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바 (중순양함)

NH 97731 Aoba.jpg
정보
함종, 함급 중순양함, 아오바급 중순양함
건조 시작 1924년 1월 23일
진수식 1926년 9월 25일
취역일 1927년 9월 20일
최후 1945년 7월 28일 구레 군항에서 미 육군항공대, 미 해군의 공습에 의해 격침
세부 제원 (1942)
기본배수량 9,000톤
전장 185.2m
전폭 17.6m
흘수 5.7m
속력 33노트 (61.9km/h)
항속거리 14노트 기준으로 15,300km
동력기관 4축 브라운 커티스 증기 터빈
함본식 보일러 12기
100,000마력
승조원 657명
무장 8인치(203mm) 50구경장 3식 함포 6문(2x3)
100mm 50구경장 대공포 4문(1x4)
610mm 어뢰발사관 8관(4x2)
25mm 96식 기관포 50정(2x14)
장갑 현측:76mm
갑판:38mm
기타 캐터펄트 1기
수상기 1기

개요[편집 | 원본 편집]

青葉(아오바. 푸른 잎) 일본군이 건조한 아오바급 중순양함의 1번함. 동형함은 2번함 키누가사가 있다.

이름의 유래는 교토와 후쿠이현 경계에 있는 아오바 산.

함생[편집 | 원본 편집]

더 자세한 정보의 출처는 각 항목에 나온 영어 위키피디아와 일본어 위키피디아, 기타 홈페이지의 링크를 참고하기 바람.

남방작전[편집 | 원본 편집]

중일전쟁에서는 상하이 상륙작전 등에 참가했으며, 1937년부터 1940년까지 개장을 거쳐 20cm 2연장포 3문을 20.3cm 2연장포 3문으로 교환했다. 이후 중순양함 4척(아오바, 키누가사, 후루타카, 카코)로 이뤄진 제6전대의 기함이 된다.

진주만 공습으로 전쟁이 일어나자, 아오바는 남방작전의 일환인 괌 전투에 참가한다. 제6전대와 수상기모함 키요카와마루 등이 투입된 이 작전에서 일본군은 섬을 대대적으로 공습한 후 10일 새벽에 상륙작전을 감행, 10일 아침 6시에 미군의 공식적인 항복을 받아낸다. 미군은 처음부터 괌을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방어준비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오바는 이후 라바울 공략전에 참가하려고 했으나, 1차 웨이크 섬 전투에서 일본군이 비참하게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미군 수비대가 본토에 물자지원을 요구하면서 "Send us more Japs!"라는 말을 덧붙였다는 소식에 미국인들의 사기는 크게 올랐고, 일본군은 패배의 치욕을 씻기 위해 2차 웨이크 섬 침공을 단행한다. 아오바는 2항전(히류, 소류)과 함께 2차 웨이크 섬 전투에 참가, 공략 성공에 일조한다. 이후 아오바의 제6전대는 R작전(라바울 전투)에 참가했고, 라바울은 일본군에게 점령된다.

1942년 2월 11일, 아오바는 종군기자이자 나중에 일본 SF의 시조 중 한 사람이 되는 우미노 쥬조를 맞이한다. 우미노 쥬조는 아오바에 탑승한 취재 경험을 책으로 정리하였는데, 이 책이 적도남하이다.

산호해 해전[편집 | 원본 편집]

1942년 4월, 일본군은 MO작전을 기획했고 아오바의 제6전대는 경항공모함 쇼호를 호위하는 역할로 이 작전에 참가하게 된다. 제6전대와 쇼호는 경순양함 텐류와 타츠다, 구축함 사자나미와 함께 투라기 침공을 엄호하고, 곧바로 포트 모르즈비 침공부대 엄호를 위해 남하한다. 그러나 미군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요크타운과 렉싱턴으로 구성된 함대를 보낸다. 일본군도 5항전(쇼카쿠, 즈이카쿠)을 보내 여기에 맞섬으로서 산호해 해전이 벌어진다.

