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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구데이]]에게 칸 자리를 물려주라는 칭기스 칸의 유언 역시 [[우구데이]]에게 정당성을 부여했다. ===통치 기구의 정비=== 톨루이가 금 정벌 도중에 사망한 이후, 우구데이의 몽골 제국은 세명의 유력자 위주로 운영되었다.(톨루이의 죽음의 정황은 후술하기로 한다.) 좌익의 테무게 옷치긴, 중앙의 우구데이, 우익의 차가타이였다. 옷치긴은 동방 3왕가를 장악하고 거란 및 한인 병력을 총괄하며 제국 동방의 실력자로 군림했다. 차가타이는 우구데이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로서 정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차가타이 울루스는 천산산맥부터 그 서부를 모두 다스리는 거대 울루스로 발돋움했다. 이들을 양쪽 날개로 하여 우구데이는 거리낌 없이 제국의 운영에 관한 새로운 정책들을 펼쳐나갈 수 있었다. 먼저 우구데이는 몽골 고원의 중심부에 새로운 수도, 카라코룸을 건설했다. 이 곳은 흉노 이래 수많은 유목 제국들의 중심지로 작용했던 교통의 요지였다. 우구데이는 카라코룸을 중심으로 하여 제국 전반으로 뻗어나가는 역참을 설치했으며, 그곳을 제국의 정치 중심지로 삼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카라코룸 안에는 몽골 제국의 운영에 필요한 재무, 행정 기구들이 자리했다. 이곳이 바로 몽골 제국의 서기국이었다. 서기국은 재무청을 겸했다. 위구르인, 호라즘인, 거란인 등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된 집행부는 카안의 명령을 문서화하고 제국 전역으로 전달하는 한편, 제국의 재무 업무를 담당했다. 몽골에서 활약한 거란인으로 널리 알려진 야율초재도 이 서기국에 근무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권력의 중추는 여전히 몽골인들에게 있었지만, 이들은 몽골 제국의 실제 운용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실무 담당자들이었다. 중앙과 함께 지방 통치 체제도 정비되었다. 우선 화북, 중앙아시아, 이란을 3대 속령으로 하여 총독부를 설치했다. 총독부의 구조는 중앙정부와 유사하여, 몽골 중앙에서 파견된 몽골인 군 사령부와 비몽골인들로 구성된 실무기관이 소속되어 있었다. 위구르인들과 거란인들이 실무관청의 수뇌부를 맡ㄷ았으며, 그 아래에 이란인 등으로 구성된 실무 관료들이 자리했다. 이를 통해 몽골 제국은 초보적인 지방 행정 및 조세 체계를 갖출 수 있었으며, 좀 더 항구적인 영역 지배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새로운 정복지였던 화북에 대한 분봉이 실시되었다. 기본적으로 유목민의 전통적인 3극 구조에 입각하여 동방(좌익)에는 칭기스칸의 동생들 및 누케르들의 영지가 자리했으며, 중앙에는 우구데이가, 톨루이가 및 중앙 울루스 소속의 여러 장수들의 영지가, 서방(우익)에는 주치 및 차가타이가의 영지가 자리했다. 한인 지방 무장세력 및 군벌들은 각 영지의 몽골인들 휘하에 편성되었다. 분봉이 정식으로 실시된 해는 [[1236년]]으로, 이때 탄생한 지배 구조는 쿠빌라이조까지 이어져 몽골의 화북 지배 정책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정복, 또 정복=== [[우구데이]] 카안의 치세는 몽골의 전쟁 수행 목적에 있어 중대한 변화의 시작점이었다. 기존의 징벌적 정벌에서 벗어나 정복 및 통치를 목적으로 하는 전쟁으로 서서히 전환되었던 것이다. [[우구데이]]는 "카안(Ka'an)"이라는 칭호를 취했다. 이는 기존의 군주 칭호와는 다른 것이었다. 기존의 칸들은 본명+칸 (카불 칸) 혹은 수식어+칸 (칭기스 칸) 과 같은 칭호를 사용했다. 