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하고 있지 않습니다. 편집하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적으로 기록됩니다. 계정을 만들고 로그인하면 편집 시 사용자 이름만 보이며, 위키 이용에 여러 가지 편의가 주어집니다.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발발 원인 == 한국전쟁은 왜 발생했는가? 이는 [[냉전|냉전사]] 최대의 난제이다. 그 이유는 한국전쟁의 원인은 냉전의 원인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냉전의 원인에 대한 의견은 한국전쟁 이전, 마샬플랜이니 스탈린의 제1차 베를린 점령이니 등으로 그 모습이 드러났다고 보지만 구체적인 냉전체제가 등장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의 일이다. 그렇기에 한국전쟁의 원인은 냉전의 원인과 함께 연구되어왔다. 현재 냉전사에 대한 의견은 [[전통주의]]와 [[수정주의]]로 나눠져 있고, 냉전사 연구 및 한국전쟁 연구를 선도하는 곳은 [http://www.wilsoncenter.org/publication-series/cwihp-bulletin 조지 워싱턴 대학의 우드로 윌슨 센터]가 있다. ===전통주의적 입장=== 냉전은 소련 탓!!!! 이라 주장하는 전통주의는 기본적으로 한국전쟁도 소련 때문에 발발되었다고 주장한다. 달린의 경우 한국전쟁은 스탈린의 기획된 음모라 보았는데, 그 이유는 스탈린이 기만질에 능통한 개새끼이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자신의 영향력을 팽창시키고 싶은데, 소련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피해가 극심해서 미국과 맞짱을 뜨기는 힘들 것이라 판단하여 다른 방안을 고안했는데 그것이 바로 소련군이 참전하지 않고, 위성국의 군대로만 전쟁을 일으키는 방안을 세운다.<s>역시 난 천재!!!!</s> 그래서 스탈린은 어디에서 시험할까 고민하던 중에 막내 중 가장 존재감 없던 김일성을 불러서 “남침해라 물자는 지원해줄게”라 말했고, 이에 김일성이 “네 형님”하고 지시에 따랐다는 것이다.<ref>정확히 말하자면, 달린은 공산주위 진영에서 하위층에 있는 북한이 정점에 있는 소련의 지시없이 전쟁을 주도했을 리가 없다고 주장을 했다.</ref><ref>Dallin, 'Soviet Foreign Policy After Stalin', p.60.</ref> 서울대 김영호 교수는 롤백이론을 제시했는데 김영호의 말을 요약하자면 김일성이 졸라서 전쟁이 났다는 주장은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구소련문서가 중요한 사실을 배제하고 있고, 단순한 요약본이라는 점을 들어 이것은 러시아가 선별한 자료라 신빙성이 없다고 거부하였다. 그러면서 김영호는 설혹 김일성이 떼를 쓴 게 사실이라고 해도, 스탈린이 전쟁을 거부한 게 아니라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왜냐면 1948년 베를린 봉쇄가 실패하면서 소련의 입지가 개차반이 되었는데 갑자기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자신감을 얻은 소련이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에서 세력을 팽창하려고 하였고, 한국을 그 기점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즉 스탈린은 마지못해 전쟁을 승인한 것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전쟁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는 것.<ref>김영호. “한국전쟁 원인의 국제정치적 재해석: 스탈린의 롤백이론.” 『한국정치학회보』 31집. 3호. 1997.</ref> ===수정주의적 입장=== 수정주의는 냉전은 미국 탓<ref> 대표적으로 윌리엄 A. 윌리엄스의 ''The Tragedy of American Diplomacy''</ref>으로 시작했다가 냉전은 소련이외의 요소 결과라는 것으로 변화하였다. 한국전쟁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미국의 잘못된 대외정책이라는 입장에서 내인론 또는 내인론과 외인론의 결합 등으로 변화되고 있다. 플레밍의 경우 한국전쟁의 원인은 미국의 잘못된 대외정책의 결과라 비난하면서 특히 에치슨 선언처럼 미국이 남한에 대해 소극적으로 지원한 결과라 주장했다. 