5월 7일, 5항전의 쇼카쿠가 내보낸 정찰기가 미군 항모를 발견한다. 5항전의 함재기들은 이 미군 항모를 격침시키기 위해 출동하는데, 아오바의 제6전대에 소속된 후루타카와 키누가사가 파견한 정찰기가 다른 방향에서 미군 함대를 발견하고 5항전에 통보한다. 그러나 5항전은 이 정보를 무시했고, 미군은 93대의 함재기를 파견하여 쇼호를 공격한다. 아오바의 제6전대는 사력을 다해 쇼호를 호위했으나, 너무 적기가 많았기에 쇼호는 침몰한다. 문제는 5항전이 공격한 미군 함대가 항모가 아닌 유조선 1척과 구축함 1척이라는 점(...) 게다가 5항전은 다음 날의 결전을 대비한다며 후루타카와 키누가사를 차출한다.

5월 8일의 결전에서 미군은 렉싱턴이 침몰하고 요크타운이 전치 3개월의 피해를 입었지만, 일본군 역시 쇼카쿠가 대파되고 함재기 전력이 크게 줄어든다. MO작전의 책임자인 이노우에 제독은 이 전력으로는 포트 모르즈비를 점령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작전을 취소한다.

자세한 내용은 영어 위키피디아 산호해 해전 참조.

이후 1942년 7월 14일, 아오바의 제6전대는 제8함대의 일원이 되어 과달카날 전투에 참가하게 된다.

사보섬 해전[편집 | 원본 편집]

미 해군 역사상 최악의 참패

1942년 8월 8일 밤, 제8함대 기함 초카이, 아오바의 제6전대, 경순양함 유바리와 텐류, 카미카제급 구축함 유나기가 미군 함대를 습격한 전투. 유바리와 텐류와 유나기의 장비와 숙련도가 크게 떨어지는 데다, 엔터프라이즈가 제공권을 틀어쥐고 있어서 일본군에게는 승산이 없어보였지만, 어째서인지 일본군이 대승을 거뒀다.

이 전투에서 아오바는 8일 밤에 정찰기인 아오바 1호를 내보냈고, 아오바 1호는 한밤중에 불을 켜고 미 함대 위를 날아다니면서 정보를 수집, 8함대 지휘관인 미카와 군이치 제독에게 보고했다. 당연히 미군이 이걸 봤지만, 모두 미군기라고 생각했기에 아무런 반격을 취하지 않았다고(...) 정보를 보고받은 미카와 제독은 휘하 함선에 돌격을 명령했고, 미 함대는 약 30분만에 박살나버렸다. 같이 있던 오스트레일리아군 중순양함 캔버라도 함께 격침당했고, 일본군 제8함대는 초카이와 아오바가 소파된 걸로 끝.[1] 아오바는 이 당시에 어뢰발사관이 피격당했지만, 산소어뢰가 유폭하기 전에 불을 껐으므로 무사했다.

자세한 내용은 영어 위키피디아 사보섬 해전일본어 위키피디아 제1차 솔로몬 해전을 참조하자. 두 항목의 이름이 다른 이유는 미군과 일본군이 이 해전을 부르는 명칭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글로 된 내용을 보려면 #.

그러나 전투가 끝난 후, 제6전대는 귀환 도중 미군 잠수함의 습격을 받아 중순양함 카코를 잃었다. 일본군이 장악한 해역으로 빠져나온 후에 회피기동을 중단하고 정찰기 1대만 띄운 채 귀환하고 있었는데, 이때 미군 잠수함 S-44의 습격을 받았다고.

동부 솔로몬 해전[편집 | 원본 편집]

사보섬 해전의 참패로 과달카날에 고립된 미 해병대를 구원하고, 빼앗긴 제해권을 되찾으려는 미군과 그걸 막으려는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

제8함대 기함 초카이와 아오바의 제6전대는 제2함대 소속 제2수뢰전대(기함 진츠)가 호위하는 수송선들을 엄호하는 임무를 띠고 참전했으며, 해전에는 참가하지 않고 북쪽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해전 자체는 일본군의 우세로 끝났지만 나구모 주이치 제독은 항모를 철수시켰고, 제8함대와 제2수뢰전대는 제공권도 없이 과달카날로 수송선들을 데려가야 하는 처지가 된다. 일본군은 중순양함의 정찰기로 핸더슨 비행장을 야간공습하는 등 안간힘을 썼지만 제2수뢰전대 기함인 경순양함 진츠가 피격되고, 수송선 1척과 무츠키급 구축함 무츠키가 침몰하자 철수하고 만다. 아오바의 야간공습 이야기는 #.

