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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 오히려 시위하는 학생들을 비꼬았고 한 쪽은 박수를 치며 학생들을 호응했다는 것이다. 소수 시민들이 학생들의 시위에 동참하기는 하였지만 이때까지는 예전의 시위처럼 이 또한 그냥 지나가는 정도로 생각했다고 한다. 김한중씨는 그때까지만 해도 광주에서 엄청난 일이 발생하리란 생각은 꿈에도 못하고 적당히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ref>[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1990a 1041: 309]</ref> 시위진압이 불가능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될 정도로 학생 시위대들은 빠르게 해산됐고 그 와중에 유동 삼거리 (현재는 4거리) 쪽에 1개 중대 가량의 공수부대 병력이 시민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들이 잠시 후 살상작전을 벌이게 될 전위병력이었는데 현장에 있던 광주시민들은 그러나 사정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이제 시위진압을 위해 군이 직접 나서려는가보다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한다.<ref>[(재향군인회 257~258쪽]</ref> 오후 4시 정각, 신군부는 충정작전을 실행하였고 1.5톤급 탑차량 위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 거리에 나와 있는 시민 여러분, 빨리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빨리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 가 울려나왔다. 그리고 방송이 있은 1분이 지났을 까 말까 하는 순간 "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 전원 체포하라 " 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제는 시위대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지켜보고 있거나 혹은 거리에 나와 있는 모든 광주시민들을 타격하고 체포하라는 것이었다. 군인들은 어느새 진압봉으로 무차별 살상작전에 나섰고 시위하는 학생뿐만 아니라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보이기만 하면 진압봉으로 두들 겨 팼다. 붙잡힌 사람마다 피투성이었고 시민들은 우선 급한 대로 인근 점포와 주택할 것 없이 우르르 피신하기에 바빴다고 한다. 공수부대는 심지어는 공항으로 가고 있는 신혼부부까지 타격하였다. 신랑은 아이쿠 눈이야 하고 소리를 지르며 눈을 붙잡고 땅바닥으로 뒹글고 얼마나 맞고 채였는지 눈알이 빠져버렸다고 아우성이었다고 한다. 시늉을 하며 아파 죽겠다고 소리소리를 질렀고 신부도 군홧발로 채였는지 치마저고리가 갈기갈기 찢겼다고 한다. 신부는 자신의 몰골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신랑을 붙잡고 엉엉 울며 사람 살려를 외치었고 그런데도 군인들은 계속 신부를 걷어차며 빨리 꺼져라는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불과 수 십분 또는 수 시간 전 웨딩마치 속에 행복한 내일을 수놓으면 혼례식을 올렸을 신혼부부 온 세상이 모두 자기들 것인 양 행복의 웃음꽃을 피웠을 이들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공수부대에 의해 철처하게 파멸되고 망가진 것이다.<ref>[김영택 『실록 518 광주민중항쟁』37쪽]</ref> 11대 군용트럭의 대열 맨 마지막 차량 위에서는 22,23세 가량의 처녀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수모를 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수모라는 표현도 적절치 않을지도 모른다. 왜냐 인간으로서 특히 여자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횡액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약간 적갈색 빛갈을 띤 머리를 기다랗게 내려뜨린 아리따운 아가씨 그의 하얀색 투피스 스타일의 윗옷은 피투성이가 된 데다 갈기갈기 찢겨진 채 옷을 입었다기 보다는 젖가슴이 보일 정도로 걸쳐져 있었고 아랫도리는 완전히 벗겨진 채였다. 그 아가씨는 얼굴을 가린 채 울고 있었고 그 아가씨를 공수부대원들은 차 위에 올려 악을 쓰고 킬킬거리며 비웃고 심지어는 좋다며 성희롱까지 하는 공수부대원까지 있었다.