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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4일]]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서리겸임은 야권인사들과 공화당까지 초긴장시켰고 정보부장과 보안사령관직을 현역장성으로 겸임발령한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뉴욕타임즈]]는 전장군이 2개의 정보기관을 동시에 관장함으로써 정치체제와 군부를 완전 장악한 최고실력자의 한 사람이 됐으며 그의 지위가 크게 강화되었다고 보도했다. 일본의 [[아사히 신문]]은 외신면 머리기사로 전장군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군부내의 완전한 실권을 잡은 것이라고 논평했고, [[요미우리 신문]]은 계엄행정을 뒤에서 지원해온 전사령관이 표면에 등장한 것은 최대통령을 뒷받침하는 제1인자로서 그가 어떤 진로를 선택할지 모른다고 보도했다. [[니혼 게이자이 신문]]은 한국정부 내부에 있어서 힘 관계의 변화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것이라고 보도했고 [[교도통신]]은 중요정책 결정과정에 현역군인이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보도했다.<ref>[1987년 12월 15일 중앙일보 실록]</ref> [[1980년]] [[4월 25일]]자 중앙일보 보도에 의하면 전두환의 겸임발령으로 국민들이 쇼크를 먹었다고 한다.<ref>[http://pdf.joins.com/article/pdf_article_prv.asp?id=DY01198004250004]</ref> 5월 초순 전두환 지시로 보안사 5인방은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비상기구 설치를 주요골자로 하는 시국수습방안이라는 정권찬탈 계획서를 마련하였고 시국수습방안을 이처럼 세 가지로 결정한 이유는 첫 번째 당시 군부 실세였던 전두환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끊이지 않아 지역계엄은 물계엄 또는 종이호랑이로 비하되는 분위기여서 보안사 참모들은 지역계엄만으로는 군이 전면에 나서 정국을 장악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봤으며 이에 따라 계엄해제와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와 저항을 강력히 제압하여 군부가 정국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그 선행조치로서 지역계엄보다 한층 강화된 비상계엄의 전국확대가 필수 불가결하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또한 최규하 대통령은 과도정부적 성격을 띠고 있어 내각이 소극적 역할만 수행하여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해 신군부가 국무총리와 국방부장관을 배제한 채 계엄사령관을 통해 대통령에게 직보할 수 있는 상황에서 내각을 조종, 통제하고 강력히 독려할 수 있는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방안이 자연스럽게 제기됐다고 한다.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가보위비상기구를 설치하여 이를 통해 내각을 조종 통제하는 기능을 군부가 수행하는 과정에서 헌법상 계엄해제 요구권을 가지고 있는 국회가 계엄해제를 요구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이를 미연에 방지하고 신군부에 의한 정국장악을 담보하기 위하여 국회 해산 및 주요 정치인 연행 등 조치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하여 이런 다각적 고려 하에 비상계엄 전국확대 그리고 국회해산 그리고 국가보위비상기구 설치라는 시국수습방안이 만장일치로 작성됐다고 권정달은 진술하였고 전두환은 12·12 5·18 5차 공판 때 보안사 정보처장과 대공처장에 지시하여 시국수습방안을 실행토록 지시하였다고 인정했다. 신현확 국무총리는 비상계엄 전국확대는 내각의 실패 실각을 뜻하는 것이라 무척이나 마음이 비통했다고 하였고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당시 국무회의 분위기는 극히 침울했다고 말하였다. 