해전에 대한 내용은 영어 위키피디아 동부 솔로몬 해전을 참조. 한글로 된 내용은 #

에스페란스 곶 해전[편집 | 원본 편집]

미 해군이 야간전에서 일본군에게 거둔 최초의 승리

1942년 10월 11일, 아오바의 제6전대는 후부키급 구축함 후부키, 하즈유키와 함께 과달카날로 향하는 일본군 수송함대를 호위하게 된다. 제6전대는 핸더슨비행장을 야간포격, 수송함대가 공습을 받지 않게 하려고 했으나 미군 정찰기가 일본군 수송함대를 발견했고, 미 해군 제64기동부대가 이들을 요격하기 위해 출발한다. 양측의 차이점은 미군에는 레이더가 있고, 일본군에는 레이더가 없었다는 점. 특히 미군의 경순양함 헬레나는 신형 SG레이더를 탑재했지만, 제64기동부대의 스코트 제독은 구닥다리 레이더를 장비한 중순양함 샌프란시스코에 좌승했다.

11일 밤, 미군은 정찰기를 발진시켰으나 이 중 한 대가 조명탄 발화사고로 추락한다. 이걸 발견한 제6전대의 고토 제독은 과달카날의 아군이라고 착각, 발광신호를 보내지만 응답은 없었다. 적일지도 모른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고토 제독은 이 주장을 무시했다. 덤으로 일본군 수송함대 지휘관인 조지마 소장도 22시 20분에 "이 부근에 적은 없다"는 보고를 보낸 상황. 그런데 이 보고를 보낸 후, 일본군 수송함대 위에 미군 비행기가 나타난다. 조지마 소장은 급히 적 발견 보고를 보내려고 했으나 실패.

23시 32분, 미군 경순양함 헬레나의 레이더가 제6전대를 발견했고 곧 보이스와 던컨의 레이더도 일본군을 포착했다. 23시 45분에는 헬레나와 일본군 사이의 거리가 4500m로 줄었고, 헬레나는 사격허가를 요청한다. 스코트 제독은 "무전을 받았다"는 의미로 Roger라고 답했는데, 헬레나는 "사격해도 좋다"는 말로 알아듣고 일본군 함대에게 발포한다. 다른 배들도 즉시 발포를 시작했고, 제6전대는 집중포화를 당한다. 이 포격으로 아오바는 큰 피해를 입었고 고토 제독도 중상을 입는다. 포탄이 불발탄이어서 피해가 더 커지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 그러나 스코트 제독은 아군 구축함을 포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23시 47분에 포격을 중지했고, 확인이 끝난 후인 23시 51분에 포격을 재개했다. 만약 스코트 제독이 헬레나의 레이더를 보다 효과적으로 활용했다면, 중간에 포격을 중지할 필요도 없이 제6전대를 괴멸시켰을지도 모른다.

4분의 여유를 얻은 제6전대는 급히 연막을 뿌리며 후퇴하기 시작했고, 미군의 포격은 아오바의 뒤를 따르던 후루타카에게 집중되었다. 후부키 역시 집중포격으로 침몰했지만, 키누가사와 하즈유키는 우선회를 한 아오바와 달리 좌선회를 했기에 미군의 포격을 피했고, 미군 경순양함 보이스를 포격으로 대파시키고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후루타카는 90발 이상의 포탄을 맞고 어뢰까지 맞았기에, 전투현장을 벗어난 후 곧 침몰했다.

