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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陸東百.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08년 11월 20일 충청북도 옥천군 안내면 서대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수원고등농림학교에 재학중이던 1926년 여름 항일학생결사 건아단(健兒團)에 가입했다. 건아단은 농민대중을 계발하여 신사회 건설의 토대로 삼는 걸 목표로 삼은 학생결사로, 단원들은 수원군 안룡면 고견리를 비롯한 여러 마을에 농민야학을 설립하여 농민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하였다. 1927년 9월 북도 지방을 수학 여행하였을 때 강원도 등지에서 일본인의 대규모 농장을 목격한 단원들은 이에 분개해 민족농장 건설의 꿈을 키웠다. 그리하여 1928년 6월 당시 일본 도쿄에 설치되어 있던 조선농우연맹에 가입하고 '조선인에 의한 조선농촌개발'이라는 조선농우연맹의 주장에 합류하여 추진키로 했다.

그러다 지방강연회에 연사로 참석했던 수원고농생 한전종(韓典鍾)이 무기정학당하자, 단원들은 일제의 추적을 회피하기 위해 계림농흥사(鷄林農興社)로 명칭을 개칭 위장하였다. 그러나 건아단 출신으로 김해공립농업학교에 교사로 근무하던 김성원(金聲遠)이 건아단의 목적을 수행하던 중 일경에 검거되자, 1928년 여름에 다시 조선개척사(朝鮮開拓社)로 조직을 개편했으나 사건이 확대됨에 따라 동결사의 조직과 활동이 드러나게 되어 1928년 9월, 전회원이 붙잡혔다. 이때 육동백 역시 체포되었고, 서대문형무소에서 18개월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30년 2월에 경성지방법원에서 면소판결을 받았다.[1]

출옥 후인 1930년 4월 수원고등농림학교에 재입학하여 1931년 3월 졸업했다. 8.15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에서 농림부 산하 산림청의 개청 멤버로 산림녹화사업에 참여했다. 1957년 미국 주재 한국 대사관 농무관으로 근무하였지만, 1961년 5.16 군사정변 후 해직되었고, 그때부터 미국에 거주하였다. 뉴욕주립대와 미네소타대에서 당시 농업 분야의 첨단 기술로 꼽힌 ‘사방공학(沙防工學)’을 가르쳤고 농업용 기계 회사에서도 근무했다. 87세까지 주중에는 은행, 주말에서 양묘장에서 일했으며,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재임 시절 '전미 노령 근로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2006년 9월 6일 방한하여 6월 7일 서울대에서 개최된 <한국 농학 교육 100년> 기념행사에 참석해 서울 농생대에서 "학생 독립운동의 효시 수원고농 학생사건"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하고 고향인 옥천을 방문한 뒤 6월 29일 미국으로 돌아갔다.

2007년 5월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벌어지자, 버지니아 공대 총장에게 위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플로리다 자택에서 승용차를 몰고 나섰다가 교통사고를 당했고, 한달간 투병하다 2007년 6월 11일 별세했다. 향년 10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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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