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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던 버치 중위가 김규식에게 접근하여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해달라고 권유했다. 미군정은 한반도에서 자국의 이익에 큰 손상을 입지 않게 위해, 그리고 소련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중도파 인사를 끌여들어야 했다. 김규식은 처음에는 국내외 정국이 너무 복잡하여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다며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미군정의 권유가 집요한 데다 [[이승만]]까지 나서서 종용하자 결국 받아들이기로 했다. 1946년 10월 7일 우파 대표로서 좌파 대표로 나선 [[여운형]]과 함께 합작위원회를 결성하였다. 두 사람은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조국의 완전독립을 달성하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모스크바 삼상결정을 수긍하는 입장에서 미소공위 재개 촉구를 통한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을 이뤄내고", "토지개혁,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 처리, 입법기구 문제에 대한 기본방침"을 밝혔다. 미군정은 이 7원칙에 대하여 지지 성명을 발표하였으나, 좌파는 입법기구 설치 문제 등을 문제삼았고, 우파는 토지개혁 문제를 문제삼았다. 결국 7원칙은 이념 대립이 극렬하던 정국으로 인해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김규식은 1946년 12월 12일 개원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을 맡았다. 입법의원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 대의정치 기관이었지만, 군정법령 118호 제5조 '조선과도입법의원의 직무 및 권한'에서 입법의원에서 제정된 법령은 군정장관이 동의하여 합법적으로 서명날인하고 관보에 공포하는 때에 법률의 효력이 있다고 규정하였기에 큰 힘이 없었다. 정원은 90명이었는데, 그중 관선의원 45명은 좌우합작위원회에서 추천한 중도적 인사들이어서, 김규식의 영향력이 매우 컸다. 김규식은 이러한 입법의원을 정력적으로 이끌면 여러 법안을 제정했다. 한민당 계열이나 토착 지주세력, 독립촉성회 계열이 다수를 차지한 민선의원 45명이 토지개혁, 친일파 처벌 등을 강력히 반대하였기에, 입법의원은 파행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그밖에 미군정의 실정으로 인한 식량난을 해결해보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급기야 1947년 7월 19일, 좌우합작위원회의 좌측대표 여운형이 암살당했다. 여기에 미소공동위원회가 계속 결렬되고 9월 17일 미국이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포기하고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이관하면서, 좌우합작위원회는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결국 좌우합작위원회는 1947년 12월 6일 전체회의에 의해 발전적 해체를 결의하였고, 12월 15일 해체를 선언했다. 이후 14개 정당과 5개 단체의 대표 및 개인으로 이뤄진 종도파의 결집 단체인 민족자주연맹이 결성되었다. 김규식은 이 연맹의 위원장을 맡았으나, 독자적인 대중조직이 없어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오랜 세월 독립운동에 투신하였고 합리적이고 온건한 노선을 추구해 명망높았던 그였으나, 지지기반을 확고히 다지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자신이 신봉하는 이념과 주장의 정당성을 과신한 나머지 대중조직의 필요성을 묵과했던 것으로 보이며, 정당을 조직하여 정쟁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더러운 짓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수도 있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는 한국총선거안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설치안, 정부 수립 후 미소 양군 철군안을 가결하였다. 이후 1948년 1월 23일 소련 측이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38선 이북 입국을 거절하자, 2월 26일 유엔 소총회가 유엔 한국위원단이 접근할 수 있는 지역, 즉 남한 지역에서 단독 선거를 치르기로 합의하였다. 김규식은 이보다 앞서 유엔 한국위원단과 접견한 뒤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인용문|북행이나 남한선거 감시 여부를 불문하고, 소의 주장이 한인문제로 남북한인이 모아 자율적으로 결정하게 하자 하였으니, 이에 근거하여 남북 요인회담을 알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회담을 남한에서 하는 것이 좋을 줄 안다.}} 이후 남한에서 단독 선거가 열리게 되자,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측근에게 민족자주연맹 위원장 자리를 물러나고 모든 정치적 행보를 중지하겠다는 뜻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러다 [[김구]]의 권유를 받아들여 북한과의 정치협상을 꾀했다. 그는 남북협상도 하지 않고 민족이 분열된다면 민족지도자로서 너무나 무책임한 짓이라 여겼다. 그러나 북행은 쉽게 결정되지 못했다. 그 자신이 북한 관계자들의 의도를 불신했고, 많은 이들이 북행을 만류하기도 했다. 