플레밍은 당시 트루먼 행정부가 남한정부가 전쟁을 일으킬까 두려워 군사지원을 꺼려했고, 그 결과 남북한 간의 군사력 격차가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북한이 전쟁을 일으킨 것이라 보았다.<ref>D. F. Flemming, The Cold War and its Origins, Vol. II, 1950-1960, Garden City: Doubleday, 1961.</ref> 수정주의자의 전성기를 연 브루스 커밍스의 경우 한국전쟁은 내부적 요인으로 발발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커밍스는 한국은 이미 일제 통치기간에 계급 간 격차가 극심했는데 이 문제가 해방이후 미소 분할점령으로 더욱 극심화되었고 그 결과 전쟁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인 『한국전쟁의 기원』 1권을 내내 일제강점기의 계급 간 격차 및 사회문제를 설명하고 있다.<ref>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자동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1권, 서울: 일월서각, 1997.</ref> 그러나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직접적인 요인을 잘못된 지식 하에서 서술했는데 뭐 남한이 북한을 도발했다든지, 남한 내에서 토지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든지 등이 있다.<ref>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자동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2권, 서울: 일월서각, 1997.</ref> 당연히 전통주의자들에게 신나게 털렸다. 시몬스의 경우 김일성이 불안정한 기반으로 시작하였고, 한반도 내에 기반이 있는 세력에 비해 힘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박헌영을 위시한 [[남로당]]계열이 대거 북한에 들어오는데 애들의 규모가 엄청난 양이었다. 그로 인해서 김일성의 권한은 더 불안해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김일성은 박헌영을 괴롭히고 힘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그 과정에서 고통받던 박헌영이 이러게 된 이상 갈때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남침'''을 건의했고, 영토야욕이 있던 김일성이 이를 수용해서 소련의 스탈린에게 달려가 전쟁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한다.<s>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전쟁하게 해주세요.</s> 김일성의 부탁에 스탈린이 승인했고 이로 인해서 한국전쟁이 발발되었다고 말한다. === 둘을 조합한 현재 학계 정설 === <big>'''그런거 없다'''</big> {{인용문2|6·25전쟁의 원인을 규명하여 줄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가 완전하지 않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 동안 6·25 전쟁에 대한 원인과 기원에 대한 자료로 활용된 것은 주요 인사들의 회고록과 일화를 중심으로 개괄적으로 연구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회고록과 일화는 모든 상황이 종료된 후에 자기중심적으로 서술한 글로서 객관적이기보다는 자신의 일화에 대한 미화와 왜곡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개연성을 가지고 있는 관계로 이러한 자료를 연구 논문의 객관적 자료로 활용되었다는 것은 연구논문에 대한 신뢰성을 보장 받을 수 없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박광득, “제1장 6.25전쟁의 기원과 원인에 관한 연구.” 『통일전략』, 10권, 1호, 2010, pp.14-16}} 박광득이 이야기했듯이 지금 한국전쟁 중론을 도출하기 위한 객관적인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ref>소련자료가 공개되었다는데 그것도 극히 일부고 제일 중요한 문서는 공개 되지 않았다. 