그러나 [[우구데이]]는 단순히 "카안"으로 지칭되었다. "카안"이라는 칭호는, 몽골의 군주는 "칸"이 아닌 그 위에 서 있는, 유일성을 지닌 최고 군주라는 의미였다고 추측된다. 칭기스 칸은 끝까지 초원 유목민 세계의 군주로 남았으나, "카안"이라는 새로운 칭호는 몽골의 군주가 스스로를 유목민과 정주민 모두를 포괄하는 세계의 최고 군주로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ref>김호동, op. cit., pp.122 ~ 123.</ref> "칸"은 유목세계 내에서도 여럿이 존재할 수 있는 명칭이지만, '카안'은 몽골 군주만이 지상에서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 명칭이었던 것이다. 1229년에서 1231년 사이, [[우구데이]]는 아버지가 정벌한 지역 전반에 대해 몽골의 지배권을 재확인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불가르]] 등 서방 유목 집단들을 복속시키는 한편, <ref>Saunders. History of the Mongol conquests, {{ISBN|978-0812217667}}, p.81. </ref> 잘랄 웃딘의 호라즘 부흥 시도를 좌절시키고 페르시아 전역을 장악한다. 그리고 1231년, 우구데이는 드디어 제국의 역량을 집중시킨 정벌 사업을 시작한다. ====금 정벌의 완수==== {{참고|몽골의 금 정벌}} [[파일:Djengiz Khân et les envoyés chinois.jpeg|섬네일|300px|금나라 사자를 영접하는 칭기스 칸.]] [[우구데이]] 카안은 즉위 직후부터 매우 의욕적으로 전쟁 사업을 실시하였다. 그의 목표는 칭기스 칸이 끝내 정벌을 완수하지 못한 상대, [[금나라]]였다. 칭기스 칸 대의 금 정벌은 금의 존망을 위협했지만, [[1223년]] 무칼리의 죽음 이후 금나라와의 전쟁은 소강 상태였다. 금나라 정벌이 몽골인들에게 가지는 의미는 매우 컸다. 게다가 이 정벌은 새로운 카안의 첫 주요 정벌 사업이었다. 그런 만큼 몽골 제국 내의 최고 유력자 4명이 참여하여 정벌을 이끌었다. 제국의 서쪽을 대표하던 [[차가타이]]는 몽골리아 본토 수비를 담당하였으며, [[우구데이]]는 스스로 중군을 이끌었고, 몽골리아 본지에 세력을 가졌던 [[톨루이]]는 우익군, 동방의 유력자였던 테무게 옷치긴은 좌익군을 지휘했다.<ref>고마츠 히사오 외, op. cit., p. 204</ref> 초원 지대 전반에 대한 지배권이 재확립된 [[1231년]]부터 몽골인들은 본격적으로 금나라 정벌에 돌입한다. 우선 [[톨루이]]가 이끄는 우익군은 가장 먼저 남하하여 산서성의 경조(장안, 현재의 시안)을 함락시킨 후 우회, 송의 영토를 거쳐 개봉 남부에 다시 나타나 금의 허를 찌르기로 했다. 그 동안 테무게가 이끄는 좌익군은 중도에서 황하를 향해 서서히 남하했다. 황하 이북의 주민들은 공포에 질려 황하를 넘어 수도 개봉으로 피신했다. 이 난민들로 인해 개봉은 식량 부족, 사회 불안 등 심각한 인구 문제에 시달리게 된다.<ref>고마츠 히사오 외, op. cit., p. 205</ref> [[1232년]] 1월, 개봉 서남쪽 삼봉산(三峰山)에서 [[톨루이]]의 우익군과 금의 주력부대가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몽골군은 15만에 달하는 금나라 군대를 궤멸시켰다. 이로서 금의 운명은 사실상 결정되었다. 우구데이가 [[톨루이]]를 지원하기 위해 황하를 넘어 왔으나, 개봉이 무너지리라는 것은 이미 너무나도 확실했기에 [[우구데이]]와 [[톨루이]]는 귀환 길에 올랐다. 금 정벌군의 지휘권은 [[수부타이]]가 이어받았다. [[1232년]] 4월, 몽골군은 개봉을 완전히 포위했다. 결국 개봉은 1233년에 함락되었다. [[1232년]] 말 개봉에서 도주한 금 황실은 하남 안양으로 근거지를 옮겨 항전을 계속했다. 1233년에는 불화살 등을 이용한 기습으로 안양 북방까지 진출한 몽골군을 격퇴하기도 했다. 