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후직

柳后稷.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4년 11월 14일 경상북도 안동군 동후면 도곡리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유동붕(柳東鵬)이다. 그는 천도교 신자로, 1919년 3월 중순 송홍식·송기식·송장식(宋章植)·문소원(文召源)·권중호(權重浩)·이종록(李鍾祿)등과 함께 천도교도의 대표로서 기독교도와 비밀연락을 취하면서 거사 계획을 진행시켰다.

3월 18일 오후 6시경 1백여명의 시위군중은 읍내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고, 이튿날 오전 1시경에는 3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이 군청·경찰서·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으로 몰려가서 애국지사의 석방을 요구하며 투석전을 벌이다가 일경의 발포로 말미암아 부득이 해산하였다.

이어 다음 장날인 23일에는 더욱 격렬한 제2차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났었는데, 이날 오후 8시경 3천여명의 시위군중이 만세시위에 참가하여 읍내의 이곳저곳을 시위행진하고 있을 때, 일본 군경이 공포를 발사하며 시위를 저지하려 하였으나, 시위군중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경찰서·지방법원 안동지청을 포위하고 투석으로 대항하였다.

그러다가 일군경은 야만적인 사격을 감행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케 되어, 시위군중은 일단 해산하였다. 그후 일군경들은 주동자 검거를 시작하면서 결국 체포되었고, 1919년 5월 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상고했으나 1919년 6월 5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어[1]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안동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6년 8월 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유후직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990년 7월 5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