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르겐 콜러

위르겐 콜러
Jürgen Kohler
Kohlerjpg.jpg
인물 정보
출생 1965년 10월 6일 (58세)
서독 람스하임
국적 독일
신체 186cm, 84kg
프로선수 경력
종목 축구
포지션 센터백
소속팀 SV 발트호프 만하임 (1983~1987)
1. FC 쾰른 (1987~1989)
바이에른 뮌헨 (1989~1991)
유벤투스 (1991~1995)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1995~2002)
지도 독일 U-21 (2002~2003)
MSV 뒤스부르크 (2005~2006)
VfR 알렌 (2008)
보너 SC U-19 (2012)
SpVgg EGC 비르게스 (2013~2015)
SC 하우엔슈타인 (2015~)
콜러가 뛰고 있었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키커[1][2]

축구의 신(Fußballgott)[3]

클럽 경력[편집 | 원본 편집]

발트호프 만하임(1983-1987)[편집 | 원본 편집]

여느 선수들이 다 그렇듯 콜러도 어렸을 적에는 동네 유스클럽에서 축구를 시작했고 발트호프 만하임으로 옮겨가 프로계약을 맺은 뒤 18세의 나이로 데뷔했다. 첫시즌에는 시즌 막판 5경기 출장에 그쳤지만 계속 선발출장했고 이때부터 이적하기 전까지 주전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바위처럼 단단한 맨마커로 유명하지만 선수생활 초창기만 하더라도 측면수비수와 미드필더로 많이 출장했고 주 포지션은 수비형미드필더에 가까웠다. 처음에는 단지 젊은 나이에 분데스리가에서 1군 자리를 꿰찬 재능있는 선수 중 하나였지만 1986/87시즌부터 국가대표로 뽑히고, 중앙수비수로 출장하는 빈도가 잦아지면서 단숨에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쾰른(1987-1989)[편집 | 원본 편집]

200만 마르크라는 거액의 이적료로 쾰른으로 이적하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았다. 처음에는 젊은 수비수에게 너무 비싼 금액이라고 주위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지만 분데스리가 최고의 중앙수비수로 자리매김하여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비록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리지는 못했지만 분데스리가의 수많은 공격수들을 잠재웠고, 당시 독일 최고의 팀이었던 바이언으로 이적하게 된다. 바이언이 약했던 적이 얼마나 된다고 한편 1988/89시즌 쾰른이 준우승 할 때 우승팀은 바이언이었는데 시즌 후반에 두 팀이 맞붙게 되었다. 만약 쾰른이 승리를 거둔다면 4경기를 남겨두고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매우 중요한 경기였고, 당시 부상중이던 콜러가 이적하게 될 바이언을 상대로 뛰는 것을 부담스러워해 결장하리라는 전망이 많았다.[4] 하지만 콜러는 보란듯이 출전했고 비록 평상시보다 부진한 모습으로 패배했지만 부상을 감수한 투혼 덕에 타블로이드를 잠재울 수 있었다.

바이에른 뮌헨(1989-1991)[편집 | 원본 편집]

300만 마르크라는 거액으로 이적했지만 기대와는 달리 바이언 생활은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적하고 몇 경기 뛰지도 못했는데 부상을 당해 전반기에 크게 부진했고, 이후에도 당초의 기대만큼 압도적인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바이언에서 2시즌만 보내고 다시 이적하게 되는데 그렇다고 못해서 쫓겨난 건 아니었다. 단지 유벤투스가 황당할 정도의 거액을 제시했을 뿐이다. 2년 만에 콜러의 몸값은 몇 배로 뛰었고, 그렇게 이탈리아로 떠났다.[5]

유벤투스(1991-1995)[편집 | 원본 편집]

바이언에서는 다소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이탈리아에서는 독일 최고의 센터백다운 모습을 보이며 세리에 최고의 수비수 중 한 명으로 활약했다. 독일에서도 그랬듯 잔부상으로 많은 경기를 결장하긴 했지만 출장하면 좋은 활약을 했고, 첫 유럽대회 트로피도 챙길 수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시즌에 많이 결장하기도 했고, 어느덧 서른의 나이가 되자 독일로 귀국하기로 한다.

도르트문트(1995-2002)[편집 | 원본 편집]

당시 도르트문트는 풍족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독일 스타플레이어들을 사모으고 있었고 유벤투스에서 같이 뛰던 안드레아스 묄러도 콜러보다 1년 먼저 도르트문트에서 뛰고 있었다. 콜러는 나이가 무색하게 도르트문트에서 새로운 전성기를 보냈고, 1997년에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과 함께 커리어 처음으로 독일 올해의 선수로 뽑혔다.[6] 팬들이 콜러를 향해 Fußballgott라고 외치며 응원한 것도 도르트문트에서의 일이다. 이후 30대 중반까지 팀의 대들보로 활약하다 은퇴했는데, 선수생활 마지막 경기인 UEFA컵 결승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러 페널티 킥을 내주고 퇴장까지 당하여 유종의 미를 거두지는 못했다.[7]

국가대표 경력[편집 | 원본 편집]

