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경 (18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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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9년 7월 13일 평안남도 순천군 순천면 관하리에서 출생했다. 청소년기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으나, 1905년 4월경 순천군 사립시무학교에 재학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당시 그는 일본 도쿄 고이카와구 야나기초 용전관에 있을 때 황성신문[1]과 <제국신문>[2]에 각각 기고했다. 이 기고에 따르면, 그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기 위해 일본에 머물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일본을 유람하고 일본이 근대화된 이유, 대한의 자강을 위한 방안 등 근댕갈망과 부국강병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기술했다.

그는 일본에서 미국으로 가기 위해 배편을 알아보았지만 표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3,4개월 일본에서 머물다가 7월쯤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서의 유학 생활도 알려진 것이 거의 없지만, 신한민보 1916년 6월 15일자 기사 '리희경씨의 의학 졸업'에 그의 생활이 대략적이나마 나와 있다.

일천 구백 오년 칠월에 미국 상항에 상륙하여 딕하와섬 톰시쓰로 가서 수삭 어학을 예비하여 가지고 동 륙년에 오하요로 가서 보통과 중학을 마치고 왜슬리대학에 들어가서 일년을 지낸 후 일천 구백 십일년에 엘리노이 유니벌시티에 들어가서 의학전문과를 연구하여 본년 오월 삼십일일에 졸업하였다더라.

이에 따르면, 이희경은 1905년 7월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어학공부를 마친 후, 1906년 오하이오에서 보통과 중학을 마쳤으며, 웨슬리 대학에서 1년간 보낸 후 1911년 일리노이 주립대학에 입학하여 1916년 5월 31일 의학전문과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그는 1911년 시카고에 있을 때 대한인국민회 시카고지방회에 입회하였고, 12월 2일 총무에피선되어 대한인 국민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햇다. 이외에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하는 대양보 후원금으로 1원을 기부했고, 유학생 사기꾼 김병준을 규탄하는 성명서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하와이로 가서 한인 교포들을 상대로 의료사업을 하던 그는 1917년 9월 29일 조선으로 귀국하여 고향에 잠시 들렀다가 평양이나 서울에서 개업하려 했다. 이 사실은 <매일신보> 1917년 10월 2일자 기사에 나와 있다. 하지만 실제로 개업했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음을 입증하는 기록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으나, 3.1 운동 평북 청산, 선천, 의주 지방에 배포된 신한민국 정부 선언서에 적힌 명단에서 교통부차장에 이름을 올렸다.

일제의 '용의조선인명부'에 따르면, 이희경은 1919년 5월 의사 개업을 위해 상하이로 도항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증인 이희경 신문조서>에 따르면, 그는 "대정 8년(1919년) 4월경 상해로 갔다"고 진술했다. 상하이로 간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임시회계감사원, 외무차장, 외무총장 대리, 임시의정원 평안도 의원, 법률기초위원, 군무위원 및 군무위원장 등으로 활동했다. 이외에도 노백린 군무총장 환영회에서 환영사를 낭독했으며, 태평양의회에 보낸 의정원 의원의 독립청원서에 서명했고, 미국의원단 동양유람단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임시정부 측 교제위원으로 활동했다. 이희경 등 교제위원은 진정서와 선전자료를 전달했으며, 이들을 환영하는 각종 대회에 참석해 외교 활동을 전개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러시아로부터 지원을 받기 위해 특별전권 대표를 파견하기도 했다. 이때 이희경은 안공근과 함께 특별전권 대표로 선전되어 독일 베를린을 거쳐 러시아로 이동하면서 외무인민위원회 위원장 치제린에게 서한을 발송했다. 서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정부는 소비에트 러시아와 더욱 긴밀한 상호관계를 수립함으로써, 양국 정부의 정치적 연대 활동이 두 나라 공동의 적을 상대로 한 투쟁 방법을 장차 발견할 수 있도록, 본인을 사절단원으로 모스크바에 파견하였음을 귀하께 통보하여 드리는 바입니다. 그러나 그 외에도, 작년에 우리 상해임시정부의 대표자인 양 행동했던 한형권 씨가 활동하며 직권 남용한 것을 모두 추적하라는 명령이 본인에게 하달되어 있습니다.


본인은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의 공한을 귀하께 개별적으로 전달할 수있기를 고대하고 있었으나, 예기치 못한 이유로 이곳 베를린에서 지체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이곳에 체류 중인 친절한 소비에트 사절단 편으로 본 서신을 이제야 발송합니다. 본인은 이곳에서 한형권 씨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적을 살피라는 명령과 관련하여 말씀드리면, 귀하와 토론을 마친 다음 명령에 상응하는 증거를 확보하고 나서야 모종의 방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한형권이 모스크바에 있었다면 그의 활동을 밝혀내야 하는 본인의 임무가 아주 쉽게 달성될 수 있었을 것임을 고려할 때, 그가 모스크바에 체류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무척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곤란한 임무가 조속한 시일 내에 해결될 것이며, 결국에는 양국 정부의 간절한 희망과 우호적 바람이 성취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귀하의 조속한 답변을 기다리며,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의 특별전권 이희경은 귀하에게 충실할 것입니다.