이 해전에서 아오바는 40발 이상의 포탄을 맞고 2번 포탑과 3번 포탑, 사격지휘반, 통신시설, 함교 등이 박살났지만 기관부가 무사했기에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다만 고토 제독은 다리가 잘려나가는 중상을 입고 전사했으며, 중장으로 추서되었다.

이 해전은 와레 아오바로 유명하지만 미군 측에서는 일본군의 발광신호를 봤다는 이야기가 없으며, 승리의 원인으로 우수한 레이더를 꼽고 있다. 실제로 미 함대가 일본 함대를 먼저 발견했고, 헬레나의 SG레이더를 더 효율적으로 활용했다면 결과가 더 좋았을 거라는 게 미국 측 견해다.

일본측 견해는 좀 다른데, 레이더보다는 제6전대의 경계실패를 패배의 원인으로 꼽고 있다. 해전 이후 일본군 참모장인 우가키 마토베도 제6전대의 경계실패와 자만심을 질책하며 "제대로 싸운 건 키누가사 뿐이다"라고 발언했고, 과달카날에서 공방전을 펼치던 무렵에는 일본군의 견시가 미국의 레이더를 압도한 경우도 몇 차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타사파롱가 해전이 그 예.

어쨌든 미군은 일본군을 격파했지만, 일본군의 수송함대가 과달카날에 무사히 도착했으므로, 수송함대 호위임무 자체는 성공했다.

그리고 아오바의 불침함 전설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40발이 넘는 포탄에 맞았지만 상당수의 포탄이 불발탄이라서 살아남은 것. 수리 담당자는 "이게 다 터졌으면 분명히 격침되었을 거다"라고 말했으며,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격려도 받았다고.

자세한 내용은 영어 위키피디아 에스페란스 곶 해전일본어 위키피디아 사보섬 해전을 참조. 미군과 일본군 모두, 자신들이 참패한 전투를 사보섬 해전이라고 부르는 게 재미있다. 한글로 된 내용은 #

솔로몬의 늑대[편집 | 원본 편집]

구레로 돌아가 수리를 받은 아오바는 1943년 2월 24일에 트럭으로 돌아와 제8함대 직속으로 편입된다. 에스페란스 곶 해전에서 후루타카가 침몰하고, 과달카날 해전에서 키누가사가 격침되면서 제6전대가 해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43년 4월 3일, 아오바는 파푸아뉴기니의 카비엥에 정박했다가 미군 B-17의 야간폭격을 받았고, 배에 있던 산소어뢰 2발이 유폭하면서 대파되었지만 해안가로 기어올라가서 살아남는다. 이후 경순양함 센다이에게 예인되어 트럭으로 귀환한다.

칸코레 위키 아오바편에 따르면, 아오바는 대파된 후 섬으로 위장하고 버틴 덕에 미군에게 들키지 않았으며, 무사히 귀환한 후에는 불침 중순양함, 솔로몬의 늑대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산소어뢰가 폭발했으면 죽어야 하는데도 살아남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아오바는 1943년 11월까지 수리를 받았으며, 항공순양함이나 급유함으로 개장하는 계획도 검토되었지만 무산된다. 다만 엔진 문제로 최고속도는 25노트로 떨어졌고, 12월에는 16전대의 기함을 맡게 되었다. 16전대에 소속된 순양함은 묘코급 중순양함 아시가라, 쿠마급 경순양함 쿠마, 키타카미, 오오이, 그리고 나가라급 경순양함 키누이며 19구축대(시키나미, 우라나미)도 함께 행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쿠마는 1944년 1월 11일에 대잠훈련중 잠수함의 공격으로 침몰했고, 키타카미는 1944년 1월 말에 잠수함의 공격으로 어뢰 2발을 맞고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베허호 사건[편집 | 원본 편집]

