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독:김호

레트로 유니폼을 입고 환하게 웃고 있는 김호

프로필[원본 편집]

  • 이름: 김호 (金浩 / Kim Ho)
  • 생년월일: 1944년 11월 24일
  • 국적: 대한민국
  • 출신지: 경상남도 통영시
  • 신체조건: 177cm
  • 소속팀: 제일모직 (1964~1968)-해병대(군복무)  양지축구단-상업은행(1970~1973) 1
  • 지도자: 동래고 감독 (1975) 한일은행 축구단 감독 (1983~1987) 울산 현대 감독 (1988~1991)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1992~1994) 수원 삼성 블루윙즈 감독 (1995~2003) 대전 시티즌 감독 (2007~2009) 통영축구클럽 총감독 2 (2010~2015) 예원예술대학교 기술고문 (2013~2015) 용인시축구센터 총감독 3  (2016~2017)
  • 행정가: 대전 시티즌 대표이사 (2017~)
  • 포지션: 센터백
  • 국가대표: 71경기

소개[원본 편집]

수원삼성의 초석을 놓다

-수원 삼성 블루윙즈 공홈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초대 감독이자, 명선수와 명장으로 인정 받고 한국 축구의 대표적인 야당 비주류 인물로서 한국 축구의 레전드로 불렸던 인물 하지만 대전 시티즌 감독과 대표 이사를 지내면서 각종 논란이 끊이지 않으며 명성이 바닥까지 추락한 축구인. 대한민국의 前 축구선수, 前 축구 감독이자 행정가로서 현재 대전 시티즌의 대표 이사. 

3. 선수 경력[원본 편집]

60~7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최고의 수비수

1944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난 김호는 어린 시절부터 축구 선수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 

김호는 달리기 선수로도 활약했지만 축구를 제일 좋아했다고 하며; 초등학교 때부터 축구선수로 활약하며 지역대회에서 우승을 거두기도 하였다. 통영중학교에서 뛰던 시절 집이 어느 정도 살았기에 라디오가 있던 김호는, 54년과 58년 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 한국이 연속으로 대만에게 패배하는 중계를 듣고 축구선수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집안 사정도 안 좋아지고 통영초등학교나 통영중학교나 통영고등학교나 전문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에 축구를 접었으나 주변에서 김호의 재능을 아까워해 자꾸 채근한 끝에 진주고등학교로 진학하였다. 

하지만 여러 가지 요인으로 상당히 힘들었다고 한다. 일단 섬인 통영에서 한참 떨어진 진주까지 왔다갔다 하는 것과 더불어 제대로 배우지도 않았던 축구를 1년 쉬었으며, 이 시기 키가 확 컸는데 이를 잘 적응하지 못하는 등 상당히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다 부산의 동래고등학교에 입학해 당시 감독이던 안종수의4  지도를 받으며 고교 시절부터 기량이 일취월장하여, 수비수임에도 빠른 발을 지녔기에 전도 유망한 선수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으며, 이때부터 동래고등학교는 전성기를 달리기 시작했는데, 그전까지는 지방 팀이 서울을 꺾어본 적이 없었으나 최초로 김호의 동래고가 동북고를 2:0으로 꺾었다고 한다.

안종수 감독이 제일모직 감독으로 옮기면서, 김호도 고민하지 않고 제일모직에 입단하였으며, 대학교를 나오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한다는 우려가 있었으나5 , 이 시기 조윤옥은 신인인 김호를 보고 크게 될 재목이라고 평가했으며, 선배의 부상을 기회로 데뷔를 하게 된 김호는 제일모직에서 중앙공격수와 수비수를 넘나들며 활약하였으며, 여기서의 활약으로 청소년 대표를 건너뛰고 바로 국가대표로 활동을 시작했다. 1964년부터 제의가 왔는데, 주전이 아니라면 가지 말라는 안종수의 권유로 인해 김호는 아쉬우면서도 세 번이나 대표팀 선발에 불응하다가 1965년 김종필배 일본전에서 데뷔하였다.

대표팀에서는 처음 브라질을 본따 4-2-4를 활용하고 있었는데 이 시스템에서는 김호는 주로 라이트백으로 뛰었다. 그런데 김용식이 감독으로 들어오면서 이탈리아식으로 전술을 바꾸게 되고, 여기서 김정남과 듀오를 이루게 되었다. 당시 기준으로 둘 다 기술이 준수한 수비수였는데, 이걸 통해 아시아 무대에서 재미를 봤다고 한다. 이런 능력을 바탕으로 1970년 아시안 게임 우승멤버로 활약한다.