서한에 따르면, 이희경은 러시아와 외교적 방법으로 지원을 받고자 하였고, 한형권의 직권남용을 조사하려 했다. 그러나 두 목적 모두 뜻대로 달성하지 못했다. 러시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였고, 한형권에 대한 직권남용 조사도 오히려 임시정부 내에서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의 갈등만 더 심화시켰다. 그렇지만 임시정부 내 인사들은 이희경을 높게 평가했다. 임시정부에서 내외정책안으로 외교응원단을 조직할 때, 그가 단원으로 적합한 인물로 평가되기도 했다. 또한 상하이시 치안경비대가 작성한 한국인에 대한 보고에 따르면, "이희경은 젊은 한국인들에게 큰 영향력을 갖고 있으며 그들을 지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이희경의 임시정부에서의 활동 중 가장 주요한 역할은 바로 대한적십자회였다. 임시정부는 독립운동가들이 조국의 광복을 위해 독립전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전상자의 구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대한적십자회의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1919년 8월 29일 내무총장 안창호의 명의로 대한적십자회 재건을 공표하고 회장에 선임되었다. 이희경은 적십자회 설립 후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먼저 회규를 작성하여 9월 19일에 개최한 상임위원회에 제출하였으며, 서병호와 정인과가 수정위원으로 선정되어 수정 통과시켰다. 또한 이희경은 이날 회의에서 대외 선포문을 영어로 번역하였고, 고문으로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 문창범을 추대했다.

그리고 미주한인사회로부터 대한적십자회에 대한 지원을 받아내기 위해 1919년 9월 하순 미국으로 떠나 11월 1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의사와 간호사를 양성하는 학교 및 병원을 설립하기 위한 자금을 모집하였고, 한인사회에 대한적십자회의 설립과 방향에 관하여 설명하고 적극적인 지원을 당부하였다. 그런데 1919년 11월 4일자 <신한민보> '임시의정원 회록'에 따르면, 임시정부에서 이희경에게 의원 권리 포기를 증명할 것을 요구하라는 전보를 보냈다고 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희경이 실제로 의원 권리를 포기했는지 여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이희경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사흘간 머무른 뒤 11월 5일 워싱턴으로 떠나 11월 13일에 개최하는 한인구제회에 참석했다. 이후 캘리포니아 주의 한인공동회를 비롯하여 세크라멘토, 로스엔젤레스, 푸에블로, 시카고 등지의 한인사회를 찾아 적십자회의 설립소식과 계획을 설명하고 지원을 요청헀다. 또한 <신한민보>에 적십자회 회원 모집 광고를 게재하여 입회청원서, 적십자회의 목적을 알리고 의연금 모집운동을 전개했으며, 적십자회 의연금 납부자 명단을 게재하는 등 후원금 모집도 독려했다. 그 결과 대한적십자회 북미지부가 설치되었으며, 총 4천여 원이 모집되어 상하이의 적십자회 본부에 송금되었다. 한편 1920년 6월 21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임시정부 이승만 대통령 환연회에 대한적십자회 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1920년 7월 13일 상하이로 귀환한 이희경은 1923년 1월 독일로 가기 전까지 임시정부와 대한적십자회 활동에 집중했다. 그는 스위스에서 유학중인 이관용을 스위스에서 개최하는 세계적십자회 총회에 대한적십자회 대표로 파견하여 대한민국 적십자회의 창립경위, 일본적십자회에 대한 항의문 등을 제출하도록 했다. 회원도 활발하게 모집해, 11월 15일 개최한 제1회 총회에서 보고된 바에 따르면 회원이 999명, 의연금 1167원 20전에 달했다고 한다. 또한 11월 23일부터 12월 14일까지 삼일대, 자유대, 독립대, 십자대 등 4개 조로 편성하여 회원 모집 경쟁회를 가진 회원이 1946명에 이르렀으며, 간호원양성소를 개교하였다.

1920년 4월경 회원은 2128명으로 늘어났고, 자금은 2천원에 이르렀다. 1921년 9월 말에는 회원이 3439명, 재정은 8164원 6전을 모았다. 또한 중국의 광동군과 광서군이 교전할 때 적십자대가 파견되어 상병자를 구호하기도 했다. 이렇듯 적십자회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이희경은 1922년 2월 20일 총회에서 손정도를 회장으로 선임하면서 대한적십자회에서의 활동을 종료했다. 또한 1922년 2월 15일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사면 청원을 청원하였고, 김인전의 동의에 의해 가결되었다.

이후 1923년 1월 독일 베를린에서 의학공부를 다시 시작하였다. 그는 독일에서 <신한민보>의 통신원으로 일하면서 독일의 유학생 상황을 전달했고, 1924년 미국으로 건너가 고학생 구제를 위해 노력했다. 1925년 4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유한주식회사를 발기할 대 서기로 참여하여 회사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신경쇠약에 걸려 1929년 중반부터 2년여간 요양하였고, 펜실베니아의 어느 병원 의원으로 근무했다. 1934년 8월 23일 임시정부 재무부 주미 제5생서 비서로 선임되었고, 1935년 10월 미국 아퍼트제약회사의 동양 특파원으로 가장하여 귀국하다가 요코하마 항에서 체포되었다.

1935년 11월 9일 만주국 황제 선통제의 일본 방문이 결정되자, 그는 위험 인물로 간주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취조받은 뒤 자택에 연금되었다. 이후 재차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937년 6월경에 귀국하여 호흡가전문의로 활동하면서, 매일신보에 <가래를 함부로 뱉지 말고 보건과 섭생에 주의하라>, <폐결핵을 박멸하려면> 등 위생에 관한 글을 게재하였다.

1941년 6월 12일 평남 순천군에서 병사하였고, 1970년 11월 17일 유해가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이희경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각주

  1. 황성신문 1905년 4월 12일자, 4월 13일자.
  2. 제국신문 1905년 4월 18일자, 4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