FA컵 16강에 오를 때 [[성남 FC]]와의 경기를 앞두고 [http://www.spotvnews.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20000 드레싱 룸]을 취재한 기사가 올라왔다.


2017 시즌부터 [[서울 이랜드 FC]] 감독이 되었다. [http://sports.news.naver.com/kfootball/news/read.nhn?oid=139&aid=0002068429 계약기간은 3년]이라고 한다.
2017 시즌부터 [[서울 이랜드 FC]] 감독이 되었다. [http://sports.news.naver.com/kfootball/news/read.nhn?oid=139&aid=0002068429 계약기간은 3년]이라고 한다.  


== 여담 ==
== 여담 ==
=== 개인기로 교통체증을 만들다 ===
=== 개인기로 교통체증을 만들다 ===
상술했던 일본 프로축구팀과의 계약이 불발되고 김병수가 큰누나 집에서 술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끼는 못 속이는 것인지 조그만한 고무공을 들고 가게 앞으로 나가 리프팅을 했다. 멀쩡하게 생긴 남자가 애들 가지고 노는 공으로 '묘기'를 부리자 하나 둘 구경꾼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동네 꼬마들이 주된 관객(?)이었다. 공을 빼앗아 보겠다고 달려드는 꼬마들 틈에서 신들린 사람처럼 요리조리 피하며 리프팅을 이어갔다. 그러자 이제는 지나가던 어른들까지 관중석(?)에 합세했다. 심지어 지나가는 자동차들도 멈춰서서 이 희한한 남자의 재주를 지켜봤다고 한다. 때 아닌 교통 체증이 일어났다.
상술했던 일본 프로축구팀과의 계약이 불발되고 김병수가 큰누나 집에서 술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끼는 못 속이는 것인지 조그만한 고무공을 들고 가게 앞으로 나가 리프팅을 했다. 멀쩡하게 생긴 남자가 애들 가지고 노는 공으로 '묘기'를 부리자 하나 둘 구경꾼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동네 꼬마들이 주된 관객(?)이었다. 공을 빼앗아 보겠다고 달려드는 꼬마들 틈에서 신들린 사람처럼 요리조리 피하며 리프팅을 이어갔다. 그러자 이제는 지나가던 어른들까지 관중석(?)에 합세했다. 심지어 지나가는 자동차들도 멈춰서서 이 희한한 남자의 재주를 지켜봤다고 한다. 때 아닌 교통 체증이 일어났다.  


=== 아내와의 만남 ===
=== 아내와의 만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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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월드컵이 끝난 후) 김병수의 노트 중에서 현대 축구의 미래에 대한 김병수 감독 본인의 회고가 적혀 있다.
(프랑스 월드컵이 끝난 후) 김병수의 노트 중에서 현대 축구의 미래에 대한 김병수 감독 본인의 회고가 적혀 있다.


현대 축구는 보다 빠르고, 보다 정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최전방과 최후방의 거리를 30m 이내로 축소하여 시간적, 공간적으로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현대 축구는 보다 빠르고, 보다 정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최전방과 최후방의 거리를 30m 이내로 축소하여 시간적, 공간적으로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팀이 상대편의 볼을 가장 빠르게 빼앗아서 가장 빠르게 공격하겠다는 공격 지향적인 축구를 선호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정확성에 대한 개념에 속도라는 개념이 추가되어 보다 빠르고 보다 정확할 것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팀이 상대편의 볼을 가장 빠르게 빼앗아서 가장 빠르게 공격하겠다는 공격 지향적인 축구를 선호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정확성에 대한 개념에 속도라는 개념이 추가되어 보다 빠르고 보다 정확할 것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전술적인 면보다는 개인 기술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패스의 질, 킥의 질, 원터치 볼 컨트롤의 질, 움직임의 질 등이 그것이다.
이는 전술적인 면보다는 개인 기술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패스의 질, 킥의 질, 원터치 볼 컨트롤의 질, 움직임의 질 등이 그것이다.  


축구의 미래는 개인 기술, 개인 전술, 그룹 전술이 기본이 될 것이다. 이것이 완성되면 11명의 특성을 살려 시스템을 완성시키고, 시합 도중 시스템에 급한 변화를 주어도 무리없이 소화해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축구의 미래는 개인 기술, 개인 전술, 그룹 전술이 기본이 될 것이다. 이것이 완성되면 11명의 특성을 살려 시스템을 완성시키고, 시합 도중 시스템에 급한 변화를 주어도 무리없이 소화해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98 프랑스 월드컵 대회에서 활약한 세계의 톱 클래스 선수들이 화려하고 특별한 기술을 갖고 있는 선수들이라기보다는 기본이 완벽한 선수들이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공격은 공격만, 수비는 수비만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현대 축구는 스페셜리스트가 아닌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메인이 되었다.
98 프랑스 월드컵 대회에서 활약한 세계의 톱 클래스 선수들이 화려하고 특별한 기술을 갖고 있는 선수들이라기보다는 기본이 완벽한 선수들이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공격은 공격만, 수비는 수비만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현대 축구는 스페셜리스트가 아닌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메인이 되었다.  


현대 축구의 공격 시발점은 어느 팀이든 최후방의 수비 라인이 되고 있다. 이는 예전처럼 중반부터 공격을 시작할 수 있는 시간적, 공간적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갈수록 급박한 긴장감에 의해 현대 축구는 변모할 것이다.
현대 축구의 공격 시발점은 어느 팀이든 최후방의 수비 라인이 되고 있다. 이는 예전처럼 중반부터 공격을 시작할 수 있는 시간적, 공간적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갈수록 급박한 긴장감에 의해 현대 축구는 변모할 것이다.  


앞으로는 더욱 더 빨라질것이라는 점은 자명한 사실이다. 깨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마라톤 기록이 깨어지듯이 새로운 시대에는 상상도 못할 축구가 전개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흐름에 대응하여 우리가 해야할 일은 개인기술의 향상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s>그리고 [[신진호]], [[이명주]], [[김승대]], [[손준호]]를 길러냈다.</s>
앞으로는 더욱 더 빨라질것이라는 점은 자명한 사실이다. 깨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마라톤 기록이 깨어지듯이 새로운 시대에는 상상도 못할 축구가 전개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흐름에 대응하여 우리가 해야할 일은 개인기술의 향상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s>그리고 [[신진호]], [[이명주]], [[김승대]], [[손준호]]를 길러냈다.</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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