그러나 안양은 좁은 도시였고, 오랜 방어전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하남의 핵심 도시 채주 역시 군대도, 물자도, 방어 준비도 부족한 상태였다. 금 애종은 송나라에게 도움을 청한다. 금이 멸망하면 송이 그 다음 목표가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송은 오히려 몽골과 동맹을 맺어 금나라를 공격한다. 결국 [[1234년]] 1월, 금 황실은 채주(蔡州)에서 남송-몽골 연합군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한다. 이로서 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며, 화북 지방이 몽골의 지배권 하에 완전히 편입되었다. 한편 1232년 [[우구데이]]와 함께 몽골리아 본지로의 귀환 길에 올랐던 [[톨루이]]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몽골비사』에는 톨루이가 우구데이를 살리기 위하여 스스로의 목숨을 희생했다고 전한다. 귀환 중에 [[우구데이]]가 갑자기 병이 났는데, 무당들은 우구데이의 병이 중국의 물과 땅의 신의 저주 때문이라고 말했다. 중국인들을 살육하고, 그 땅을 짓밟은 데에 분노하여 대칸에게 저주를 내렸다는 것이었다. 무당들은 신에게 땅, 백성, 가축 등을 바치겠다고 했으나 우구데이의 병세는 오히려 점점 심해질 뿐이었다. 결국 가족 한 명의 목숨을 바치겠다고 약속한 후에야 우구데이의 병세가 호전되었다. 톨루이는 스스로 형 대신 죽겠다고 나섰고, 결국 저주받은 술을 들이키고 중국의 신에게 우구데이 대신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베이니<small>Ata-Malik Juvayni(1226~1283)</small>가 쓴 『세계정복자의 역사』<small>Trkh-i jahn-gush</small>에는 톨루이가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어느 쪽이든 쉽사리 납득되지 않는 죽음이다. 이에 대해 [[톨루이]]의 죽음이 몽골 제국의 다른 유력자들과의 갈등 때문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우구데이가 군주로서의 입지를 다져나가는 과정 중에 톨루이의 존재는 우구데이를 비롯한 그의 지지자들에게 매우 거추장스러웠을 것이라는 것이다.<ref>고마츠 히사오 외, op. cit., p. 205.</ref> 어찌 되었든 [[톨루이]]의 죽음은 [[우구데이]]의 입지를 더욱 강화해주었으며, 우구데이는 더욱 적극적으로 정벌 및 체제 정비 사업을 시행할 수 있었다. 카안 칭호를 취한 것도 이 시기였다. ====남송 원정의 실패==== [[1234년]] 금 정벌이 완료된 후, 몽골인들은 다시금 동쪽으로 진군한다. [[남송]]에 대한 정벌이 시작된 것이었다. [[1236년]]의 일이었다. [[우구데이]]의 셋째 아들 쿠추가 남송 원정군을 이끌었다. 그러나 [[1236년]] [[3월]] 쿠추가 급사하면서 몽골군의 지휘 체계가 무너졌고, 첫 [[남송]] 원정은 완전한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남송]]은 숨을 돌릴 기간을 벌 수 있었다. 몽골인들의 눈은 다시금 서쪽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페르시아 장악과 코카서스 정벌==== [[1231년]]부터 우구데이의 명령으로 잘랄 웃딘을 추적하고 호라즘 샤조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기 위한 군사작전이 실시되고 있었다. [[1231년]] 잘랄 웃딘이 사망한 후 몽골군은 페르시아 전역을 장악해나갔다. 페르시아 남쪽의 파르스와 케르만은 자발적으로 몽골에 복속했으며, 초르마간이 이끄는 몽골군이 페르시아 중, 북부 지역을 정복했다. 페르시아 정복이 완료되자 몽골군의 관심은 코카서스 지방으로 옮겨갔다. 