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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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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총독부 폭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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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전 과거 문서의 위키텍스트 (old_wikitext)
'==생애== 김익상의 성장 환경은 넉넉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조실부모 한 까닭이다. 모친은 김익상이 13살 때에 사망하였고, 부친 또한 김익상이 21세 때 殞命했기 때문이다. 특히 부친은 일본사람과 함께 목재 장사 를 하다가 그에게 속아서 재산을 탕진하였다.5) 아마도 그로 인해 일찍 사 망했는지도 모르겠다. 김익상이 어려서 사숙에서 한문을 공부하고 마포에 있던 三湖 普成小學校에 재학 중 집안이 어려워 학업을 마치지 못하였던 사실도 이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더욱이 삼호 보성소학교는 李容翊이 세운 보성학교 가운데 소학교로 당시 이용익의 손자인 李鍾浩가 운영하 던 민족학교이다.6) 여기에 김익상이 얼마간이나 다닌 것은 그의 민족의 식 형성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을 성 싶지만 자료는 발견할 수 없다. 어쨌든 가정 사정으로 학업을 중단한 뒤, 김익상은 철공소 견습공으로 취직하여 4호구책을 삼았다. 1919년경에는 서울 橋北洞에 있던 담배회사 인 廣盛煙草公司로 옮겨 일하게 되었다. 이 시기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열화같이 전개되고 있었지만, 그가 어떤 자세를 취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던 중 그의 생애에 일대 전기가 찾아왔다. 광성연초공사가 중국 奉 天에 지점을 열자 1921년 6월경 봉천지점의 기계감독으로 발령이 난 것 이다.7) 김익상은 매우 기뻤다. 어렸을 때부터 소원이 비행사가 되는 것이었는 데, 중국으로의 전보 발령은 그 같은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 다. 그래서 그는 비행기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葉煙草를 빼돌려 판 자금 으로 天津과 上海를 거쳐 비행학교가 있는 廣東으로 갔다.8) 하지만 당시 광동의 護法정부는 北伐에 치중하느라 비행학교 운영을 일시 중지하고 있었으므로 비행사의 꿈을 이루지 못하였다. =조선총독부 폭파='
편집 후 새 문서의 위키텍스트 (new_wikitext)
'==생애== 김익상은 1895년 6월 25일5) 서울 마포구 공덕동6)에서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큰 형은 일찍이 사망하고 金益相이 둘째, 막내는 金俊相이다. 김익상의 본명은 金鳳南7)이라고 알려졌다. 호는 秋山이다.8) 동학농민운 동, 그리고 청일전쟁이 일어난 다음 해인 1895년에, 즉 을미사변이 일어 난 하수상한 시절에 출생하였다. 당대 시대상이 그러했듯이 김익상은 고 단하고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김익상은 황포탄 의거로 港務局 경찰에 체포되어 처음 심문을 받을 때 자신은 평남 강서군에서 출생하고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 교육 사업에 종사9)한 바 있다고 한 진술하였다. 아마도 자신의 신상을 숨기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실이 국내에 보도되면서 그가 숭실중학교를 졸업했 다고 잘못 보도되면서 그의 출생 및 경력 사항이 잘못 알려지게 되었다. 김익상은 어린 시절 私塾에서 한문을 수학했으며 이후 마포 소재의 신 학교인 三湖普成小學校11)로 진학하였다. 그러나 2년간 수학하고 학업을 중단하였다 한다. 