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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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경우궁이 좁아 대비께서 생활하기  불편합니다. 창덕궁으로 환궁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인용문|경우궁이 좁아 대비께서 생활하기  불편합니다. 창덕궁으로 환궁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고종도 이를 적극 지지했다. 김옥균은 창덕궁이 너무 넓어서 지키기 어렵다며 반대 의사를 보였지만, 고종의 거듭된 청에 고심하다가  경우궁 옆의 이재원의 집인 계동궁(桂洞宮)으로 국왕과 왕비의 거처를 옮겼다. 이재원의 집은 경우궁보다는 넓었으나 궁궐보다는 규모가 작아서 창덕궁보다는 쉽게 방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창덕궁 환궁을 계속 요구했고, 고종도 김옥균에게 부탁했다. 김옥균은 이를 계속 거부했는데, 김옥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자기의 병력이면 청군의 공격도 물리칠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이를 받아들였다. 김옥균이 나중에 이를 알고 다케조에에게 항의헀지만, 다케조에는 걱정하지 말라고 답했다. 결국 김옥균 등은 12월 5일 오후 5시 국왕과 왕비의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겨야 했다.
고종도 이를 적극 지지했다. 김옥균은 창덕궁이 너무 넙어서 지키기 어렵다며 반대 의사를 보였지만, 고종의 거듭된 청에 고심하다가  경우궁 옆의 이재원의 집인 계동궁(桂洞宮)으로 국왕과 왕비의 거처를 옮겼다. 이재원의 집은 경우궁보다는 넓었으나 궁궐보다는 규모가 작아서 창덕궁보다는 쉽게 방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창덕궁 환궁을 계속 요구했고, 고종도 김옥균에게 부탁했다. 김옥균은 이를 계속 거부했는데, 김옥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자기의 병력이면 청군의 공격도 물리칠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이를 받아들였다. 김옥균이 나중에 이를 알고 다케조에에게 항의헀지만, 다케조에는 걱정하지 말라고 답했다. 결국 김옥균 등은 12월 5일 오후 5시 국왕과 왕비의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겨야 했다.


김옥균 등은 창덕궁에 도착한 뒤 국왕을 중심에 놓고 내위(內衛)는 개화당의 장사들(충의계 맹원들과 사관생도들 약 50명), 중위(中衛)는 일본군(약 150명), 외위(外衛)는 친군영(親軍營) 전후영병(前後營兵)(약 750명)으로 하여금 3중으로 방위하게 하였다. 이후 고종에게 14개 조항의 혁신정강을 바쳤고, 고종은 이에 서명했다. 그런데 다케조에가 돌연 일본의 병력으로서는 오랫동안 왕궁에 머물 수 없으므로 철병하겠다고 통고했다. 이에 김옥균이 조선군이 지금 총을 분해소제하는 중이니<ref>급진개화파는 정변 수개월 전에 미국으로부터 최신식 소총 3천정을 구입해다가 사용하지 않고 각 영의 무기고에 보관해뒀다. 그들은 정변 당일 이를 꺼내어 무장을 강화하려 했으나 총에 녹이 슬어 있어서 분해소제를 하였다.</ref> 단독으로 전투능력을 완전히 정비할 때까지 3일만 더 머물러 있다가 철병할 것을 설득하자, 다케조에는 승복하였다.
