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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7월부터 1928년 2월 사이에 경성복심법원 검사국에서 작성한 <왜정시대인물사료>에 따르면, 김명식은 1890년 9월 16일에 출생했다고 한다. 반면 와세다대학 학적부에 명기된 기록에 따르면, 그는 명치 24년(1891년) 9월 26일 생이라고 한다. 그는 전라남도 제주목 신좌면 조천리(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제 16통 5호에서 부친 김문주와 모친 송권숙의 4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부친 김문주는 1891년부터 1894년까지 정의현감을 지냈으며, 그의 집안은 [[김해 김씨]] 조천이동파로 조천 일대에서 상당한 명문가였다. | 1927년 7월부터 1928년 2월 사이에 경성복심법원 검사국에서 작성한 <왜정시대인물사료>에 따르면, 김명식은 1890년 9월 16일에 출생했다고 한다. 반면 와세다대학 학적부에 명기된 기록에 따르면, 그는 명치 24년(1891년) 9월 26일 생이라고 한다. 그는 전라남도 제주목 신좌면 조천리(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제 16통 5호에서 부친 김문주와 모친 송권숙의 4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부친 김문주는 1891년부터 1894년까지 정의현감을 지냈으며, 그의 집안은 [[김해 김씨]] 조천이동파로 조천 일대에서 상당한 명문가였다. | ||
15살 때인 1905년 구좌면 김녕리에 사는 김희서와 결혼했고, 1919년 오인성을 둘째 아내로 둬서 딸 수원을 얻었으나 이듬해에 오인성과 사별하였다. 또한 <왜정시대인물사료>에 따르면, 첩으로 송옥을 두었다고 한다. 허호준 교수의 <혁명가 김명식의 생애와 사상>에 따르면, 김명식은 아들 김갑환, 김성환, 딸 김순애, 김순실과 김수원 등 2남 3녀가 있었다고 한다. 반면 <왜정시대인물사료>에는 장남 김갑순과 장녀 김정옥만 명기되어 있다. 1926년 관종원의 탐방 기사<ref>곽종원, <새해에 환우들은 엇더하신가. 환우 | 15살 때인 1905년 구좌면 김녕리에 사는 김희서와 결혼했고, 1919년 오인성을 둘째 아내로 둬서 딸 수원을 얻었으나 이듬해에 오인성과 사별하였다. 또한 <왜정시대인물사료>에 따르면, 첩으로 송옥을 두었다고 한다. 허호준 교수의 <혁명가 김명식의 생애와 사상>에 따르면, 김명식은 아들 김갑환, 김성환, 딸 김순애, 김순실과 김수원 등 2남 3녀가 있었다고 한다. 반면 <왜정시대인물사료>에는 장남 김갑순과 장녀 김정옥만 명기되어 있다. 1926년 관종원의 탐방 기사<ref>곽종원, <새해에 환우들은 엇더하신가. 환우 기명식, [[황옥]], [[현상윤]] 군을 찾고>, <개벽> 제66호, 1926.</ref>에 따르면, 김명식의 가족은 처 송씨 외에 2남 3녀가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허호준 교수의 주장대로 김명식에게는 자녀가 2남 3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
김명식은 1902년부터 1906년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1910년 제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어 경성 유학길에 올라 1911년 4월 경성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2년 일본 교사에게 대항하다 퇴학당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가서 와세다대학 중학과의 '교외생' 과정을 마친 후, 1915년 9월 13일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치경제과에 입학하여 1918년 7월 5일 졸업했다. 1919년 봉래정에서 신아상회를 설립하여 무역상으로 생계를 꾸렸으나 1920년 1월 사업이 실패하여 폐업한 뒤 신문사, 잡지사 등에 몸담으면서 문필 활동을 전개했다. [[동아일보]]에는 논설반 기자로서 무기명 사설과 함께 기명의 글을 발표하였고, <신생활>에는 이사 겸 주필로 참여하면서 편집과 집필의 핵심인사로 황동했으며, <조선지광>에는 주요 기고자로 활동하였고, <삼천리>, <비판>, <동광>, <조광> 등 각종 잡지에 글을 발표했다. | 김명식은 1902년부터 1906년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1910년 제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어 경성 유학길에 올라 1911년 4월 경성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2년 일본 교사에게 대항하다 퇴학당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가서 와세다대학 중학과의 '교외생' 과정을 마친 후, 1915년 9월 13일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치경제과에 입학하여 1918년 7월 5일 졸업했다. 1919년 봉래정에서 신아상회를 설립하여 무역상으로 생계를 꾸렸으나 1920년 1월 사업이 실패하여 폐업한 뒤 신문사, 잡지사 등에 몸담으면서 문필 활동을 전개했다. [[동아일보]]에는 논설반 기자로서 무기명 사설과 함께 기명의 글을 발표하였고, <신생활>에는 이사 겸 주필로 참여하면서 편집과 집필의 핵심인사로 황동했으며, <조선지광>에는 주요 기고자로 활동하였고, <삼천리>, <비판>, <동광>, <조광> 등 각종 잡지에 글을 발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