학교를 중퇴한 큰 이유는 집안의 몰락으로 학업을 계 속할 수 있는 경제적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김익상의 모친은 그의 나이 13세 때인 1907년에 사망했고 부친은 21세 때인 1915년에 사망하였다. 이 무렵 부친은 일본인과 목재장사를 하다가 일본인에게 속임을 당해 재산 을 탕진했다고 하며12) 가세가 빈곤해지자 그는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고 마포에 소재한 삼호보성소학교는 보성학교 계열의 소학교로, 이용익의 손자인 이종 호가 운영한 구한말 민족학교이다. 1908년 경, 학교 유지 경영이 어렵게 되자 이 학 교는 여러 유지실업가들이 연조한 자금으로 운영되었다. 이종호는 강제 병합 전인 1910년 4월 경 국내를 떠나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했으며 주로 함북세력과 함께 연 해주에서 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삼호보성소학교가 언제 설립되었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보성중학교와 마찬가지로 애국민족교육이 실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학 교는 다른 사립학교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병합 후에 조선총독부의 보통학교로 흡수 되었다. 김익상은 철공 일을 배우기 위해 고향 을 떠나 평양에서 철공 견습공이 되어 기술을 배웠고14) 철공 기술을 익 힌 그는 용산철도국의 기술자로 근무하기도 했고 경성 전기회사에서 전 기 관련 노동일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15) 부친이 일본인에게 속아서 재산을 탕진하게 되어 가세가 기울었다면 아마도 일본인에 대한 반감을 품고 성장했을 것이며, 성인이 된 후 일본 인 밑에서 차별과 압박을 받는 고용살이를 하면서 자연히 배일사상을 품 게 되었을 것이다.16) 上海 황포탄 의거를 일으켰을 당시 김익상은 자신 의 직업을 鐵工이라고 밝힌 바 있는데 소년시절 배우고 익힌 철공과 전 기기술이 생업을 이어가는 수단이 되었을 것이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영자신문인 󰡔Seoul Press󰡕 기자는 김익상이 용산에 서 태어나 그곳에서 결혼할 때까지 살았다고 조사하였다.17) 󰡔東亞日報󰡕 에서는 1918년경에 용산에서 이태원으로 이사했다고 한다.18) 그의 집이 용산이라고 한 것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龍山面과 西江面이 통합 해 龍江面19)이 되었기에 용강면 공덕리에서 이태원으로 이사를 해서 京 畿道 高陽郡 漢芝面 梨太院里 280번지에 동생 김준상과 조카가 살고 있었다. =조선총독부 폭파 의거(의열투쟁)= 김익상은 1921년 9월 9일에 김원봉으로부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서 입수한 폭탄 2개와 권총 2정을 건네받고,15) 즉시 조선총독부 폭파 의 거를 결행하기 위해 나섰다. 일제의 경계가 삼엄하여 김익상은 일본인으 로 변장하고16) 양복 속에 폭탄과 권총을 감추고 9월 10일 북경을 떠나 11 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때에도 그는 일경의 눈을 속이기 위해 아이를 데리고 가는 일본 여자와 이런 말 저런 말을 하면서 부부처럼 행동하는 기지를 발휘하여 기차 안에서 검문을 피했다. 또 폭탄과 권총을 몸에 지 니고 있어 여러 가지로 행동이 불편했지만, 남대문 역에서도 동행하던 일본 여자의 남편처럼 행동하면서 3살짜리 아이를 안고 무사히 나올 수 있었다.17) 서울에 도착한 뒤 김익상은 고양군 漢芝面 梨泰院에 살던 아우 金俊相 의 집을 찾아가 하루를 묵었다. 이날 밤 아우와 3살짜리 딸을 데리고 살 던 부인 송씨에게 “자기는 조선독립을 위하여 명일 총독부에 폭발탄을 던질 터이라”18)고 의거 계획을 알려주며 마음의 준비를 시켰다. 다음날 아침 그는 일본인 전기 수리공 차림으로 남산 倭城臺에 있던 조선총독부 청사로 갔다.김익상은 9월 12일 오전 10시 20분경 전기 수리를 위해 온 것처럼 행동 하며 대담하게 조선총독부 청사로 들어가 먼저 2층에 있는 秘書課에 폭 탄을 던지고, 이어 會計課 응접실에 폭탄을 던졌다. 