당시 국민들은 신군부의 핵심이었던 전두환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시국수습방안이 실행 될 경우 국민의 저항과 반발이 격화될 것은 뻔하여 따라서 전국계엄 하에서 계엄군을 이용해 국민들의 반발과 저항을 초동단계부터 강력히 제압해야 했다고 권정달은 말하였다. [[1979년#10월|1979년 10월]] 부마항쟁을 진압한 뒤 보안사에서 작성한 작전 결과를 평가하는 '부마지역 학생소요사태 교훈' 에 의하면 소요사태 진압작전에 대한 평가 과정에서 시위의 대규모 확산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초동단계부터 공수부대 등을 투입해 강력진압을 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써져 있고 이 교훈이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이후 발생 예상되는 시위 진압작전의 기본방침 '공수부대에 의한 초기 강경진압'으로 설정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이 보고서에는 '초동단계에 신속 진압. 군이 진압을 위해 투입되면 인명을 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과감하고 무자비할 정도로 타격 데모대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함으로써 군대만 보면 겁이 나서 데모의 의지를 상실토록 위력을 보여야 함. 군이 출동하면 최강의 위엄과 위력을 과시하여 위압감을 주어야 함'이라 적혀 있다.<ref>[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ref>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판단이었다. 공수부대의 강경진압은 비상계엄 이후 있던 [[5월 18일]] 광주지역 전남대학생 200명의 소규모 학생시위를 결국은 광주시민 전체가 아우르는 대규모 저항으로 만들었다. 당시 작성된 701보안부대, 호남출신 장교 선무활동 귀대후 언동사항<ref>[1980. 5. 24), 383-1980-090, 177~181]</ref>에 의하면 군인들의 데모 진압이 너무 가혹하여 주민들의 증오감이 사태를 악화시켰다고 써져 있다. 요약: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각주}} · {|class="wikitable" · |- · rowspan=""| · colspan=""| · |} {{lang|}} · {{llang||}} · {{인용문|}} · {{인용문2|}} · {{유튜브|}} · {{다음팟|}} · {{니코|}} · {{토막글}} {{삭제|}} · {{특정판삭제|}}(이유를 적지 않을 경우 기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드시 이유를 적어주세요.) {{#expr:}} · {{#if:}} · {{#ifeq:}} · {{#iferror:}} · {{#ifexist:}} · {{#switch:}} · {{#time:}} · {{#timel:}} · {{#titleparts:}} __NOTOC__ · __FORCETOC__ · __TOC__ · {{PAGENAME}} · {{SITENAME}} · {{localurl:}} · {{fullurl:}} · {{ns:}} –(대시) ‘’(작은따옴표) “”(큰따옴표) ·(가운뎃점) …(말줄임표) ‽(물음느낌표) 〈〉(홑화살괄호) 《》(겹화살괄호) ± − × ÷ ≈ ≠ ∓ ≤ ≥ ∞ ¬ ¹ ² ³ ⁿ ¼ ½ ¾ § € £ ₩ ¥ ¢ † ‡ • ← → ↔ ‰ °C µ(마이크로) Å °(도) ′(분) ″(초) Α α Β β Γ γ Δ δ Ε ε Ζ ζ Η η Θ θ Ι ι Κ κ Λ λ Μ μ(뮤) Ν ν Ξ ξ Ο ο Π π Ρ ρ Σ σ ς Τ τ Υ υ Φ φ Χ χ Ψ ψ Ω ω · Ά ά Έ έ Ή ή Ί ί Ό ό Ύ ύ Ώ ώ · Ϊ ϊ Ϋ ϋ · ΐ ΰ Æ æ Đ(D with stroke) đ Ð(eth) ð ı Ł ł Ø ø Œ œ ß Þ þ · Á á Ć ć É é Í í Ĺ ĺ Ḿ ḿ Ń ń Ó ó Ŕ ŕ Ś ś Ú ú Ý ý Ź ź · À à È è Ì ì Ǹ ǹ Ò ò Ù ù · İ Ż ż ·  â Ĉ ĉ Ê ê Ĝ ĝ Ĥ ĥ Î î Ĵ ĵ Ô ô Ŝ ŝ Û û · Ä ä Ë ë Ï ï Ö ö Ü ü Ÿ ÿ · ǘ ǜ ǚ ǖ · caron/háček: Ǎ ǎ Č č Ď ď Ě ě Ǐ ǐ Ľ ľ Ň ň Ǒ ǒ Ř ř Š š Ť ť Ǔ ǔ Ž ž · breve: Ă ă Ğ ğ Ŏ ŏ Ŭ ŭ · Ā ā Ē ē Ī ī Ō ō Ū ū · à ã Ñ ñ Õ õ · Å å Ů ů · Ą ą Ę ę · Ç ç Ş ş Ţ ţ · Ő ő Ű ű · Ș ș Ț 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