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검

참사검(斬蛇劍) 또는 적소검(赤霄劍)은 한고제 유방이 봉기할 때 뱀[蛇]을 벤[斬] 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그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전설[편집 | 원본 편집]

패현의 정장(亭長)[1]이었던 유방은 진시황릉을 짓는 여산(驪山) 인근으로 죄인을 인솔할 임무를 맡았는데, 호송 도중 죄인이 하나 둘씩 달아나는 바람에 이대로 가다가는 여산에 도착할 즈음 되면 모두가 도망가버릴 형편이었다. 진나라는 혹독한 법가 정책을 펼치기로 유명했으므로, 당연히 유방 그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것임은 불 보듯 뻔했다.

이윽고 유방은 택중(澤中)에 이르러 행렬을 멈추고는 술을 몇 잔 걸치고 죄인을 풀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보다시피 사람도 점점 줄어들고 있고, 그럭저럭 여산에 도착한다 하더라도 언제 고향에 돌아갈 지는 아무도 모르는 바이오. 그럴 바엔 그냥 각자 제 갈 길을 가는 게 낫다고 생각하오. 나도 도망칠 생각이니 갈 사람은 가시오.

요약하면 '기왕 ×된 거 목숨이 아깝다면 얼른 튀자'이다.

죄인 중 10명이 유방을 따르기 위해 남았고, 유방은 술을 더 퍼마신 뒤 한밤 중에 움직이기 위해 사람 한 명을 보내 앞 길을 살피도록 했다.

앞서가던 이가 곧 되돌아와 "앞에 큰 뱀이 길을 막고 있습니다. 돌아가는 게 낫겠습니다."라고 권했다. 얼큰하게 취해있던 고조는 "장사가 가는 길에 무엇을 두려워하는가!"하고 소리치고는 앞으로 나가 칼을 뽑아 뱀을 베어 죽여렸다. 그리고 그대로 몇 리를 더 가다가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뻗어버렸다.

유방을 따르던 자들이 뱀이 죽은 곳에 이르자 한 노파가 울고 있었다. 사정을 묻자 노파가 대답했다.

내 아들은 본디 백제(白帝)[2]의 아들인데, 뱀으로 변해있다가 그만 적제(赤帝)[3]의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소. 그래서 우는 것이오.

사람들은 노파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고 때려서 노인 공경 한 번 화끈하시네요 제대로 된 사정을 들어보려고 했으나, 노파는 홀연히 사라졌다.

술에서 깬 유방에게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하자, 유방은 내심 기뻐하였고 따르던 이들도 유방을 경외하게 되었다.[4]

역사[편집 | 원본 편집]

한 왕조가 건국된 이래로 참사검은 전국옥새와 함께 한나라의 황제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보물이 되었다. [5]

서진 시대에 이르러 왕망의 수급 약 300년 동안 역적의 머리를 보관한 이유는 생각하지 말자공자의 신발 등의 보물과 함께 무고(武庫)에 보관된 참사검은 무고에 화재가 발생하던 날 지붕을 뚫고 승천하는 것이 목격된 걸 마지막으로 행방이 묘연해졌다.[6]

각주

  1. 오늘날로 치면 동네 파출소장 정도의 직책이다.
  2. 오행사상에서 서쪽을 다스리는 금덕(金德)의 신.
  3. 오행사상에서 남쪽을 다스리는 화덕(火德)의 신. 오행에서 유방이 세운 한이 화덕의 나라이고, 그 뒤를 이은 조위가 토덕, 서진이 금덕을 자처한 걸 보면 절묘한 설화이다.
  4. [출처] 《사기(史記)》 권8 고조본기(高祖本纪) 제8
  5. [출처] 《통전(通典)》 권63 예(禮)23 연혁(沿革)23 가례(嘉禮)8 <천자제후옥패검수새인(天子諸侯玉佩劍綬璽印)>: 漢高帝入關,得秦始皇白玉璽,佩之,曰傳國璽,與斬蛇劍俱為乘輿之寶。(한고제가 문에 들어가 진시황의 백옥새를 얻으니 이걸 차고 전국새라 불렀으며 참사검과 함께 더불어 천자의 보물로 삼았다.) 韍承秦制,用而弗改,加之以雙印、佩刀。
  6. [출처] 《진서(晉書)》 권36 열전제6 <장화(張華)>: 武庫火,華懼因此變作,列兵固守,然後救之,故累代之寶及漢高斬蛇劍、王莽頭、孔子屐等盡焚焉。時華見劍穿屋而飛,莫知所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