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언진

申彦眞. 이명은 신현기(申鉉琦).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04년 2월 2일 전라북도 옥구군(현재 군산시) 회현면 고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한학을 공부한 뒤 서울로 올라와 동대문 밖 고학당(苦學堂)에서 수학하면서 청년운동과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1929년 5월 군산청년동맹(群山靑年同盟)의 상무서기(常務書記)로 활약하였고, 이 때부터 이명수(李明壽)와 교류하면서 사회주의에 심취했다. 이어 1929년 8월 고향인 옥구 대야면에서 야청년회(大野靑年會)를 조직하여 서무부 간부의 일을 맡았고, 이를 바탕으로 동년 11월에는 옥구청년동맹창립준비위원회의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30년 3월 김제와 군산에서 노동운동에 대한 실천적 방도를 모색하였으며, 1930년 6월에는 군산철도노동회(群山鐵道勞動會)를 중심으로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노동파업을 지도했다. 그러던 중 1930년 7월 28일 일제로부터 체포령이 떨어진 이명수를 은닉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이 일로 재판에 회부된 그는 1932년 1월 27일 전주 지방 법원에서 소위 범인 은닉 혐의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신언진은 출옥 후에도 노동 운동에 가담했지만, 1933년 6월 16일 다시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1934년 3월 31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1] 이에 불복해 공소하였으나 1934년 11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2] 이후 옥구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8년 4월 2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신언진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7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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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