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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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炳夏. 창씨명은 유미나가 마사오(弓長正雄).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9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28년 2월 1일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분천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안동중앙심상소학교를 졸업한 뒤 1943년 안동농림학교에 입학했다. 재학 중 심훈의 소설 <상록수>를 읽고 농촌의 비참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이광수의 <무정>, <유정> 등에서도 한민족이 곤궁하게 살며 나라 잃은 설움에 빠진 모습을 접하고, 민족의식을 자각하였다. 이에 디섯 명의 친구들과 함께 제일교회 앞 서점에서 한국 문학전집, 일본문화전집, 세계문학전집 등을 독파하고자 독서모임 '상지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책의 내용을 논의하면서 농촌의 비참한 현실에 울분을 느꼈다.

그러던 중 1943년 8월 방학을 맞이하여 안동 월곡면으로 차출되어 임청각에 봉사하러 갔다가 황병기, 이병화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한국을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에 뛰어들기로 마음먹었다, 이리하여 안동농림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회복연구단에 가담했다. 조선회복연구단은 1942년경 안동농림학교의 제8~10회 학생들이 대구 동촌비행장 확장공사에 동원되었을 때 조직한 비밀결사로, 연합군이 조선에 상륙할 때를 대비하여 일제히 궐기하여 일제의 후방을 교란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안동시내의 일본인 기관 및 요인의 습격을 투쟁방침으로 삼고, 1945년 3월 10일 일본육군기념일에 총궐기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일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사전이 기밀이 새는 바람에 거사 직전 그를 비롯한 단원 전원이 체포되었다. 이 일로 대구지방검찰청 안동지청으로 끌려가 갖은 고문을 받으며 재판을 기다렸다가 8.15 광복 다음날인 1945년 8월 16일 기소유예 불기소처분을 받아 석방되었다.[1]

출옥 후 정세가 매우 혼란한 걸 보고 정치에 뛰어들기보다는 교직 생활을 하기로 마음 먹고, 안동시의 여러 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이때 한지를 가지고 와 등사판으로 새 교과서를 만들었고, 야사가 섞인 역사책을 읽고 점심시간마다 학생들에게 역사 이야기를 들려줬다고 한다. 1963년 나라에서 독립유공자를 포상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포상 신청을 할 근거서류를 마련하기 위해 안동경찰서를 찾았지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안동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을 조사하기 위해 기록을 다 가져갔다가 반민특위가 강제 해산되면서 자료가 다 흩어지는 바람에 남은 자료가 거의 없었다.

30여 년간 자료를 조사한 끝에, 부산형무소 정부 문서 보관소에서 겨우 ‘형사사건부’를 찾았다.[2] 이리하여 1999년 조선회복연구단에 가담한 동료 30여 명과 함께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다. 이후 광복회, 대구경북생존독립지사협의회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현재까지 안동에서 생존하고 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2. 기소되기 전 풀려났기 때문에 검찰 공소장이나 재판 기록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