당시 코카서스, 아르메니아, 그루지야 지방을 지배하던 세력은 그루지야 왕국이었다. [[1236년]], 초르마간 휘하의 몽골군은 그루지야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그루지야의 변경 수비를 담당하던 영주들은 대부분 몽골에 별다른 저항 없이 항복하거나 도주했다. 결국 그루지야 왕실은 그루지야 서부의 쿠타이시로 도주하였고, 동부에 남은 지도자들은 몽골에게 공물을 바치고 복속하기로 결정한다. 동부 그루지야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세력이 몽골에 복속한 것은 [[1238년]]의 일이었다. 몽골군은 산악 지형인 그루지야 서부까지 침공하지 않았다. 쿠타이시의 그루지야 왕실은 교황청의 도움을 얻고자 하였으나 교황청에서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아 좌절된다. [[1243년]] 이후 그루지야는 공식적으로 몽골의 속방임을 천명하고 카안을 군주로 섬기게 된다. [[1237년]]부터 몽골군은 그루지야 왕국의 영지를 넘어 코카서스 북부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코카서스 정벌은 [[1243년]] 무렵 마무리된다. ====유럽 원정==== 서방 원정은 [[주치 울루스]]의 영지로 예정되어있던 킵차크 초원을 정복하는 것을 1차적인 목표로 하고 진행되었다. 총사령관은 [[주치]]의 둘째 아들 [[바투]]가 맡았으며, [[수부타이]]가 그를 보좌했다. 칭기스 일족의 각 가문에서도 유력한 왕자들이 원정에 동참했다. 주치 가문에서는 [[바투]] 외에도 [[베르케]]가 참여했으며, 우구데이 가문에서는 뭉케, 구육 등이, 차가타이 가문에서는 차가타이의 둘째 아들 바이다르 등이 참여했다. 몽골 원정대는 먼저 킵차크 집단들을 복속시켜 군세를 크게 불렸다. 그 다음 목표는 볼가 강 유역의 불가르였다. 볼가 강 유역에 도달한 몽골의 병력은 2만 5천에서 3만 5천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1232년 무렵 이미 볼가 불가리아 남부를 장악했던 몽골군은 이번에는 불가르 영역의 북부를 향해 진군했다. 1236년, 바투가 이끄는 몽골군은 볼가 불가리아의 주요 도시들을 대부분 장악했으며, 대규모 학살과 약탈을 자행했다. 1237년까지 몽골은 불가르, 킵차크, 쿠만 (킵차크 초원의 유목 세력), 알란 등의 저항을 철저히 짓밟았다. [[파일:Sacking of Suzdal by Batu Khan.jpg|섬네일|200px|수즈달을 공격하는 바투 칸.]] 불가르에 이어 남러시아 초원의 여러 루시 공국들이 공격 대상이 되었다. 동유럽인들의 입장에서는 악몽의 시작이었다. 1237년, [[바투]]는 블라디미르 왕공 유리 2세에게 몽골에 스스로 복속하라고 명령하는 서신을 보낸다. 유리 2세가 한 달 간 답신을 보내지 않자 몽골인들은 군사 행동에 돌입한다. 오카 강 유역의 도시 랴잔을 공격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치열한 공방전 끝에 랴잔은 파괴된다. 놀란 유리 2세는 군대를 파견해 몽골군을 막으려 하였으나, 크게 패배하고 만다. 이후 몽골군은 콜롬나와 모스크바를 차례로 점령하여 불태웠다. 결국 [[1238년]] [[2월 8일]]에는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수도 블라디미르마저 점령되어 파괴된다. 왕공은 도주에 성공해 볼가강 이북에서 다시 군대를 일으켰으나, 1238년 3월 4일 다시 몽골군에게 격파당한다. 이로서 러시아 평원에서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던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세력은 완전히 꺾였으며, 몽골군은 타 루시 공국들을 하나하나 격파해나간다. 1240년, 키예프를 점령하면서 루시 정벌이 막을 내린다. 그리고 몽골군은 동유럽으로 들이닥쳤다. 