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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재 | ||
| | |명칭 = 강화 초지진 | ||
| | |한자 = 江華 草芝鎭 | ||
|그림 | |그림 =초지진.jpg | ||
|그림설명 = | |그림설명 = | ||
| | |종목 = [[사적]] 제225호 | ||
| | |분류 =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시설 | ||
| | |수량= | ||
| | |면적 = 4,242㎡ | ||
|날짜 = 1971년 12월 29일 |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624번지 | |||
|시대 =조선시대 | |||
| | |소유 = | ||
|관리 = [[강화군]] | |||
}} | }} | ||
==개요== | ==개요== | ||
한강 하구와 연결되는 강화해협(염하) 방어를 위한 요새시설로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의 관련 기록을 보면 조선 [[효종]] 6년인 1655년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강화 해안경계 부대인 [[강화 12진보]]{{ㅈ|[[강화 5진 7보]]}} 중 서남쪽 끝에 자리하고 있는 진지로 본래는 [[경기도]] [[안산시|안산]] [[초지동|초지량]]에 자리하고 있던 수군 만호를 강화도로 옮겨온 것으로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당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 |||
당시 초지진 관할에는 초지돈대, [[장자평돈대]], [[섬암돈대]]의 3개 돈대와 진남포대의 1개 포대, 3척의 군선이 배속되어 있었으나 [[강화도조약]] 이후 진이 방치되었고 | 당시 초지진 관할에는 초지돈대, [[장자평돈대]], [[섬암돈대]]의 3개 돈대와 진남포대의 1개 포대, 3척의 군선이 배속되어 있었으나 [[강화도조약]] 이후 진이 방치되었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초지진 자체가 허물어지게 되었고 이후 복원된 초지돈대만 남게 되었다. | ||
==초지돈대== | ==초지돈대== | ||
1973년 복원되어 현재 남아있는 초지진의 유일한 시설물이다. [[초지대교]] 북쪽 반달형의 성곽을 둘러친 돈대로 내부에는 누각과 내부에 대포( | 1973년 복원되어 현재 남아있는 초지진의 유일한 시설물이다. [[초지대교]] 북쪽 반달형의 성곽을 둘러친 돈대로 내부에는 누각과 내부에 대포(홍이포) 1문이 전시되어 있다. 돈대의 성 둘레는 약 100m남짓 되는 규모로 성벽에는 화포를 쏠 수 있는 포좌 3개와 성벽 위에 설치된 여장(성가퀴)에 난 총안구 100여개가 설치되어 있다. 입장료는 700원으로 강화도 내 다른 군진시설 입장료와 동일하나 초지진 자체의 시설이 다른 유료 관람 유적에 비해 상당히 작은 편인지라 다른 진이나 보를 구경하고 난 다음에 초지진에 들르면 뭔가 손해보는 기분이 들 수도 있다. | ||
{{ | {{주석}} | ||
[[분류:사적]] | [[분류:사적]] | ||
[[분류:강화군]] | [[분류:강화군]] | ||
[[분류:한국의 성]] | |||
[[분류:진성]] | [[분류:진성]]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