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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영주 농민조합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32년 7월 영주, 봉화지역 농민 청년층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있을 때 그를 비롯한 아도서숙의 관계자 18명이 경찰에 연행되어 60일간의 취조를 받은 후 석방되었다. 이 일로 아도서숙은 1933년 7월경 일제에 의해 폐쇄되었다. | 1929년 영주 농민조합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32년 7월 영주, 봉화지역 농민 청년층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있을 때 그를 비롯한 아도서숙의 관계자 18명이 경찰에 연행되어 60일간의 취조를 받은 후 석방되었다. 이 일로 아도서숙은 1933년 7월경 일제에 의해 폐쇄되었다. | ||
이후 농민조합의 재건을 꾀한 김명진은 1932년 9월 안동의 사회운동가 안상윤(安相潤)이 검거를 피해 수도리로 숨어들자, 박승서의 집에서 [[ | 이후 농민조합의 재건을 꾀한 김명진은 1932년 9월 안동의 사회운동가 안상윤(安相潤)이 검거를 피해 수도리로 숨어들자, 박승서의 집에서 [[김종진]]의 소개를 통해 안상윤을 만나서 영주의 사회운동 상황에 대해 논의했다. 이때 안상윤이 "영주 운동의 소장이 남아 있는 여러분의 활동 여하에 달려 있으니, 수도리를 중심으로 소수라도 재건조직을 도모하자"고 제안했다. 김명진은 이에 동의하여 안상윤, 김종진 등과 함께 재건 조직을 만들기로 결의했다. | ||
이리하여 1932년 10월 5일 영주적색농민조합재건투쟁위원회를 조직하였고, 김명진은 반제부 위원, 안상윤은 지도부 위원, 김종진은 적농부 위원을 각각 맡았다. 지도부는 적색농조, 반제운동에 대한 당면 전술을 지도하였으며, 적농부는 정기적으로 농민강좌회를 개최하여 계급의식을 주입하고 의식분자를 획득하여 적색농민조합을 조직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반제부는 소부르주아지에게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여 반제동맹을 조직하기로 하였다. | 이리하여 1932년 10월 5일 영주적색농민조합재건투쟁위원회를 조직하였고, 김명진은 반제부 위원, 안상윤은 지도부 위원, 김종진은 적농부 위원을 각각 맡았다. 지도부는 적색농조, 반제운동에 대한 당면 전술을 지도하였으며, 적농부는 정기적으로 농민강좌회를 개최하여 계급의식을 주입하고 의식분자를 획득하여 적색농민조합을 조직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반제부는 소부르주아지에게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여 반제동맹을 조직하기로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