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천 (1888년, 북청) 편집하기


편집하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적으로 기록됩니다. 계정을 만들고 로그인하면 편집 시 사용자 이름만 보이며, 위키 이용에 여러 가지 편의가 주어집니다.

편집을 취소할 수 있습니다. 이 편집을 되돌리려면 아래의 바뀐 내용을 확인한 후 게시해주세요.

최신판 당신의 편집
2번째 줄: 2번째 줄:


金擎天.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199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金擎天.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199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888년 6월 5일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읍 승평리에서 부친 김정우(金鼎禹)와 모친 윤옥연(尹玉蓮)의 5남 1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김정우는 1895년 일본에 관비 유학생으로 유학, 경응의숙 보통과, 동경 신전구(神田區) 순천구합사학교(順天求合社學校) 공업예비과, 동경고등공업학교 기계학과를 졸업한 후 동경포병공창에서 총탄제조 견습을 마치고 귀국해서 대한제국 육군군기창장으로 일했던 일본 유학파 출신 조선 육군 최고위층 인사였다.
1888년 6월 5일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읍 승평리에서 부친 김정우(金鼎禹)와 모친 윤옥연(尹玉蓮)의 5남 1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김정우는 1895년 일본에 관비 유학생으로 유학, 경응의숙 보통과, 동경 신전구(神田區) 순천구합사학교(順天求合社學校) 공업예비과, 동경고등공업학교 기계학과를 졸업한 후 동경포병공창에서 총탄제조 견습을 마치고 귀국해서 대한제국 육군군기창장으로 일했던 일본 유학파 출신 조선 육군 최고위층 인사였다.


김경천은 8살 때 서울 사직동으로 이주했고 15살에 경성학당을 졸업했다. 1909년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에 거주하는 부호 유계준(柳桂俊)의 딸 유정화(호적명: 유정(柳貞))와 결혼했다. 김경천이 일본으로 유학가기 1주일 전에 혼인 잔치가 벌어졌는데, 이때 김경천은 부인에게 피아노를 사주고 배우게 했다고 한다. 이후 김경천은 부인을 일본으로 불렀고, 두 딸 지리(知利)와 지혜(智慧)를 낳았다.
김경천은 8살 때 서울 사직동으로 이주했고 15살에 경성학당을 졸업했다. 1909년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에 거주하는 부호 유계준(柳桂俊)의 딸 유정화(호적명: 유정(柳貞))와 결혼했다. 김경천이 일본으로 유학가기 1주일 전에 혼인 잔치가 벌어졌는데, 이때 김경천은 부인에게 피아노를 사주고 배우게 했다고 한다. 이후 김경천은 부인을 일본으로 불렀고, 두 딸 지리(知利)와 지혜(智慧)를 낳았다.
29번째 줄: 29번째 줄:
{{인용문|3월 3일에 독립선언이 터지니 이때 우리군의 몇 사람은 장래 조선 민족이 독립운동을 하자면 아령과 남북만주를 중심삼지 아니하면 아니되리라하고 동지 지청천과 함께 협의하고 국경을 남으려는데 당시 경계가 심할 때이라. 잘못하다가 잡힐 염려가 있으므로 6월 6일에 우리 두 사람은 군복을 벗고 보통 양복을 갈아입은 후 자동차를 타고 수원을 갔었소. 그리하야 수원에서 차를 타고 그대로 남대문으로 오니 해가 지고 어둡디다. 그대로 신의주까지 와서 자는 데 밤중에 경찰의 조사가 있으므로 그 밤을 자지 못하고 처음에는 일인이라고 대답한 후 정거장에 가서 차를 타고 국경을 넘었습니다.}}
{{인용문|3월 3일에 독립선언이 터지니 이때 우리군의 몇 사람은 장래 조선 민족이 독립운동을 하자면 아령과 남북만주를 중심삼지 아니하면 아니되리라하고 동지 지청천과 함께 협의하고 국경을 남으려는데 당시 경계가 심할 때이라. 잘못하다가 잡힐 염려가 있으므로 6월 6일에 우리 두 사람은 군복을 벗고 보통 양복을 갈아입은 후 자동차를 타고 수원을 갔었소. 그리하야 수원에서 차를 타고 그대로 남대문으로 오니 해가 지고 어둡디다. 그대로 신의주까지 와서 자는 데 밤중에 경찰의 조사가 있으므로 그 밤을 자지 못하고 처음에는 일인이라고 대답한 후 정거장에 가서 차를 타고 국경을 넘었습니다.}}