1944년 2월, 남서방면 함대사령관 다카즈 시로 대장은 16전대에 인도양에서 통상파괴작전을 벌일 것을 명령한다. 다카즈 시로는 "쓸만한 정보를 가진 놈을 제외한 모든 포로를 죽여라"라고 명령했고, 16전대장 사콘조 나오마사는 여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원래는 16전대가 임무를 수행해야 하지만, 아시가라가 2월 25일에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므로 7전대 소속인 토네급 중순양함 토네와 치쿠마가 16전대(아오바, 키누, 오오이), 그리고 구축함 5척과 동행하게 된다. 이들은 2월 27일에 출항했으며, 3월 9일에 영국 기선 베허(Behar)호를 발견한다. 토네는 성조기를 게양하고 함수의 국화무늬를 숨긴 채 베허호에 접근했으며, 베허호가 무전으로 신호를 보내는 걸 파악하자 그대로 베허호를 격침시킨다. 베허호의 승조원 104명(108명이란 설도 있다)은 토네에 구조되었으나, 토네 승조원들은 이들을 밧줄로 묶고 온갖 학대를 가한다. 어쨌든 베허호가 무전을 보낸 시점에서 16전대의 존재가 연합군에 발각되었다고 판단한 사콘조 제독은 임무를 취소했고, 16전대는 3월 15일탄중 프리옥에 귀항한다. 포로 일부는 아오바에 옮겨졌고 전원이 포로수용소로 보내지지만, 토네에 남은 포로들은 3월 18일에 참수당했다.

전후에 16전대장 사콘조 나오마사와 토네 함장 마유즈미 하루오는 홍콩에서 재판을 받게 되는데, 마유즈미는 상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했고, 명령을 내린 다카즈 시로 대장은 전쟁 중에 병으로 죽었기에 사콘조가 책임을 지고 사형당한다. 그러나 일본어 위키에서는 3월 15일부로 토네가 16전대의 지휘를 벗어났으며, 포로 학살은 3월 18일에 일어났으므로 사콘조가 직접 학살을 지시하고, 마유즈미가 그 명령에 따랐다면 군령 위반이 된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마유즈미 하루오는 이런 짓을 하고도 고작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후 일본에서 잘 먹고 잘 살았으며, 토네 승조원들도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다.[2]

자세한 내용은 영어 위키피디아 인도양 통상파괴전일본어 위키피디아 베허호 사건을 참조하자.

혼작전(곤작전)[편집 | 원본 편집]

필리핀 해 해전의 전초전

1944년 6월에 파푸아뉴기니 근방의 비야크 섬에 증원병력을 보내기 위해 일본 해군이 실행한 작전으로, 아오바의 16전대가 작전을 주도했다. 다만 오오이는 이질환자가 발생했기에 불참.

1차 작전에서는 비야크섬으로 향하던 중 미군 항공모함을 발견했다는 보고로 인해 회항했지만 이 보고는 오보임이 밝혀졌고, 2차 작전에서는 구축함만으로 비야크섬에 돌입했지만 미군이 대함대를 이끌고 습격하는 바람에 대부분의 병력을 내리지 못하고 회항해야 했다. 이후 일본군은 3차 작전을 준비했지만, 미군이 사이판 섬을 공격하러 오는 것을 알고 작전을 취소했다.

자세한 내용은 일본어 위키피디아 혼작전 참조. 한글로 된 내용은 #을 참조하고, 비야크 섬의 일본군에 대한 내용은 영어 위키피디아 비야크섬 전투 참조.

오르목만 전투(다호작전)[편집 | 원본 편집]

혼작전이 취소된 후 필리핀 해 해전이 벌어졌고, 여기서 일본군은 칠면조 사냥을 당하며 참패한다.

1944년 7월에는 16전대 소속 경순양함 오오이가 격침되어 153명이 전사하고 368명이 구조되었으며, 1944년 9울 12일에는 16전대와 행동을 함께하던 19구축대 소속 구축함 시키나미가 격침되어 승무원 전원이 전사했다. 추가증원이 없었으므로 이 시점에서 16전대의 전력으로 남은 배는 구축함 우라나미, 경순양함 키누, 그리고 아오바 뿐이었다.

1944년 10월 11일에는 아오바와 키누가 충돌사고를 냈지만, 양쪽 모두 피해는 미미했다.