이는 웨더스비도 지적한 부분이다. Kathryn Weathersby. “Soviet aims in Korea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945-1950: New Evidence from Russian Archives,” 1993, [http://www.wilsoncenter.org/sites/default/files/ACFB76.pdf] (Accessed 2015. 6. 9.) p. 9.</ref> 그래서 손경고는 한국전쟁 연구동향을 다루는 자신의 논문<ref>손경고. “최근 한국전쟁 연구동향: 2005년 이후 연구를 중심으로.” 『한국근현대사연구』. 56집. 봄호. 2011.</ref>에서 한국전쟁 원인에 대해서 명확하게 규정내리지 않았고, 그냥 이런저런 의견이 있더라 정도로 마무리하였다. 정병준의 경우도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책 서문에서 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한 연구가 변화되었고, 명확하게 어떤 것이라 규정되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 즉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진행 중이며 이에 대한 명확한 답안이 나오지 않는 상태이다. 최근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 학자로는 웨더스비, 개디스, 스툭, 정병준 등이 있다. 먼저 ''웨더스비''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로 '''김일성이 소련을 설득한 결과'''라 주장했다. 웨더스비가 보기에 스탈린은 그냥 한반도에서 세력균형을 원했지 전쟁을 원한 것이 아니었고, 전쟁도 김일성이 땡깡을 심하게 부려서 어쩔 수 없이 승인해 주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한국전쟁은 소련에게 책임이 없고, 당연히 냉전의 책임에서 소련의 역할은 적다고 주장한다.<ref>Kathryn Weathersby. “Soviet aims in Korea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945-1950: New Evidence from Russian Archives,” 1993, [http://www.wilsoncenter.org/sites/default/files/ACFB76.pdf] (Accessed 2015. 6. 9.) pp. 8-9.</ref> 한편 같은 수정주의자인 ''개디스(John Lewis Gaddis)''는 미국과 소련, 남북한 모두 한국전쟁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보았는데. 개디스는 김일성이나 이승만이나 둘 다 전쟁을 원하고 있었고, 전쟁을 준비했는데 소련이 미국보다 먼저 지원해줘서 북한이 침공한 것이라 주장한다. 즉 미국이 소련보다 먼저 지원했다면 이승만이 전쟁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ref>John Lewis Gaddis, We Now Know: Rethinking Cold War Histor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p.71.</ref> ''윌리엄 스툭(William Stueck)''의 경우, 한국전쟁은 국제적인 요인에 의해서 발발한 것이라 주장했는데, 그 이유로 그는 한국인은 독립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민족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개항이후 한국역사가 친러, 친미, 친일, 친청 등 파벌로 나뉘어 싸웠던 사실과, 이승만의 미국 대통령에게 독립청원을 한 사실을 가지고 한국인은 근본적으로 <s>답 없는</s>독립십이 없는 존재라 전쟁도 결정못한다고 주장했다.<s> 미국판 식민사관</s> 간단히 말해서 스툭의 의견은 '''한국 놈들 멍청해요. 그래서 전쟁 결정 못해요. 그러니 한국전쟁 소련이 일으킨거에요!!!'''<ref> 전형적인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반화의 오류]]이다. 독립청원이나 외교독립론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독립군들은 만주나 간도, 연해주로 피신하여 일본군에 대한 대규모 게릴라전을 펼치기도 했다.</ref><ref> Stueck, William Jr. “The Korean War.” Leffler, Melvyn P. edit.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Cold War. Vol. I. 2010.