몽골군은 두 갈래로 나뉘어 주력은 헝가리로 진군했으며, 일부는 폴란드로 향했다. 1241년 4월 9일, 차가타이가의 바이다르 등이 이끄는 폴란드 방면 몽골군은 현재의 발슈타트에서 독일기사단과 폴란드군의 연합군을 격파했다.<ref>다만 이 전투가 실존했는지 여부를 놓고 약간의 논란이 있다. 동시대 문헌에는 등장하지 않는 전투이기 때문이다.</ref> 이어서 1241년 4월 11일, 바투가 직접 이끄는 몽골 주력군은 사요 강변에서 헝가리 국왕 벨라 4세가 이끄는 헝가리군에 승리를 거두었다. 방어선이 무너진 헝가리는 몽골군에게 유린되었다. 폴란드와 헝가리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서유럽으로 향했다. 이들 동유럽 난민은 독일 등 서유럽 국가 주민들에게 몽골에 대한 공포를 심어주었다. 서유럽은 몽골의 칼끝 앞에 무력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그런데 몽골군은 서유럽에 들이닥치기 직전, 진군을 멈춘다. 1242년 3월, 우구데이 카안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고 철군 명령이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우구데이 휘하에서 안정적으로 팽창을 거듭하던 몽골 제국은 다시금 혼란의 세월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요약: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각주}} · {|class="wikitable" · |- · rowspan=""| · colspan=""| · |} {{lang|}} · {{llang||}} · {{인용문|}} · {{인용문2|}} · {{유튜브|}} · {{다음팟|}} · {{니코|}} · {{토막글}} {{삭제|}} · {{특정판삭제|}}(이유를 적지 않을 경우 기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드시 이유를 적어주세요.) {{#expr:}} · {{#if:}} · {{#ifeq:}} · {{#iferror:}} · {{#ifexist:}} · {{#switch:}} · {{#time:}} · {{#timel:}} · {{#titleparts:}} __NOTOC__ · __FORCETOC__ · __TOC__ · {{PAGENAME}} · {{SITENAME}} · {{localurl:}} · {{fullurl:}} · {{ns:}} –(대시) ‘’(작은따옴표) “”(큰따옴표) ·(가운뎃점) …(말줄임표) ‽(물음느낌표) 〈〉(홑화살괄호) 《》(겹화살괄호) ± − × ÷ ≈ ≠ ∓ ≤ ≥ ∞ ¬ ¹ ² ³ ⁿ ¼ ½ ¾ § € £ ₩ ¥ ¢ † ‡ • ← → ↔ ‰ °C µ(마이크로) Å °(도) ′(분) ″(초) Α α Β β Γ γ Δ δ Ε ε Ζ ζ Η η Θ θ Ι ι Κ κ Λ λ Μ μ(뮤) Ν ν Ξ ξ Ο ο Π π Ρ ρ Σ σ ς Τ τ Υ υ Φ φ Χ χ Ψ ψ Ω ω · Ά ά Έ έ Ή ή Ί ί Ό ό Ύ ύ Ώ ώ · Ϊ ϊ Ϋ ϋ · ΐ ΰ Æ æ Đ(D with stroke) đ Ð(eth) ð ı Ł ł Ø ø Œ œ ß Þ þ · Á á Ć ć É é Í í Ĺ ĺ Ḿ ḿ Ń ń Ó ó Ŕ ŕ Ś ś Ú ú Ý ý Ź ź · À à È è Ì ì Ǹ ǹ Ò ò Ù ù · İ Ż ż ·  â Ĉ ĉ Ê ê Ĝ ĝ Ĥ ĥ Î î Ĵ ĵ Ô ô Ŝ ŝ Û û · Ä ä Ë ë Ï ï Ö ö Ü ü Ÿ ÿ · ǘ ǜ ǚ ǖ · caron/háček: Ǎ ǎ Č č Ď ď Ě ě Ǐ ǐ Ľ ľ Ň ň Ǒ ǒ Ř ř Š š Ť ť Ǔ ǔ Ž ž · breve: Ă ă Ğ ğ Ŏ ŏ Ŭ ŭ · Ā ā Ē ē Ī ī Ō ō Ū ū · à ã Ñ ñ Õ õ · Å å Ů ů · Ą ą Ę ę · Ç ç Ş ş Ţ ţ · Ő ő Ű ű · Ș ș Ț 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