1965년 해병대에 입대한 김호는 전국체전을 우승하면서 국가대표 선수들을 해병대로 많이 모여들었고, 이 시기 양지 축구단이 창설되면서 김호는 해병대에서 양지로 파견을 가는 형식으로 양지에서 뛰게 된다. 그런데, 양지에서 유명한 유럽 순방, 남미 순방을 하면서 김호는 군대를 제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입대하여 양지에서 뛴게 괸다.6 

1970년에 상업은행으로 이적한 김호는 여기서도 몇 차례 우승을 차지하는 등 활약하다가 젊었을 적 입었던 부상의 여파로 73년 은퇴한다.

지도자 경력[원본 편집]

초기[원본 편집]

1972년부터 실업팀 상업은행 트레이너로 활동하며 선수 겸 지도자 생활을 걷기 시작했다. 1977년부터 본격적으로 지도자로서의 경력을 쌓아가기 시작하였다. 모교인 동래고등학교 감독을 시작으로 1983년에는 한일은행 축구단 감독으로 부임하여 1987년까지 활동하였다.7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원본 편집]

허정무 다음으로 월드컵에서 호성적을 거둔 국내 감독이자 히딩크 이전까지 월드컵에서 가장 호성적을 거둔 감독

1992년 7월에 사상 처음으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전임 감독으로 정식계약을 맺으며 연봉 3천만원 및 추가 승리수당 및 여러 보너스 관련 계약을 했다. 그 전까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들은 대회마다 돌아가면서 무보수로 일하던 명예직이었다. 이 때문에 교통비, 식사비나 보너스가 나오긴 했지만 연봉이나 계약서는 없었다. 그만큼 축구협회가가 주먹구구식으로 굴러가고 있었다는 이야기.8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도하의 기적 끝에 힘겹게 진출한 미국 월드컵 본선에서 댈러스, 휴스턴의 무더위와 용병술로 스페인과 2:2 무승부, 독일과 3:2로 접전 끝에 패하는 등 명 승부를 보여줬다. 국내 감독으론 허정무 감독 이전에 월드컵 본선에서 가장 선전했다고 평가 받았으며 2002년 거스 히딩크 감독 이전에는 제일 잘했던 감독으로 축구 팬들이 떠올리는 인물.

다만 이 무렵에는 스페인과 독일전은 잘 했는데 1승을 충분히 거둘 상대인 볼리비아에게 무득점 무재배를 기록하면서 16강 진출에 실패한 점으로 까였다. 결국 월드컵이 끝나고 16강에 오르지 못해 죄송하다며 국대 감독에서 사임했다.

하지만 이 당시 대표팀의 상황이나 여건, 죽음의 조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점 등을 감안했을 때 이 정도의 성적도 엄청 잘했다는게 축구팬들의 평.

그리고 장점이 있다면 고졸 출신 감독인지라 선수 선발에 있어서 흔히 고질적인 문제인 고려대, 연세대 라인을 타지 않았다는 거다. 김호 본인은 지금에 와서 인터뷰하기를, 동래고 시절부터 지도했던 애제자 윤성효를 데리고 가지 못한게 아쉽다고 인터뷰했다. 잡음이 나올 까봐 국가대표로 월드컵에 데려가지 않았다고 한다.

수원 삼성 블루윙즈[원본 편집]

김호 감독 커리어 전성기 체계적인 시스템 구축으로 신생 팀 수원 삼성을 명문 구단으로 도약시키려 한 명장.

월드컵이 끝난 후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창단 감독을 맡으며 1999년 K리그 전관왕, 아시안 클럽 컵 2연패를 기록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K리그, 대한화재컵, 아디다스컵, 슈퍼컵 등 K리그 대회를 모두 우승한 1999년의 수원은 K리그 역사상 가장 강력한 팀 중 하나로 손꼽힌다. 당시 자신이 직접 키운 김호의 아이들은 스쿼드가 후덜덜했었다.

당시 리그 대다수 팀이 3백 시스템을 채택했으나 수원에서 4백을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발레리[1]니폼니시 감독이 조련한 부천 SK와 벌인 시합들은 지금도 K리그 팬들이 꼽는 명승부다.

조광래 감독이 수석코치로서 김호 감독을 보좌했으나 불화를 겪고 1998년 안양 LG의 감독으로 옮겼다. 오늘날 전설로 전해지는 지지대 더비에는 이런 두 감독의 감정 다툼도 깔려 있었다.9 김호 감독이 물러난 뒤 차기 수원 감독은 조광래 수석코치가 물려받기로 했는데 김호 감독이 이를 반대해 사이가 틀어졌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현재는 조광래가 국가대표 감독이 될때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등 사이가 좋다.

하지만 김호 감독이 남긴 가장 큰 업적은 수원 시절 김호의 아이들이라 불리는, 1977년~1982년 사이에 태어난 고졸 신인들을 전략적으로 육성해서 한국 축구의 세대교체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비록 이들은 후임 차범근 감독과의 불화, 병역문제, 부상 등으로 지금은 국가대표에서 얼굴을 보기 힘들게 되었지만 그 성공 여부를 떠나서 일등지향노선 대신 신인들을 전략적으로 키우려고 했던 그 폭넓은 시야는 존중받아야 할 것이다.

