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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 == | == 기원 == | ||
고구마의 원산지는 중앙아메리카에 위치한 멕시코 유카탄반도 지역과 남아메리카 베네수엘라의 오리노코 강 하구 지역 사이로 알려지고 있다. 이 지역에서 적어도 | 고구마의 원산지는 중앙아메리카에 위치한 멕시코 유카탄반도 지역과 남아메리카 베네수엘라의 오리노코 강 하구 지역 사이로 알려지고 있다. 이 지역에서 적어도 2000년 이상 인간에 의해 이용되었으며 현재 재배되고 있는 재배종이 해당 지역에서 야생되고 있다.<ref>Ibid., p.23</ref> | ||
남아메리카에서는 [[페루]]의 고구마 잔존물이 기원전 8,000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본다. | 남아메리카에서는 [[페루]]의 고구마 잔존물이 기원전 8,000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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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탐험가들에 의해 필리핀 마닐라와 몰루카 제도로 전파되었고 포르투갈 사람에 의해 말레이 군도에 전달되었으며 필리핀 루손섬으로부터 중국 푸젠으로 전파되었다. | 스페인 탐험가들에 의해 필리핀 마닐라와 몰루카 제도로 전파되었고 포르투갈 사람에 의해 말레이 군도에 전달되었으며 필리핀 루손섬으로부터 중국 푸젠으로 전파되었다. | ||
1605년경에는 중국 푸젠에서 류큐와 대만으로 전파, 류큐에서부터 일본 본토로 전파되었으며 1723년에 대마도에 고구마가 전해졌다고 알려져 있다.<ref>Ibid., pp.23-24</ref> | |||
=== 한국 === | === 한국 === | ||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최초로 고구마를 본 사람은 |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최초로 고구마를 본 사람은 1719년 통신사로서 [[일본]]에 파견된 신유한이다. 그가 길가에 위치한 주점에서 고구마를 구워서 파는 것을 본 것이 고구마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ref>노성환, 「조선통신사와 고구마의 전래」, 『동북아문화연구』, 제23집, 동북아시아문화학회, 2010, p.539</ref> | ||
본격적인 고구마 전래는 이광려에 의해 시도되었다. 그는 고구마의 이점을 알고 조선에 도입되기를 간절히 원하여 두 차례가량 연행사를 수행하는 역관을 통해 직접 종자를 얻으려했지만 실패했고 | 본격적인 고구마 전래는 이광려에 의해 시도되었다. 그는 고구마의 이점을 알고 조선에 도입되기를 간절히 원하여 두 차례가량 연행사를 수행하는 역관을 통해 직접 종자를 얻으려했지만 실패했고 1762년, 연행사로 북경에 가는 서지수에게 부탁하여 고구마 종자를 얻는데 성공하였지만, 가지고 오는동안 관리를 잘못하여 종자가 죽어버리고 만다.<ref>Ibid., pp.539-541</ref> 이후, 이광려는 1764년 강계헌에게 부탁하여 일본을 거쳐 온 고구마 종자를 구한 다음 재배에 성공하였지만 보관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다음해에 종자로 쓰지 못하게 되었다.<ref>염정섭, 「조선 후기 고구마의 도입과 재배법의 정리과정」, 『한국사연구 134』, 한국사연구회, 2006, pp.116-117</ref> | ||
그래서 한국의 고구마 전래는 일본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 그래서 한국의 고구마 전래는 일본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1763년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조엄(趙曮)이 대마도(對馬島)에서 고구마 종자를 구한 다음, 부산진에 보내어 당시 부산진 참사 이응혁에게 보관하게 한 다음 1764년 봄, 절영도 조도 맞은 편 야산에 재배하게 했다.<ref>노성환, op.cit., p.542</ref> | ||
한편, | 한편, 1764년 동래부사로 부임한 강필리는 1765년 고구마 종자를 구하고 또한 종식방(種植方)<ref>種植 : 종식, 씨를 뿌리고 식물을 심는 일 - 네이버 한자사전</ref>을 구하여 『감저보(甘藷譜)』라는 책자를 발간하였다. 강필리는 고구마 종자를 구하여 탐라(耽羅, 현 제주도)를 비롯한 인근 군현에까지 재배 방법과 함께 나누어 주어 남해안 연안 지역에 고구마 재배를 보급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고, 비변사에까지 보냈다. 1766년 동래부사에서 물러나서는 고구마 종자를 확보하여 한성(漢城, 현 서울)에 실어 보내고 동래에서도 종자를 남겨 심게 하였다.<ref>염정섭, op.cit.,pp.117-118</ref> 1813년 김장순과 선종한, 이 두사람이 고구마 보급에 노력을 쏟아 감저신보란 책을 썼으며 1834년 서유구가 전라관찰사로 있을 때 종저보를 지어 호남지방에 고구마 심기를 권장하였다.<ref>농촌진흥청, op.cit.,p.24</ref> | ||
== 어원 == | == 어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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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확 === | === 수확 === | ||
==== 수확시기 ==== | ==== 수확시기 ==== | ||
고구마는 9℃ 이하의 낮은 온도를 접하면 저장성이나 싹 트는 힘이 낮아지므로 서리가 내리기 전까지 수확을 마무리 지어야한다. 보통기 재배를 기준으로 | 고구마는 9℃ 이하의 낮은 온도를 접하면 저장성이나 싹 트는 힘이 낮아지므로 서리가 내리기 전까지 수확을 마무리 지어야한다. 보통기 재배를 기준으로 9월 하순부터 10월 상·중순까지 수확을 해야 한다. | ||
사료용으로 이용할 경우, 줄기와 잎도 이용하기 때문에 늦게 거두면 낙엽이 되어 이용가치가 낮아지므로 다소 이르게 거둬들인다. | 사료용으로 이용할 경우, 줄기와 잎도 이용하기 때문에 늦게 거두면 낙엽이 되어 이용가치가 낮아지므로 다소 이르게 거둬들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