김경천과 지청천 등 일본군 현역 장교의 망명은 일본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본군은 두 사람의 체포에 혈안이 되었으며, 현상금 5만엔을 내걸었다. 한편 김경천은 신의주 맞은 편 안동현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대한독립청년단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운동비 조달을 위해 노력했으며,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된 [[김규식 (1881년)|김규식]] 등 동지들을 후원하고자 노력했다.
김경천과 지청천 등 일본군 현역 장교의 망명은 일본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본군은 두 사람의 체포에 혈안이 되었으며, 현상금 5만엔을 내걸었다. 한편 김경천은 신의주 맞은 편 안동현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대한독립청년단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운동비 조달을 위해 노력했으며,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된 [[김규식]] 등 동지들을 후원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1919년 8월에는 [[안병찬 (1881년)|안병찬]] 외 28명 중 한 사람으로서 '중화민국 관상보 학계제군에게 고함'이란 제목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그들은 이 성명에서 일본이 조선과 마찬가지로 중국에 대해서도 침략을 전개할 것이며, 만일 국제연맹에서 한국문제에 대해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얻지 못하면 곧 독립전쟁을 선포하여 최후의 한 사람까지 혈전을 전개할 것임을 천명했다.
또한 1919년 8월에는 [[안병찬]] 외 28명 중 한 사람으로서 '중화민국 관상보 학계제군에게 고함'이란 제목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그들은 이 성명에서 일본이 조선과 마찬가지로 중국에 대해서도 침략을 전개할 것이며, 만일 국제연맹에서 한국문제에 대해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얻지 못하면 곧 독립전쟁을 선포하여 최후의 한 사람까지 혈전을 전개할 것임을 천명했다.


그러나 김경천의 대한독립단에서의 활동은 그해 8월 총재 안병찬이 체포되면서 대한독립단이 약화되자 크게 위축되었다. 이에 김경천은 보다 효율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서간도 유하현에 있는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 교관으로서 활동했다. 그는 이 학교에서 [[지청천]], [[신팔균]]과 함께 교관을 맡아 독립군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세 사람은 조국을 위해 투쟁할 것을 맹세하고 그 맹세의 뜻으로 다같이 천자(天字)가 붙은 별호를 가지게 되었는데, 동천(東天) 신팔균, 경천(擎天) 김광서(金光瑞). 청천(靑天) 지석규(池錫奎)라 했는데, 사람들은 이들을 남만 삼천(南滿 三天)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김경천의 대한독립단에서의 활동은 그해 8월 총재 안병찬이 체포되면서 대한독립단이 약화되자 크게 위축되었다. 이에 김경천은 보다 효율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서간도 유하현에 있는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 교관으로서 활동했다. 그는 이 학교에서 [[지청천]], [[신팔균]]과 함께 교관을 맡아 독립군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세 사람은 조국을 위해 투쟁할 것을 맹세하고 그 맹세의 뜻으로 다같이 천자(天字)가 붙은 별호를 가지게 되었는데, 동천(東天) 신팔균, 경천(擎天) 김광서(金光瑞). 청천(靑天) 지석규(池錫奎)라 했는데, 사람들은 이들을 남만 삼천(南滿 三天)이라고 불렀다.
116번째 줄: 116번째 줄:
이후 수청 계곡의 다우지미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은 그는 1922년 10월 고려혁명군이 조직되어 총재에 이중집(李仲執)이 선임되었을 때 고려혁명군 동부사령관을 맡았다. 그러나 1922년 12월 말 소련 정부가 한인무장부대에게 무장 해제를 요구하면서, 고려혁명군은 설립된 지 2달만에 해산되었다.
이후 수청 계곡의 다우지미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은 그는 1922년 10월 고려혁명군이 조직되어 총재에 이중집(李仲執)이 선임되었을 때 고려혁명군 동부사령관을 맡았다. 그러나 1922년 12월 말 소련 정부가 한인무장부대에게 무장 해제를 요구하면서, 고려혁명군은 설립된 지 2달만에 해산되었다.


한편, 김경천은 연해주에서 백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투쟁할 때 '김일성'이라는 가명을 쓰기도 했다. 이 때문에 김일성 가짜설의 근거로 인용되기도 했다. 그의 활약상과 위상이 당대 어느 정도였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편, 김경천은 연해주에서 백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투쟁할 때 '김일성'이라는 가명을 쓰기도 했다. 이 때문에 김일성 가짜설의 근거로 인용되기도 했다. 그의 활약상과 위상이 당대 어느정도였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러시아 내전]] 종결 후 한인 무장단체들이 모조리 해산당한 것에 실의에 빠져 있던 김경천은 1923년 2월 상하이로 가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했다. 그러나 개조파와 창조파 간의 알력다툼이 극심한 것에 깊은 실망을 느낀 그는 그해 4월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서 구로지코 부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려 했으며, 사관생도의 교재용으로 일본 육사의 교과서를 번역한 것을 사용하려 했다. 그러나 자금을 모으지 못해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러시아 내전]] 종결 후 한인 무장단체들이 모조리 해산당한 것에 실의에 빠져 있던 김경천은 1923년 2월 상하이로 가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했다. 그러나 개조파와 창조파 간의 알력다툼이 극심한 것에 깊은 실망을 느낀 그는 그해 4월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서 구로지코 부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려 했으며, 사관생도의 교재용으로 일본 육사의 교과서를 번역한 것을 사용하려 했다. 그러나 자금을 모으지 못해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137번째 줄: 137번째 줄:
[[분류: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분류: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분류:북청군 출신]]
[[분류:북청군 출신]]
[[분류:1888년 출생]]
[[분류:1942년 사망]]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각주}} · {|class="wikitable" · |- · rowspan=""| · colspan=""| · |}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