레이테 만 해전에서는 구리다 함대 소속으로 참가할 예정이었지만, 제2유격부대 소속으로 바뀌면서 수송임무를 맡게 된다. 아오바의 16전대(아오바, 키누, 우라나미)는 수송선 5척을 호위하며 10월 21일에 링가 정박지를 출발하지만, 10월 23일에 미군의 가토급 잠수함 브림에게 어뢰를 맞고 대파된다. 키누와 우라나미는 성공적으로 오르목만에 도착하여 병력을 상륙시켰지만 귀로에서 미군의 공습을 당해 둘 다 격침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이 작전을 반복해서 실시하는데, 이것이 바로 오르목만 전투(다호작전)이다. 자세한 내용은 영어 위키피디아 오르목만 전투일본어 위키피디아 다호작전을 참조하자.

아오바, 일본으로 돌아가다[편집 | 원본 편집]

아오바는 응급수리를 통해 5노트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지만, 레이테 만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미군은 10월 29일에 38기동부대로 공격을 가해온다. 아오바는 공습에서 살아남았지만 더 이상 마닐라에 머물 수 없었고, 모가미급 중순양함 쿠마노와 마타 31 수송선단과 함께 일본으로 탈출한다. 그러나 중간에 (가토급 잠수함 브림도 포함된) 미군 잠수함들의 습격을 받았고, 미군 잠수함들은 23발의 어뢰를 날린다. 쿠마노는 2발의 어뢰를 맞고 대파되었지만, 23발의 어뢰 중 아오바에게 명중한 건 한 발도 없었다. 칸코레 위키 아오바편에서는 7발의 어뢰가 아오바를 노렸지만 전부 다 피했다고 자랑하고 있는데, 정말로 7발이 아오바를 노렸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23발 중 한 발도 안 맞은 건 사실이다. 어쨌든 아오바는 살아남았지만, 쿠마노를 인양할 능력이 없었기에 인양능력 없음. 실례라는 통신을 보낸 후 수송선단과 함께 이탈한다. 쿠마노의 항해사가 남긴 증언에 따르면, 아오바로부터 인양능력 없음. 먼저 실례라는 발광신호가 날아왔다고. 당연히 쿠마노의 생존자들은 전후에도 이 이야기를 화젯거리로 삼았다고 한다.

칸코레 위키 아오바편에서는 양쪽 모두 서로를 격려하며 헤어졌다고 한다. 5노트로 기어가는 아오바에게 인양을 요구하는 게 무리인 것도 사실이니,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건 전문 마지막에 붙은 "실례"(...)

칸코레 위키 아오바편에 따르면, 이후 아오바는 가오슝에 도착해서 연료보급을 요청하지만, "후퇴하는 배에게 줄 연료는 없다"며 거절당했다고 한다. 승조원들의 불만과 함장의 설득으로 겨우 연료를 얻어내고, 엔진을 수리해서 12노트를 낼 수 있게 된 후, 아오바는 일본을 향해 출항했다고.

어쨌든 아오바는 12월 12일, 구레에 입항한다. 전후생존함이라는 묘코급 중순양함 묘코도, 타카오급 중순양함 타카오도 해내지 못한 일본으로의 귀환을 아오바는 성공시킨 것이다. 아오바 외에 일본에 귀국하는데 성공한 중순양함이라면 토네급 중순양함 토네도 있으나, 일본어 위키피디아에도 나와 있듯 토네는 서류상으로 경순양함으로 분류되었기에 아오바는 살아서 일본에 돌아온 유일한 중순양함이 되었다.

구레 군항 공습[편집 | 원본 편집]

겨우 살아서 돌아왔지만, 일본군은 아오바를 고칠 수 없다며 예비함으로 지정한다. 이후 1945년 4월 24일에 미군이 구레에 공습을 가하면서 아오바는 폭탄 1발을 더 맞았고, 그 후에는 수심이 얕은 곳에 정박해서 대공포 진지로 개조된다. 이 과정에서 25mm 대공기관포를 추가로 장비했으므로, 25mm 기관포의 수는 50문에 이르렀다. 그러나 구레에 정박한 일본군 군함 대부분은 대공포를 철거하여 육상으로 옮겼기에, 아오바를 도울 군함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가이텐 모함 키타카미가 대공포진지로 개조되긴 했어도, 이걸로 미군의 공습을 막기엔 턱도 없었다.