김옥균 등은 창덕궁에 도착한 뒤 국왕을 중심에 놓고 내위(內衛)는 개화당의 장사들(충의계 맹원들과 사관생도들 약 50명), 중위(中衛)는 일본군(약 150명), 외위(外衛)는 친군영(親軍營) 전후영병(前後營兵)(약 750명)으로 하여금 3중으로 방위하게 하였다. 이후 고종에게 14개 조항의 혁신정강을 바쳤고, 고종은 이에 서명했다. 그런데 다케조에가 돌연 일본의 병력으로서는 오랫동안 왕궁에 머물 수 없으므로 철병하겠다고 통고했다. 이에 김옥균이 조선군이 지금 총을 분해소제하는 중이니<ref>급진개화파는 정변 수개월 전에 미국으로부터 최신식 소총 3천정을 구입해다가 사용하지 않고 각 영의 무기고에 보관해뒀다. 그들은 정변 당일 이를 꺼내어 무장을 강화하려 했으나 총에 녹이 슬어 있어서 분해소제를 하였다.</ref> 단독으로 전투능력을 완전히 정비할 때까지 3일만 더 머물러 있다가 철병할 것을 설득하자, 다케조에는 승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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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유혁로, 변수 등은 일본 공사 다케조에와 일본군을 따라 달아나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오직 홍영식과 박영교 및 생도 7인만이 고종을 따라 북묘로 갔다. 이후 청군이 고종이 북묘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오를 거느리고 맞이하러 갔다. 이때 홍영식과 박영교가 고종의 어의를 끌어당기면서 가지 말라고 청했다. 여러 군영 병사들이 고종을 모시고서 인교(四人轎)에 태우니 홍영식 등은 또 고함을 지르며 막아섰다. 그러자 격분한 장병들이 공격하여 홍영식, 박영교 및 생도 7명을 죽였다. 그후 국내에 남은 급진개화파 인사들이 철저히 색출되어 수십명이 피살되면서, 갑신정변은 실패로 끝났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유혁로, 변수 등은 일본 공사 다케조에와 일본군을 따라 달아나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오직 홍영식과 박영교 및 생도 7인만이 고종을 따라 북묘로 갔다. 이후 청군이 고종이 북묘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오를 거느리고 맞이하러 갔다. 이때 홍영식과 박영교가 고종의 어의를 끌어당기면서 가지 말라고 청했다. 여러 군영 병사들이 고종을 모시고서 인교(四人轎)에 태우니 홍영식 등은 또 고함을 지르며 막아섰다. 그러자 격분한 장병들이 공격하여 홍영식, 박영교 및 생도 7명을 죽였다. 그후 국내에 남은 급진개화파 인사들이 철저히 색출되어 수십명이 피살되면서, 갑신정변은 실패로 끝났다.
== 결과 ==
== 결과 ==
갑신정변은 조정에서 대세로 자리잡았던 개화 정책에 제동이 걸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급진개화파가 정변을 주도했기 때문에, 이후 조선 유학자들에게 있어 개화는 곧 반역으로 받아들여졌다. 윤치호는 일기에 원래 개화라고 하면 듣는 이들 중에서도 그다지 반발하는 이들이 없었는데, 갑신정변이 터지고 나니까 "개화하자는 사람들은 죄다 외세를 끌어들여서 반역하는 사람들이다." 라는 말이 돌았다고 기술했다. 그나마 김홍집, 어윤중을 필두로 하는 온건개화파는 조정에 남아서 근대적 개혁을 조심스럽게 추진했지만, 그 속도는 이전에 비해 현저히 느렸다. 본격적인 개혁은 [[갑오개혁]]에 이르러서야 시행될 수 있었고, 그나마도 일본의 간섭 떄문에 불완전했다.
갑신정변은 조정에서 대세로 자리잡았던 개화 정책에 제동이 걸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급진개화파가 정변을 주도했기 때문에, 이후 조선 유학자들에게 있어 개화는 곧 반역으로 받아들여졌다. 윤치호는 일기에 원래 개화라고 하면 듣는 이들 중에서도 그다지 반발하는 이들이 없었는데, 갑신정변이 터지고 나니까 "개화하자는 사람들은 죄다 외세를 끌어들여서 반역하는 사람들이다." 라는 말이 돌았다고 기술했다. 그나마 김홍집, 어윤중을 필두로 하는 온건개화파는 조정에 남아서 근대적 개혁을 조심스럽게 추진했지만, 그 속도는 이전에 비해 현저히 느렸다. 본격적인 개혁은 [[갑오개혁]]에 이르러서야 시행될 수 있었고, 그나마도 일본의 간섭 떄문에 불완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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