</ref> ''정병준''의 경우, 한국전쟁은 1948-1949년까지 지속되는 38선의 국지전의 연장이라 보았다는 의견이 있으나 실제로는 그 과정에서 형성되었다고 본 것이지 연장이라 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38선 충돌이 심하기 전부터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전쟁을 요청했으며 이 때 스탈린의 개시에 따라 북한의 유도나 화전양면전술이 일어났다고 본다. 그리고 스탈린 개입을 인정하는 수준을 넘어, 오히려 스탈린의 개입이 굉장히 중요했다고 보는 사람이며 미국이 북한의 남침을 예상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로 스탈린의 치밀한 위장을 지적했을정도다. 정병준이 말하는 것은 38선의 국지전 과정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할 수 있는 배경이 "형성"됐다는 것이지, 그것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아니다. 정병준은 전쟁의 "기원"이란 개념을 거부했고, 발발할 수 있는 배경이 "형성"할 수 는 있다고 봤다. 전쟁의 발발 자체는 분명하게 김일성과 스탈린의 탓으로 보고 있으며 그러 책에서 아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다만 그 전쟁이 가능한 배경형성이 좌우남북미소 대립에서 형성됐다는 것이지, 이게 곧 전쟁의 발발니란 것이 아니다. 책에선 이것을 "빅뱅"이라 비유한다.<ref>정병준.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파주: 돌베게, 2006.</ref> 정병준이 말하는 바는 한국전쟁은 내부적요인과 외부적요인이 복합적으로 결합하여 발생한 것이라 본다. 정병준은 한국전쟁은 38선의 충돌의 연장이며, 이 38선의 충돌과정에서 북한이 병력과 무장을 강화하고 핵심적인 전쟁 계획과 전쟁관을 수립하였다. 정병준은 개전에서 스탈린의 역할을 강조하는 1990년대 이래 신전통주의적 입장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상호 간에 적대적이었던 남북한 간의 내전적 충동 상황을 '''중시'''하는 입장을 복합적으로 견지하고 있다.<ref>김태우, "한국전쟁 연구 동향의 변화와 과제, 1950-2015", 한국사학사학보, 제32권, 2015, 330</ref> 정병준의 입장은 복합적인 요인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 한국전쟁의 기원이 38선의 충돌로 인해 '''기인'''했다고 보는 입장이고, 이러한 입장에서 '''기원'''이라는 표현을 서술한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국외적 요인에 대한 영향도 고려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의견 === 앞서 말했듯이 한국 학계나 미국 학계나 중론이 없는 상황이지만 국내에서는 거의 중론으로 여겨지는 것이 있다. 바로 '''김일성 주도 스탈린 지원설'''이다. 먼저 북한, 김일성은 전쟁을 통해 통일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무력통일을 위해서는 잘 훈련된 병력, 뛰어난 무기, 그리고 후원자와 군비지원이 필수적 요건이었으나 북한이 자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북한은 현대적 무기생산이 불가능한데다 사단급 이상의 작전계획 수립과 전투수행 경험도 전무한 상태였다. 소련군이 남겨놓은 무기와 군사고문단의 지원이 있었지만 한반도를 통일하기엔 불충분한 상태였다.<ref name=imhkoreanwar1-18>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1권 18편 [http://www.imhc.mil.kr/user/imhc/download/war625/1K18.pdf]</ref> 이때 중화인민공화국(이하 중공)은 내전 중이라 어찌될지 모르는 상황이기에 김일성은 스탈린의 동의와 원조가 절실히 필요했다. 1949년 3월 소련을 방문한 김일성과 회담을 가진 스탈린은 남한의 군사력과 주한미군의 현황, 북한의 전투능력과 경제에 대한 질문을 던졌으며 다방면의 지원을 원하는 김일성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남침에 대한 승낙은 허가하지 않았다. 당시 중국 내전의 결말이 불투명했고 얄타조약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으며 미국의 개입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전쟁을 일으킬 환경이 유리하게 전개되지 않았으며 북한 단독으로 남한을 압도하리라 판단하지 않았다.