<ref>[김영택 『실록 518 광주민중항쟁』39~40쪽]</ref> 동아일보의 김충근 기자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광주항쟁을 취재하면서 내 자신이 기자로서 갖추어야 할 표현력의 부족을 얼마나 한탄했는지 모른다. 글이나 말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 없는 상황이 있다는 사실도 그때 뼈저리게 체험했다. 기자로서는 이 같은 행위를 적절히 표현할 단어를 찾을 수 없었다. 만행,폭거,무차별 공격등의 단어는 너무 밋밋해 도저히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떠올린 단어는 '인간사냥'이었다. (이 용어는 계엄사 언론검열로 신문에 나오지 않았다) 또 젊은 여자, 그것도 옷맵시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고 예쁘장한 여자일수록 폭력은 더 심했고 옷을 찢어발긴다든지 가격하는 신체 부위가 여체의 특정 부위들에 집중되었을 때 그것은 어떻게 표현해야 되는가 ? 백주 겁탈, 폭력 난행, 성도착증 무력 진압등의 표현등이 얼핏 떠올랐으나 그것 역시 광주상황을 전하기엔 적절치 못했다.<ref>[김충근 금남로 아리랑, 5·18 특파원 리포트, 한국기자협회 외 1997, 212-4]</ref> New York Times의 Henry Scott Stokes 서울특파원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그때의 광경은 영국인인 내게는 [[1415년]] 어진코트에서 있었던 육박전을 연상하게 했다. 물론 당시의 전투는 프랑스 땅에서 헨리 5세 군대와 막강한 프랑스 군대가 벌인 전투라 역사 내지는 정치 면에서 전혀 비슷한 점이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육군 병사들이 착검한 총을 가지고 근거리에서 백병전을 벌이며 같은 인간들을 도륙하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영국 역사 500년을 더듬어 볼 수밖에 없었다.”<ref>[김충근 금남로 아리랑, 5·18 특파원 리포트, 한국기자협회 외 1997, 35]</ref> 요약: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각주}} · {|class="wikitable" · |- · rowspan=""| · colspan=""| · |} {{lang|}} · {{llang||}} · {{인용문|}} · {{인용문2|}} · {{유튜브|}} · {{다음팟|}} · {{니코|}} · {{토막글}} {{삭제|}} · {{특정판삭제|}}(이유를 적지 않을 경우 기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드시 이유를 적어주세요.) {{#expr:}} · {{#if:}} · {{#ifeq:}} · {{#iferror:}} · {{#ifexist:}} · {{#switch:}} · {{#time:}} · {{#timel:}} · {{#titleparts:}} __NOTOC__ · __FORCETOC__ · __TOC__ · {{PAGENAME}} · {{SITENAME}} · {{localurl:}} · {{fullurl:}} · {{ns:}} –(대시) ‘’(작은따옴표) “”(큰따옴표) ·(가운뎃점) …(말줄임표) ‽(물음느낌표) 〈〉(홑화살괄호) 《》(겹화살괄호) ± − × ÷ ≈ ≠ ∓ ≤ ≥ ∞ ¬ ¹ ² ³ ⁿ ¼ ½ ¾ § € £ ₩ ¥ ¢ † ‡ • ← → ↔ ‰ °C µ(마이크로) Å °(도) ′(분) ″(초) Α α Β β Γ γ Δ δ Ε ε Ζ ζ Η η Θ θ Ι ι Κ κ Λ λ Μ μ(뮤) Ν ν Ξ ξ Ο ο Π π Ρ ρ Σ σ ς Τ τ Υ υ Φ φ Χ χ Ψ ψ Ω ω · Ά ά Έ έ Ή ή Ί ί Ό ό Ύ ύ Ώ ώ · Ϊ ϊ Ϋ ϋ · ΐ ΰ Æ æ Đ(D with stroke) đ Ð(eth) ð ı Ł ł Ø ø Œ œ ß Þ þ · Á á Ć ć É é Í í Ĺ ĺ Ḿ ḿ Ń ń Ó ó Ŕ ŕ Ś ś Ú ú Ý ý Ź ź · À à È è Ì ì Ǹ ǹ Ò ò Ù ù · İ Ż ż ·  â Ĉ ĉ Ê ê Ĝ ĝ Ĥ ĥ Î î Ĵ ĵ Ô ô Ŝ ŝ Û û · Ä ä Ë ë Ï ï Ö ö Ü ü Ÿ ÿ · ǘ ǜ ǚ ǖ · caron/háček: Ǎ ǎ Č č Ď ď Ě ě Ǐ ǐ Ľ ľ Ň ň Ǒ ǒ Ř ř Š š Ť ť Ǔ ǔ Ž ž · breve: Ă ă Ğ ğ Ŏ ŏ Ŭ ŭ · Ā ā Ē ē Ī ī Ō ō Ū ū · à ã Ñ ñ Õ õ · Å å Ů ů · Ą ą Ę ę · Ç ç Ş ş Ţ ţ · Ő ő Ű ű · Ș ș Ț 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