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유 쇼탕

카미유 쇼탕
Camille Chautemps
Camille Chautemps.jpg
인물 정보
출생 1885년 2월 1일
프랑스 파리
사망 1963년 7월 22일 (78세)
미국 워싱턴 DC
국적 프랑스
정당 급진당
배우자 줄리에트 외제니
가족 자녀: 2남

카미유 쇼탕(프랑스어: Camille Chautemps)프랑스 제3공화국의 총리로 재직한 정치인이자 프랑스의 국가 반역자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전쟁 이전[편집 | 원본 편집]

쇼탕은 1885년 프랑스 파리에서 저명한 정치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젊을 적의 그는 스타드 프랑셰 구단의 헌신적인 럭비 선수이자 정력적인 변호사로 이름을 떨쳤고, 프리메이슨의 프랑스 지부장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그는 정치적인 이유로 1938년에 프리메이슨을 탈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변호사로서도 럭비 선수로서도 이름을 떨치던 그는 1912년에 자신의 삼촌이자 저명한 급진당 하원의원이었던 알퐁스 쇼탕의 영향을 받아 투르의 시의원으로 정치인 생활을 시작했으며, 투르의 시장과 상원의원직을 역임하며 급진당 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키워갔다. 그렇게 급진당 내에서 우익 인사 겸 능숙한 중재자로 유명해진 쇼탕은 에두아르 에리오 내각과 폴 팽르베 내각, 그리고 아리스티드 브리앙 내각에 계속 입각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쇼탕은 1930년에 처음으로 총리 겸 내무장관으로 자신의 1차 내각을 조각(組閣)하게 되나, 겨우 열흘 만에 그의 내각은 붕괴되고 만다. 그리고 그는 알베르 사로, 피에르 라발 등의 단기간 내각이 8번 연속으로 붕괴된 이후에야 다시 총리직에 앉게 되었는데, 러시아계 유대인인 알렉상드르 스타비스키가 일으킨 부패 스캔들인 스타비스키 사건에서 부적절한 인선과 처신을 보여준 끝에 1934년 위기를 불러왔고, 결국 그는 총리직에서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후임자로는 이전에 총리를 역임했던 같은 당의 에두아르 달라디에가 지명되었다. 하지만 달라디에 역시 스타비스키 사건의 여파로 인해 얼마 못가 사임하고 만다.

달라디에의 사임 이후, 선거연합을 구성하고 있던 인민 전선은 유명한 민주사회주의자이고 SFIO의 당수였던 레옹 블룸을 총리로 내세운 내각을 구성했는데, 여기서 쇼탕은 부총리 겸 국무장관으로 다시 입각하게 되었고, 상원의 비토로 인한 블룸의 사임으로 인해 다시 총리가 되었다. 여기서 쇼탕은 블룸의 노선에 따라 대공황에 맞서 법정화폐였던 프랑스 프랑의 평가 절하를 주도했고, 프랑스 내 철도회사를 국유화하여 프랑스 국유철도(SNCF)를 만들었다.

하지만 쇼탕은 이내 SFIO 의원들을 입각시키길 거부하여 사실상 인민 전선을 붕괴시켰고, 그러는 와중에도 쇼탕은 성차별적인 공화국 법령 213조를 무효화하는 데 공헌했다. 하지만 이듬해 3월 13일에 히틀러가 단행한 안슐루스로 인해 그의 내각은 다시 붕괴된다. 후임자로는 다시 레옹 블룸이 지명되면서 일단은 다시 인민 전선이 복구되었다.

그러나 얼마 못가 쇼탕과 달라디에를 위시한 급진당은 스페인 내전에 대한 지원을 촉구하는 레옹 블룸 총리와 SFIO의 뒷통수를 쳤고, 결국 인민 전선은 완전히 붕괴되고 만다.

이후 쇼탕은 1938년 4월부터 1940년 5월까지 에두아르 달라디에, 폴 레이노 내각에서 부총리로 재직했다.

2차 세계대전 시기[편집 | 원본 편집]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가짜 전쟁을 거쳐 프랑스 침공 때, 스당됭케르크가 함락된 뒤, 8월 즈음 쇼탕은 내각 각료 중 하나였던 폴 보두앵(Paul Baudouin)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생각을 정리한 뒤, 부패한 정계로부터 자유로운 프랑스의 영광을 외치던 극우 정치군인 필리프 페탱의 불저항 노선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적극적으로 페탱에게 협조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으로 당시 국방차관이었던 샤를 드 골 장군을 통해서 윈스턴 처칠이 영-프 연합 구상을 제안했는데, 처칠의 제안을 마음에 들어하던 당시 총리였던 폴 레이노에게 압박을 넣어가면서까지 처칠의 제안을 반대한 것이다.

결국 레이노는 자신의 내각 통제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체감하면서 사임할 수밖에 없었고, 이내 쇼탕과 그를 따르는 내각 각료들, 그리고 의원들은 압도적으로 페탱이 프랑스 총리가 되는 것에 찬성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일련의 과정들을 국민 혁명(Révolution Nationale)이라는 미사여구를 써 가면서 포장하는 데 급급했다. 결국 대독 휴전이 강행되고, 한때 동지였던 달라디에와 블룸, 레이노, 그리고 조르주 망델 내무장관이 페탱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수감되고 있을 동안, 쇼탕은 비공식 주미 대사로 임명되어, 미국에서 비시 정부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역할을 맡았다.

말년[편집 | 원본 편집]

1940년 말, 쇼탕은 자신의 신병(身病) 문제 때문에 모든 공직에서 사임하고, 비시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프랑스 국내에서 벌어지는 유대인 학살 건으로 몇 통의 항의 편지를 보내며 소일거리를 하던 그는 횃불 작전으로 인해 북아프리카 식민지가 자유 프랑스에게 넘어가자, 1944년에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3년 뒤인 1947년에 프랑스 형사법원은 미국으로 망명한 쇼탕의 궐석 재판을 열어, 나치에 부역한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한다. 그리고 쇼탕의 사면은 1954년에 이뤄졌고, 이후 쇼탕은 미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살다가 워싱턴에서 죽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