<ref name=imhkoreanwar1-18></ref> 즉 시기상조라고 생각한 것이지 절대 야욕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다.<ref name=imhkoreanwar1-19>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1권 19편 [http://www.imhc.mil.kr/user/imhc/download/war625/1K19.pdf]</ref> 시간이 흘러 1949년 8월 소련은 핵개발에 성공하였고, 그해 9월 종공이 국공내전에 승리하였다. 거기에 북한의 전쟁준비가 어느 정도 갖춰졌다고 판단한 스탈린은 1950년 1월 김일성과 만나 남침계획을 구체화했다. 소련은 중국에서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새로운 중소동맹을 체결한 상태였기에 중국을 대신할 새로운 전략지역의 획득이 필요했다. 3월에 다시 만난 <s>인간백정 두 마리</s> 두 지도자는 북한의 남침계획에 동의하였으나 스탈린은 최종결정을 <s>또 다른 인간백정</s> 마오쩌둥에게 받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5월 중국을 방문한 김일성은 마오쩌둥을 설득해 동의를 얻어내었으나 중국으로선 타이완을 '해방'하기도 전에 남의 전쟁을 돕는다는 것이 내키지많은 않았다. 그래도 전쟁을 결정한 이상 미군이 참전하더라도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하게 되었다.<ref name=imhkoreanwar1-18></ref> 중소동맹은 여러 정치적 이유를 띠고 있었지만 일본의 재침략 또는 미일 양국의 직접 또는 간접적인 침략의 대비와 전세계 공산화라는 공통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만큼<ref name=imhkoreanwar1-19></ref> 민주국가의 최전방이던 대한민국이란 눈엣가시를 제거하기로 마음먹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스탈린은 신중하고 우유부단하기 까지 하여 귀가 얇아 김일성에게 휘둘리거나 김일성의 생떼에 질려서 넘어간 인물이 되나 대단히 유능한 백수 앞을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지략가요 전략가라고 할 수 있다. <s>그리고 중국이랑 북한이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제발 휴전하게 해주세요 라고 징징 거려도 죽을때까지 안 된다고 한다. 일타 쓰리피! 그리고 그들의 공공의 적 일본은 한국전 때문에 되려 살아난다. 지못미.</s> ===한국전쟁 연구의 배경과 역사=== ====한국전쟁 원인 연구의 선도, 미국==== 미국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에 관심이 높은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한국전쟁의 원인에 따라 냉전의 책임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냉전의 책임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변화하였다. 1950년대의 경우 이념의 대립이 정말 한국저리가라 할정도로 하드코어 했다. 괜히 '''메카시즘'''이라는 말이 등장한게 아니다. 그래서 당시의 학자 또는 한국전쟁 관련 서적에서는 90%가 '''소련탓'''을 한다.<ref>예외적으로 스톤이 있는데 스톤은 미국기자였다.</ref> 그래서 이 시기의 학자들을 통틀어서 전통주의자 들이라고 한다. [[1960년대]] 미국은 그야말로 천지개벽했다.<ref>농담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인들의 선진화된 모습은 이런 대 변화를 경험했기에 등장한 것이다. 간단한 예로 1950년대에는 노예가 법적으로 존재했고, 흑인에 대한 인체실험도 국가적으로 행해졌었다.</ref> 이런 변화는 미국학계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냉전의 책임이 미국의 잘못된 대외정책의 결과'''라 보는 관점이다. 이 들을 수정주의자라고 부른다. 수정주의자들의 등장으로 인해 미국학계에서는 한국전쟁 논쟁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정주의자들은 자료의 부족<ref>한국전쟁 관련 미국 공문서가 풀리는 1970년대 까지는 미국정부나 소련정부에서 공개한 자료에만 의존해야 했으니 전통주의자들에 비해 자료가 매우 부족했다.