청소년 대표를 거쳐 스무살의 나이로 A매치 데뷔전을 치렀고, 이후 은퇴하기 전까지 모든 국제대회에 참가하며 독일을 대표하는 수비수로 이름을 날렸다. 독일 역사상 4번째로 센추리 클럽에 가입했으며 2015년 현재 독일 역대 출장 7위다.[8] 가장 빛나는 활약을 했던 것은 우승을 차지했던 1990 월드컵으로 토너먼트부터 출전해 철벽수비를 보여줬다.[9]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네덜란드의 마르코 판 바스턴과 엮이기도 했는데, 독일과 네덜란드의 앙숙관계에 독일 최고의 대인수비수 콜러가 네덜란드 최고의 공격수 판 바스턴을 전담마크했기 때문. 클럽에서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녔고 대표팀에서는 카리스마 있는 선배들 때문에 주장 완장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유일하게 유로 1996은 주장으로 참가했다. 대신 첫경기부터 부상을 당해 남은 경기에 출장하지 못했고 결국 위르겐 클린스만이 주장완장을 달고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10]

감독 경력[편집 | 원본 편집]

명선수가 명감독은 못된다는 속설의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가는 곳마다 오래 버티지 못하고 금방 물러났고, 중간중간 단장을 맡기도 했는데 이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1부에서 3부로 내려갔고, 결국 현재는 5부리그에서 지휘봉을 잡고 있다. 다만 스타플레이어들은 감독으로 실패하더라도 은퇴하고 말지 굳이 하부리그까지 내려가 감독하지 않는데, 콜러는 계속 감독을 하고 있고 가끔 아마추어리그에서 선수로 뛰고 있으니 그냥 축구가 좋아서 계속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승 경력[편집 | 원본 편집]

1. FC 쾰른

바이에른 뮌헨

유벤투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독일

수상 경력[편집 | 원본 편집]

통산 기록[편집 | 원본 편집]

시즌 클럽 리그 대륙 총계 비고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83-84 SV 발트호프 만하임 5 0 0 0 - - 5 0 분데스
1984-85 SV 발트호프 만하임 26 2 1 0 - - 27 2 분데스
1985-86 SV 발트호프 만하임 32 1 5 2 - - 37 3 분데스
1986-87 SV 발트호프 만하임 32 3 2 0 - - 34 3 분데스
1987-88 1. FC 쾰른 30 2 2 0 - - 32 2 분데스
1988-89 1. FC 쾰른 27 0 2 0 6 0 35 0 분데스
1989-90 바이에른 뮌헨 26 2 2 0 6 0 34 2 분데스
1990-91 바이에른 뮌헨 29 4 1 0 7 0 37 4 분데스
1991-92 유벤투스 27 3 7 0 - - 34 3 세리에A
1992-93 유벤투스 29 1 7 1 11 2 47 4 세리에A
1993-94 유벤투스 27 3 1 0 7 1 35 4 세리에A
1994-95 유벤투스 19 1 5 0 5 1 29 2 세리에A
1995-96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29 5 3 0 7 0 39 5 분데스
1996-97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30 2 1 0 8 1 39 3 분데스
1997-98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23 3 5[12] 1 6[13] 0 33 4 분데스
1998-99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29 2 3 0 - - 32 2 분데스
1999-00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30 2 1[14] 0 10 2 41 4 분데스
2000-01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28 0 2 0 - - 30 0 분데스
2001-02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22 0 1[15] 0 10 0 33 0 분데스
종합 독일 398 28 31[16] 3 59 2 488 33
종합 이탈리아 102 8 20 1 23 4 145 13

각주

  1. 콜러와 귀도 부흐발트의 차이라며 쓴 표현
  2. 마르코 판 바스턴을 콜러가 마크하고 있었으나 부상으로 교체된 뒤 부흐발트가 판 바스턴을 마크했다. 경기 막판 부흐발트는 판 바스턴에게 오는 공을 차단하지 않았고, 판 바스턴은 한 템포 빠른 논스톱 슛을 날려 무승부를 만들었다.
  3. 거창한 의미와는 달리 독일에서는 자팀 스타플레이어들에게 붙여주는 꽤나 흔한 별명이다. 그러나 독일에서 이 별명으로 가장 유명한 선수는 콜러다.
  4. 이와 비슷하게 바이언으로 이적할 예정이던 로타 마테우스DFB-포칼 승부차기에서 실축하면서 논란이 되었던 적이 있다.
  5. 지금의 프리미어리그가 그렇듯 당시에는 세리에A가 압도적인 자금력으로 세계의 스타플레이어들을 사모으던 시기다.
  6. 이때 4강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꺾었는데 에릭 칸토나는 자서전에서 도르트문트에게 패한 뒤 은퇴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7. 전반 31분만에 당한 퇴장이었고 이 페널티 킥이 선제골이었다. 결국 도르트문트는 3:2로 패해 준우승에 그쳤다.
  8. 페어 메르테자커가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한 터라 당분간은 자리를 지킬 것으로 보인다.
  9. 다만 FIFA 공식 베스트11에는 선정되지 못했다.
  10. 이후 계속 클린스만이 주장으로 뛰었다.
  11. 우승 경력으로 쳐주지만 출전하지는 않았다.
  12. 리가포칼 포함
  13. UEFA 슈퍼컵 포함
  14. 리가포칼 기록
  15. 리가포칼 기록
  16. 리가포칼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