1945년 7월 24일, 미군은 구레를 대대적으로 공습했고 아오바는 폭탄을 맞고 착저한다. 그러나 미군은 확실한 파괴를 위해 7월 28일에 다시 공습을 감행했고, 아오바는 4발의 폭탄을 더 맞는다. 이 공습은 미 해군 역사상 최대 규모였고, 구레에 있던 일본군의 대형함 이세, 하루나, 오요도 등이 격침된다. 살아남은 배는 2000파운드 폭탄을 맞고 중파된 운류급 항공모함 가츠라기, 전손 판정을 받고 폐선으로 여겨진 항공모함 류호, 너무 낡아서 훈련함으로 사용되는 항공모함 호쇼, 24일의 공습 이후 모든 승조원들이 탈출해버린 운류급 항공모함 아마기, 전쟁 기간 내내 쓸모가 없었던 데다 공습으로 대파된 가이텐 모함 키타카미, 구축함들, 그리고 아오바였다. 함재기가 없어서 오래 전에 깡통으로 전락한 항공모함들을 제외하면, 아오바는 구레에 남은 마지막 대형 수상전투함이 된 것이다.

그러나 미 육군 항공대가 79대의 B-24를 출격시켜 아오바를 공습했다. 아무리 미 해군의 공습을 전부 견뎌낸 아오바라고 해도 침몰 직전의 중순양함 1척이 미 육군 항공대의 공습까지 전부 막는 건 불가능했고, 결국 아오바는 폭탄 4발을 더 맞고 격침되고 만다. 일본어 위키에는 함미 절단, 함내 만수, 대파착저라고 기재되어 있지만, 그런 게 바로 격침이다. 이 공습에서 B-24 2대가 격추되고 14대가 손상을 입었지만, 이 피해가 아오바에 의한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아오바가 격침되면서 구레 군항 공습도 막을 내렸고, 일본 해군은 괴멸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구레 군항 공습 참조.

전후[편집 | 원본 편집]

전후 아오바는 해체되었으나, 아오바의 함수에 있던 국화문양은 해상자위대 제1기술과학교에, 주포 부품은 해사 역사 과학관(야마토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구레 군항 구 해군묘지와 공원에는 아오바의 위령비가 건립되어 있다.

대중매체의 아오바[편집 | 원본 편집]

전쟁 중의 구레를 다룬 이 세계 한구석에라는 작품의 선전 포스터에 아오바가 나온다. 그런데 제목이 왜 와레 아오바냐

월드 오브 워쉽 게임에도 일본군 중순양함 6티어로 나온다.

함대 컬렉션에서는 민폐 개그함으로 나온다. 아오바 (함대 컬렉션) 참조.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등장인물인 아오바 시게루의 이름은 아오바에서 따온 것이다.

각주

  1. 한밤중에 불을 켜고 미 함대 위를 날아다닌 정찰기가 누구인지는 영문 위키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관련 이야기는 과달카날 전투를 다룬 서적인 '핸더슨 비행장'에도 실려 있을 정도로 유명하고, 칸코레 위키 아오바 항목에서는 이 전투에서 보여준 아오바 1호기의 창의적인 정찰을 크게 찬양하고 있으며, 8일 밤에 아오바와 함께 정찰기를 내보낸 초카이, 카코 항목에는 정찰을 잘했다는 내용이 전혀 없다. 따라서 문제의 정찰기는 아오바 1호기라고 해석했다.
  2. 국내에 발간된 '해상학살'이라는 책에 베허호 사건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토네 승조원들이 처벌다운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나와 있다. 토네가 16구축함전대 소속이라는 오류를 범하고 있으므로 책의 내용은 좀 가려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으나, 영어 위키피디아와 일본어 위키피디아에도 토네 승조원들이 처벌을 받았다는 내용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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