비서과에 던진 폭탄 은 폭발하지 않았으나 회계과 응접실에 던진 폭탄은 일시에 굉음을 내며 폭발하자 여러 명의 일본 헌병들이 놀라 뛰어올라왔다. 김익상은 이들에 게 “2층으로 올라가면 위태하다”는 말을 남기고 유유히 조선총독부 청사 를 빠져 나왔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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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1,21 @@ ==생애== -김익상의 성장 환경은 넉넉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조실부모 한 까닭이다. 모친은 김익상이 13살 때에 사망하였고, 부친 또한 김익상이 21세 때 殞命했기 때문이다. 특히 부친은 일본사람과 함께 목재 장사 를 하다가 그에게 속아서 재산을 탕진하였다.5) 아마도 그로 인해 일찍 사 망했는지도 모르겠다. 김익상이 어려서 사숙에서 한문을 공부하고 마포에 있던 三湖 普成小學校에 재학 중 집안이 어려워 학업을 마치지 못하였던 사실도 이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더욱이 삼호 보성소학교는 李容翊이 세운 보성학교 가운데 소학교로 당시 이용익의 손자인 李鍾浩가 운영하 던 민족학교이다.6) 여기에 김익상이 얼마간이나 다닌 것은 그의 민족의 식 형성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을 성 싶지만 자료는 발견할 수 없다. -어쨌든 가정 사정으로 학업을 중단한 뒤, 김익상은 철공소 견습공으로 취직하여 4호구책을 삼았다. 1919년경에는 서울 橋北洞에 있던 담배회사 -인 廣盛煙草公司로 옮겨 일하게 되었다. 이 시기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열화같이 전개되고 있었지만, 그가 어떤 자세를 취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던 중 그의 생애에 일대 전기가 찾아왔다. 광성연초공사가 중국 奉 -天에 지점을 열자 1921년 6월경 봉천지점의 기계감독으로 발령이 난 것 이다.7) -김익상은 매우 기뻤다. 어렸을 때부터 소원이 비행사가 되는 것이었는 데, 중국으로의 전보 발령은 그 같은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 다. 그래서 그는 비행기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葉煙草를 빼돌려 판 자금 으로 天津과 上海를 거쳐 비행학교가 있는 廣東으로 갔다.8) 하지만 당시 광동의 護法정부는 北伐에 치중하느라 비행학교 운영을 일시 중지하고 있었으므로 비행사의 꿈을 이루지 못하였다. -=조선총독부 폭파= +김익상은 1895년 6월 25일5) 서울 마포구 공덕동6)에서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큰 형은 일찍이 사망하고 金益相이 둘째, 막내는 金俊相이다. 김익상의 본명은 金鳳南7)이라고 알려졌다. 호는 秋山이다.8) 동학농민운 동, 그리고 청일전쟁이 일어난 다음 해인 1895년에, 즉 을미사변이 일어 난 하수상한 시절에 출생하였다. 당대 시대상이 그러했듯이 김익상은 고 단하고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 +김익상은 황포탄 의거로 港務局 경찰에 체포되어 처음 심문을 받을 때 + +자신은 평남 강서군에서 출생하고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 교육 사업에 + +종사9)한 바 있다고 한 진술하였다. 아마도 자신의 신상을 숨기고자 했던 + +것으로 보인다. 이 사실이 국내에 보도되면서 그가 숭실중학교를 졸업했 + +다고 잘못 보도되면서 그의 출생 및 경력 사항이 잘못 알려지게 되었다. 김익상은 어린 시절 私塾에서 한문을 수학했으며 이후 마포 소재의 신 학교인 三湖普成小學校11)로 진학하였다. 그러나 2년간 수학하고 학업을 중단하였다 한다. 학교를 중퇴한 큰 이유는 집안의 몰락으로 학업을 계 속할 수 있는 경제적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김익상의 모친은 그의 나이 13세 때인 1907년에 사망했고 부친은 21세 때인 1915년에 사망하였다. 