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걸

柳上杰.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2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08년 4월 6일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면 장암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광주공립농업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8년 6월 27일 4학년생 송성수, 김윤성, 3학년생 김재룡, 2학년생 나석현과 함께 일본인 교사 성강아부를 배척하기로 계획하고, 2,3,4학년생 150명과 함께 사직 권고서를 성강아부 교사에게 교부하였고, 평야 교장에게 진정서를 교부했다. 그러나 교장이 들어주지 않자, 6월 29일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이로 인해 무기정학 처분을 받자, 그는 동지들과 함께 모계, 탐정 등의 부서를 정하고, 자신은 모계 부원이 되어 동맹 휴학생과의 연락을 도모했다. 1928년 7월 상순 광주면 성저리 유치선의 집에서 송성수, 김재룡, 김윤성과 함께 <광주농고 동맹휴교 사건에 대한 학교 당국의 퇴학, 무기정학 처분에 대하여 본 동맹 휴학생 일동의 태도를 성명한다>라는 제목으로 다음의 격문을 작성했다.

동맹휴교 사건 돌발 이래 학교 당국은 학무 당국과 결속하여 학생 측의 요구조건에 대해서는 조금도 고려의 성의가 없고, 동맹휴교의 동기인 당국자의 죄는 일체 학생에게 전가하여 그 책임을 회피하고 오히려 학생의 반성을 요구하고 있고, 학부형회는 학교 당국에 매수되었다. 이를 감시하고 있던 1학년 역시 2, 3녀생과 동일한 보조를 취하게 되자 책임자인 교장은 퇴학, 무기정학 등의 가혹한 처분을 하여 문제를 확대시켰다. 우리들은 폐교되는 것을 목표로 동맹휴교를 계속하여 최후의 5분까지 당국과 교섭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맹휴교가 아직 발생하지 않은 학교와 강호의 유지 여러분은 철저하게 우리 동맹휴교를 지지하여 다음 기록의 표어 아래 모여라.


1. 식민지 노예교육제도를 철폐하라.

1. 일한 공학제 실시는 절대 반대한다.
싸우자. 싸우자. 모국을 위해서 최후까지. 모국의 생명은 우리들의 활동 여하에 있다. 2천만 동포를 부활시키고 3천리 강산을 빛내는 것은 우리들의 두 어깨에 있다.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우리의 친구여. 이번 사건이 혁신의 기초, 갱생의 기초임을 깨닫자.

그들은 이 격문의 인쇄물 각 15통을 광주 읍내 일대에 배포, 반포하였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28년 9월 28일 광주지방법원에서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건 위반, 상해 혐의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1] 1930년 1월 장재성 등이 주도한 성진회에서 활동한 혐의로 다시 체포되었고, 1930년 10월 27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4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았다.[2] 이에 불복하여 공소했고, 1931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미결구류일수 365일 본형에 산입)으로 감형되었다.[3] 1932년 6월 전남 영남군에서 최판옥 등이 주도한 농민 시위투쟁에 연루되어 며칠간 조사받았다. 1953년 5월 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21년 유상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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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