</ref>으로 전통주의자들에게 얻어터지기만 했다. 뭐 병신같은 주장도 있어서기도 했지만<ref>예를 들자면, 굽타의 경우 일명 "해주진공설"을 제시하였고, 콜코 부부는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이게 다 맥아더와 이승만이 전쟁을 야기했기 때문이다]]라 주장했다. 당연히 전통주의자들은 이것을 신나게 털었다.</ref> 미국 학계는 수정주의자가 새로운 해석을 내놓으면 전통주의자가 까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는데, 198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전통주의자들이 우세하였다. 그러다가 브루스 커밍스가 등장하면서 대세가 기울어지는데, 왜냐면 여기서 커밍스는 전쟁의 원인은 미국 탓도 소련 탓도 아닌 한국 탓!!!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많은 학자들이 수정주의 노선을 타게되어, 전통주의자들의 위세가 꺽였지만 그래도 그냥 살짝 꺽인거다. 굳이 수치로 표현하자면 7:3이었던 것이 한 5:5가 되었던 것이다. 이 논쟁은 냉전이 끝났어도 이어지고 있고, 심지어 냉전이 끝난지 25년이 지난 지금(2015년)도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참고적으로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연구를 하려고 한다면 <S>영어의 압박이 있지만</s>미국 자료를 참고해야한다. 그것도 필수적으로 해야된다. <s>위키러가 한국어로 발간된 논문으로만 참고문헌 작성했다가 교수한테 신나게 털려서 그런거 아니다.</s> ====국내 한국전쟁 원인 연구에 대해서==== 국내의 한국전쟁 원인 연구는 매우 상당히 늦게 시작되었다. 이는 분단의 상황이라는 환경에 기인한 것이다. 그래서 1980년대 이전에 학계에서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연구는 없었다. 국내에서 한국전쟁 원인의 연구가 시작된 것은 [[1980년]]대 말 김학준<ref>김학준. 『한국전쟁: 원인, 과정, 휴전, 영향』. 서울: 전영사. 2010.</ref><ref>이 책은 1980년대 낸 논문을 수정 보완 증보판이다.</ref>이 미국에서 연구된 “한국전쟁 원인”을 제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한국사회는 1950년대 미국사회와 같이 이념의 대립이 하드코어해서 제대로 된 연구가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또 자료의 부족, 특히 북한의 문서고나 소련의 문서고가 봉쇄된 상태에서 도대체 왜 일어났는지 판단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데 1993년 옐친이 김영삼에게 한국전쟁 관련 구소련 문서를 넘겨준 것이다.<ref> 1993년 6월 25일 경향신문 1면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62500329101008&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3-06-25&officeId=00032&pageNo=1&printNo=14794&publishType=00010]</ref> 당연히 한국 학계에서는 이제서야 저놈의 빨갱이(소련)의 음모가 속 시원하게 들어나겠구만이라 장담했었다. 그러나 한국정부가 옐친이 준 자료를 공개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맺어<s>아 이 뭐병</s> 국내에서는 원자료를 보기 어려웠고, 오로지 국방부 발간 해석본을 참고해야하는 문제가 발생했다.<ref>국내에서 소련 공개 원문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그에 반해 우드로 윌슨센터에 가면 러시아 극비문서가 인터넷에 스캔본으로 잘 올라가져 있다.</ref><ref>이게 학문적 논문의 경우 원문에 의거 자신의 논리를 제기해야하기 때문에 해석본을 인용하는 경우 신뢰성이 떨어진다. 아 물론 이는 석박사 급 논문을 말한다.<s>그래서 한국전쟁 전문가가 적은 것일지도....영어, 중국어, 러시아어 최소 3개국어는 해야되니....</s></ref> 그러나 국내에서도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를 하는 등불같은 존재들이 계신다. 양영조의 『남북한 군사정책과 한국전쟁,1945-1950』(2007), 정병준의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2006), 박명림의 『한국 1950: 전쟁과 평화』(2002)이 대표적인 한국전쟁 원인을 연구한 학문서적이다. 