대전 시티즌[원본 편집]

몰락의 시작 2003년 수원 삼성 감독에서 물러나며 은퇴했으나 2007년 7월 대전 시티즌 감독으로 부임하며 현역으로 복귀했으며, 여론은 국가대표 감독과 수원 삼성 감독 등을 맡으며 큰 족적을 남긴 역대 감독 중 가장 네임벨류 있는 김호의 부임을 환영하는 분위기와, 대전 구단과 사이가 썩 좋지 못했던 수원 삼성 감독 출신인 김호의 부임을 달갑지 않게 보는 분위기 두 분류로 갈라져있었다.

당시 대전은 전임 최윤겸 감독은 이영익 수석코치와의 불화 끝에 같이 잘렸으며 수비도 잡지 못하여 10위에 쳐져있었다. 결국 5경기가 남았을 당시 전승을 해야 PO을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수비 안정감을 찾고 최윤겸이 구상했던 데닐손-슈바-브라질리아 공격 라인이 드디어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으며, 또한 대전은 기존의 최윤겸이 감독이 쓰리백에서 무리하게 포백으로 바꿔서 수비가 빵꾸난 상태였는데 김호 부임 후 포백이 상당히 안정화되었으며, 이러한 김호의 능력을 앞세워 전승을 기록하며 막판 뒤집기로 북패를 제치고 6강 PO에 진출하였다. 

이 결과로 김호 감독은 엄청난 칭송을 받았으며, 특히 1월에 최윤겸이 데려와 몸 상태를 끌어올리길 기다리던 고종수도 김호가 온 후에야 몸 상태를 회복해 사제 간의 조우에만 초점이 맞춰지기도 했다.10 

하지만 이러한 성적도 최윤겸이 차려놓은 밥상에 김호는 단지 숫가락만 언저 논 것이라는 의견 역시 적지 않게 있다. 물론 김호의 공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2007년 플레이오프 진출은 김호의 공이라기보다는 데닐손-슈바-브라질리아로 이어지는 외국인 선수 및 대전에서 오래 뛰어오면서 다져온 국내 선수들의 조직력을 다져온  감독의 공이 더 크나는게 일부 팬들의 평이다.

뭐가 어찌됬든 이때까지만 해도 대전 구단의 상황은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았다. 2008년부터 김호가 이끌던 대전은 본격적으로 쇠락길에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김호는 2008년부터 정말로 옛 제자들을 불러모으는 등 명성에 맞게 번외지명으로 어린 선수들을 잔뜩 뽑기도 하였으나, 시민 구단의 재정에 안 맞게 끌어모은 선수들은 거의 어리기만 했고 팀에 적응하지도 못했으며, 지나치게 많이 선수단이 변한 탓에 대전 시티즌이라는 팀은 기존의 대전 시티즌과는 다른 팀이 되어버리며 팀 정체성 역시 크기 훼손되었다. 또한 이때 영입한 선수들 대부분이 훗날 승부조작 사건에 연루되었다. 특히 이렇게 선수를 끌어모으려 시즌 중 방출자 명단을 숙소 벽에 공지하는 만행을 범하기도 했다. 

특히 가장 문제가 되는 대목은 바로 일본 전지훈련 공금 횡령한 사건인 에이전트 비리 사건과 이다. 이 사건으로 대전 서포터즈와 구단 측이 직원 한명을 일본으로 파견하는 등의 법적 공방 끝에 가까스로 무혐의 판결로 종결되긴 했지만,11  김호가 감독 재임시절 에이전트 K씨와 손잡고 구단을 장악해 구단을 운영하고 싶어해려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못하면서 팬들로부터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사건들을 비롯해 김호와 구단의 갈등은 2008년 초부터 시작되었는데, 김호가 2007년 7월 대전 지휘봉을 잡았을 때 구단 사장은 언론인 출신에 스포츠단 운영경험이 없던 사장이였으며, 김호의 뜻을 대부분 수용하는 쪽으로 구단 운영을 펼쳤기에 아무런 트러블 앖이 구단 운영에 자신의 뜻을 반영하였었다. 한화 이글스에서 근무한 경력을 비롯해 프로스포츠 전문 경영인 출신인 송규수 사장이 취임하면서 부터 김호의 이러한 방식으로 인해 둘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문제 속에 김호는 감독 통산 200승을 달성했을 뿐 역대급으로 가장 많은 재정적 지원을 받아놓고선 2008년 리그에서 단 3승을 거두면 13위로 시즌을 마감했으며, 2009년에도 시즌 초반 부진을 거듭하다가 결국 2009년 6월 구단과의 갈등에 못이겨 불명예스럽게 퇴진했으며, 김호는 대전 팬들 사이에서는 사실상 금지어로 전락했다.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