이 무렵 부친은 일본인과 목재장사를 하다가 일본인에게 속임을 당해 재산 을 탕진했다고 하며12) 가세가 빈곤해지자 그는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고 마포에 소재한 삼호보성소학교는 보성학교 계열의 소학교로, 이용익의 손자인 이종 호가 운영한 구한말 민족학교이다. 1908년 경, 학교 유지 경영이 어렵게 되자 이 학 교는 여러 유지실업가들이 연조한 자금으로 운영되었다. 이종호는 강제 병합 전인 1910년 4월 경 국내를 떠나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했으며 주로 함북세력과 함께 연 해주에서 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삼호보성소학교가 언제 설립되었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보성중학교와 마찬가지로 애국민족교육이 실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학 교는 다른 사립학교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병합 후에 조선총독부의 보통학교로 흡수 되었다. 김익상은 철공 일을 배우기 위해 고향 을 떠나 평양에서 철공 견습공이 되어 기술을 배웠고14) 철공 기술을 익 힌 그는 용산철도국의 기술자로 근무하기도 했고 경성 전기회사에서 전 기 관련 노동일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15) + +부친이 일본인에게 속아서 재산을 탕진하게 되어 가세가 기울었다면 아마도 일본인에 대한 반감을 품고 성장했을 것이며, 성인이 된 후 일본 인 밑에서 차별과 압박을 받는 고용살이를 하면서 자연히 배일사상을 품 게 되었을 것이다.16) 上海 황포탄 의거를 일으켰을 당시 김익상은 자신 의 직업을 鐵工이라고 밝힌 바 있는데 소년시절 배우고 익힌 철공과 전 기기술이 생업을 이어가는 수단이 되었을 것이다. + +조선총독부 기관지 영자신문인 󰡔Seoul Press󰡕 기자는 김익상이 용산에 서 태어나 그곳에서 결혼할 때까지 살았다고 조사하였다.17) 󰡔東亞日報󰡕 에서는 1918년경에 용산에서 이태원으로 이사했다고 한다.18) 그의 집이 용산이라고 한 것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龍山面과 西江面이 통합 해 龍江面19)이 되었기에 용강면 공덕리에서 이태원으로 이사를 해서 京 畿道 高陽郡 漢芝面 梨太院里 280번지에 동생 김준상과 조카가 살고 있었다. + +=조선총독부 폭파 의거(의열투쟁)= +김익상은 1921년 9월 9일에 김원봉으로부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서 입수한 폭탄 2개와 권총 2정을 건네받고,15) 즉시 조선총독부 폭파 의 거를 결행하기 위해 나섰다. 일제의 경계가 삼엄하여 김익상은 일본인으 로 변장하고16) 양복 속에 폭탄과 권총을 감추고 9월 10일 북경을 떠나 11 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때에도 그는 일경의 눈을 속이기 위해 아이를 데리고 가는 일본 여자와 이런 말 저런 말을 하면서 부부처럼 행동하는 기지를 발휘하여 기차 안에서 검문을 피했다. 또 폭탄과 권총을 몸에 지 니고 있어 여러 가지로 행동이 불편했지만, 남대문 역에서도 동행하던 일본 여자의 남편처럼 행동하면서 3살짜리 아이를 안고 무사히 나올 수 있었다.17) + +서울에 도착한 뒤 김익상은 고양군 漢芝面 梨泰院에 살던 아우 金俊相 의 집을 찾아가 하루를 묵었다. 이날 밤 아우와 3살짜리 딸을 데리고 살 던 부인 송씨에게 “자기는 조선독립을 위하여 명일 총독부에 폭발탄을 던질 터이라”18)고 의거 계획을 알려주며 마음의 준비를 시켰다. 다음날 아침 그는 일본인 전기 수리공 차림으로 남산 倭城臺에 있던 조선총독부 청사로 갔다.김익상은 9월 12일 오전 10시 20분경 전기 수리를 위해 온 것처럼 행동 하며 대담하게 조선총독부 청사로 들어가 먼저 2층에 있는 秘書課에 폭 탄을 던지고, 이어 會計課 응접실에 폭탄을 던졌다. 비서과에 던진 폭탄 은 폭발하지 않았으나 회계과 응접실에 던진 폭탄은 일시에 굉음을 내며 폭발하자 여러 명의 일본 헌병들이 놀라 뛰어올라왔다. 김익상은 이들에 게 “2층으로 올라가면 위태하다”는 말을 남기고 유유히 조선총독부 청사 를 빠져 나왔다.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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