그러나 한국 학계 내에서 한국전쟁 원인을 다루는 학자가 부족하여 자료나 신뢰성이 살짝 떨어진다. 예를 들어 본 "한국전쟁"에 대한 글도 수많은 위키러들 토론하면서 높은 수준으로 격상되었다. 토론을 하다보면 부족한 부분이 있는데 이를 상대편이 시정하는 경우도 있고, 그러다보니 글의 수준이 점차 성장하는 것이다.<s>이러다가 논문쓸 거 같다.</s> ====한국전쟁의 원인 연구에 대한 평가==== 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한 분석은 이념과 신념 그리고 생각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예를 들어보자면 '''스탈린이 김일성의 전쟁요구를 49번이나 거부하였고, 전쟁 승인 때 마오쩌둥의 의견을 들었다는 사실이다.'''<ref>참고로 이것만 있지 회담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ref> 전통주의자는 이를 소련이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김일성이 눈치없이 와서 한다고 하니 반려시킨 것이고, 이후 기회를 포착하자 김일성을 불러 전쟁을 승인하고 중국조차 끌어들인 것이라 보았다.<ref>대표적으로 김영호가 있다.</ref> 수정주의자는 이를 소련은 전쟁의 의도가 없었는데 김일성이 땡깡 부려서 전쟁을 승인해 준 것이라 보았다.<ref>대표적으로 웨더스비가 있다.</reF> 둘 중 누가 맞는지는 모르겠다. 왜냐 기록이 없다. 그냥 김일성이 왔는데 거부했다. 이런 정도이지 무슨 회담의 내용이 없다. 특히 스탈린과 마오쩌둥 간의 회담 내용은 공개되지도 않았다. 그래서 스탈린이 처음에는 생각이 없다가 그래 한 번 해볼까? 이거일 수도 있고(전통주의 의견), 아니면 정말로 김일성이 땡깡부려서 스탈린이 귀찮아서 아 그래 전쟁 해!!! 라 한 거일 수도 있다. (수정주의 의견) '''결국 한국전쟁의 원인은 해석의 문제이고, 누가 정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 요약: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각주}} · {|class="wikitable" · |- · rowspan=""| · colspan=""| · |} {{lang|}} · {{llang||}} · {{인용문|}} · {{인용문2|}} · {{유튜브|}} · {{다음팟|}} · {{니코|}} · {{토막글}} {{삭제|}} · {{특정판삭제|}}(이유를 적지 않을 경우 기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드시 이유를 적어주세요.) {{#expr:}} · {{#if:}} · {{#ifeq:}} · {{#iferror:}} · {{#ifexist:}} · {{#switch:}} · {{#time:}} · {{#timel:}} · {{#titleparts:}} __NOTOC__ · __FORCETOC__ · __TOC__ · {{PAGENAME}} · {{SITENAME}} · {{localurl:}} · {{fullurl:}} · {{ns:}} –(대시) ‘’(작은따옴표) “”(큰따옴표) ·(가운뎃점) …(말줄임표) ‽(물음느낌표) 〈〉(홑화살괄호) 《》(겹화살괄호) ± − × ÷ ≈ ≠ ∓ ≤ ≥ ∞ ¬ ¹ ² ³ ⁿ ¼ ½ ¾ § € £ ₩ ¥ ¢ † ‡ • ← → ↔ ‰ °C µ(마이크로) Å °(도) ′(분) ″(초) Α α Β β Γ γ Δ δ Ε ε Ζ ζ Η η Θ θ Ι ι Κ κ Λ λ Μ μ(뮤) Ν ν Ξ ξ Ο ο Π π Ρ ρ Σ σ ς Τ τ Υ υ Φ φ Χ χ Ψ ψ Ω ω · Ά ά Έ έ Ή ή Ί ί Ό ό Ύ ύ Ώ ώ · Ϊ ϊ Ϋ ϋ · ΐ ΰ Æ æ Đ(D with stroke) đ Ð(eth) ð ı Ł ł Ø ø Œ œ ß Þ þ · Á á Ć ć É é Í í Ĺ ĺ Ḿ ḿ Ń ń Ó ó Ŕ ŕ Ś ś Ú ú Ý ý Ź ź · À à È è Ì ì Ǹ ǹ Ò ò Ù ù · İ Ż ż ·  â Ĉ ĉ Ê ê Ĝ ĝ Ĥ ĥ Î î Ĵ ĵ Ô ô Ŝ ŝ Û û · Ä ä Ë ë Ï ï Ö ö Ü ü Ÿ ÿ · ǘ ǜ ǚ ǖ · caron/háček: Ǎ ǎ Č č Ď ď Ě ě Ǐ ǐ Ľ ľ Ň ň Ǒ ǒ Ř ř Š š Ť ť Ǔ ǔ Ž ž · breve: Ă ă Ğ ğ Ŏ ŏ Ŭ ŭ · Ā ā Ē ē Ī ī Ō ō Ū ū · à ã Ñ ñ Õ õ · Å å Ů ů · Ą ą Ę ę · Ç ç Ş ş Ţ ţ · Ő ő Ű ű · Ș ș Ț ț 이 문서는 다음의 숨은 분류 1개에 속해 있습니다: 분류:유튜브 영상이 포함된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