민족자주연맹 내 여러 인사들은 가맹 단체들이 북행을 하는 것에대해서는 크게 반대하지 않았지만, 김규식이 직접 참가한다면 장차 정계에 미칠 악영향이 크다며 반대했다. 또한 미군정에서도 김규식을 장차 설립될 중앙정부의 중요 인물로 등장시키려 하였기에, 비치 중위 등을 보내 북행을 만류했다. 이에 김규식은 북한 측에 다음의 5원칙을 준수하라고 요구했다. {{인용문2|1) 여하한 형태의 독재정치라도 이를 배격하고 진정한 민주주의국가를 건립할 것 2) 독점자본주의 경제제도를 배격하고 사유재산제도를 승인하는 국가를 건립할 것 3) 전국적 총선거를 통하여 통일중앙정부를 수립할 것 4) 여하한 외국에도 군사기지를 제공치 말 것 5) 미소양군 조속철퇴에 관하여서는 先而 양군당국이 철퇴조건 및 기일 등을 협정하여 공포할 것을 주장할 것.}} 북한 측은 5원칙을 무조건 접수하겠다는 뜻을 보내왔고, 1948년 4월 18일 문화인 108인 연서 남북협상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김규식은 평양으로 가서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기로 결심했다. 1948년 4월 21일 북행길에 오른 김규식은 다음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인용문2|나와 김구 선생은 우리의 손으로써 조국을 통일시켜야 한다는 데서 남북협상을 제안하였던 것이다. 북조선 동지들은 우리의 제안을 접수하였다. 나는 오직 남북 정치지도자가 한 자리에 앉아서 성의껏 상토하는 것만이 통일단결의 기본공식이라는 신념에서 북행을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김구 등과 함께 38선을 넘은 김규식은 평양에 도착한 뒤 평양의 특별호텔에 숙소를 정했다. 평양의 특별호텔에 있을 때 [[김원봉]], [[허헌]], [[박헌영]] 등의 방문을 받았다. 그는 환영 피로연에서 "우리는 우리 장단에 맞추어 우리춤을 추자"며 자주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 남북연석회의가 북한 정부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일종의 '쇼'라는 걸 깨닫고, 4월 22일 회의에만 참석해 간단한 인사말을 하고 병을 이유로 숙소에 머무르며 한 번도 회의에 참가하지 않았다. 1948년 4월 23일 남북연석회의에서 '조선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와 '전조선동포에게 보내는 격문'이 결정되었고 4월 25일 평양방송이 결정서와 격문을 방송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북한 정부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었기에, 남한 측은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남북협상을 마치고 돌아온 김규식과 김구는 5월 6일 귀환보고서 성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인용문2|금반 우리 북행은 우리 민족의 단결을 의심하는 세계 인사에게는 물론이오, 조국의 통일을 갈망하는 다수 동포들에게까지 금차 행동으로서 많은 기대를 이루어 준 것이다. 그리고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며 민족의 생존을 위하여는 우리 민족도 세계의 어느 우수한 민족과 같이 주의와 당파를 초월하여서 단결할 수 있다는 것을 또 한 번 행동으로서 증명한 것이다.}} 그러나 5월 14일 북한이 남한으로의 송전을 중단했고 이에 남한도 즉시 북한 송전을 중단했다. 북한에서 남북협상 당시 끊지 않겠다고 약속한 송전을 끊어버림으로서 남북협상에 참여했던 김규식 등의 입지는 더욱 약화되었다. 하지만 그는 통일정권 수립을 이룰 수 있다는 기대를 버리지 않앗다. 1948년 7월 21일 민족자주연맹을 김구의 한국독립당과 통합하여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했다. 통일독립촉진회는 "1. 통일독립운동자의 총역량 결집을 기함 2. 민족문제의 자주적 해결을 꾀함 3. 민족강토의 일체 분열공작을 방지함" 등의 강령을 내세웠다. 그러나 남북분열은 끝내 실현되었고,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안두희]]에 의해 피살되면서 통일독립촉진회의 활동은 급격히 쇠락하였다. 그후 민족자주연맹 상임위원회를 주기적으로 열고, 국제정세와 남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토의한 뒤 담화문을 발표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정치활동을 벌이지 않았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다가오자, 초대 국회의원선거에는 불참 입장을 밝혔던 김규식은 이번에는 당선가능성이 높은 민족자주연맹계열 인사들에게 입후보를 권유했다. 그러나 선거가 치러진 지 한달도 못 되어 [[6.25 전쟁]]이 발발하였고, 김규식은 북한군 점령 하의 서울에서 체류했다. 그러다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한 뒤 서울로 진격하자, 북한군은 1950년 9월 18일 김규식을 납북했다. 당시 천식과 심장병에 시달렸던 그는 북으로의 강행군을 견딜 수 없었고, 결국 1950년 12월 10일 밤 만포진 근처 어느 민가에서 사망했다. 사후 평양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김규식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요약: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각주}} · {|class="wikitable" · |- · rowspan=""| · colspan=""| · |} {{lang|}} · {{llang||}} · {{인용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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