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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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哲(또는 宋喆). 본명은 송휘규(宋彙圭).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6년 1월 23일 전라북도 금산군 부리면 양곡리에서 송학운(宋學運)의 7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송학운은 동학에 입도해 동학 농민 혁명에 가담한 적이 있었다고 하며, 이후 기독교로 개종했다. 송철은 서당을 다닌 뒤 사립 기독교 학교인 금산 심광학교에 입학했고, 이후 전주 신흥중학교와 군산 영명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인 신흥중학교에서 수학, 물리학을 가르쳤다. 신흥학교 재학 중인 1911년 이승만의 강연을 듣고 크게 감명받았으며, 1916년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중국 상하이를 거쳐 1917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때 그는 하와이에서 이승만을 만났고, 이후로는 줄곧 이승만을 추종했다.

미국에 도착한 후 스탁톤의 농장에서 일하다가 1919년 소작농식으로 벼농사를 지어 성공했으나 그 다음해 홍수로 손해보고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였다. 파사데나시의 폴리테크닉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U.C.L.A, 버클리대학 등에서 전기수력학을 전공하였다. 이후 김용중과 함께 김형제상회의 상품을 판매하다가 김송위탁판매소를 설립해 크게 성공하였다.

한편 그는 이승만이 주도하던 대한인동지회(大韓人同志會)에 가입, 적극적인 활동을 펼쳐 나갔다. 특히 1929년 여름에는 뉴욕·시카고·로스앤젤레스·몬타나·오레곤 등지의 5개 지부 대표가 로스앤젤레스에서 회합,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北美總會)를 결성할 때, 이살음·임병직(林炳稷) 등과 같이 로스앤젤레스 대표로 이 회합에 참석하였다. 그는 하와이의 동지회에서 독립하여 별도로 조직된 동지회 북미총회에서 시종일관 재정 분야를 담임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살음·박호근의 뒤를 이어 총회장을 역임하는 등 북미총회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1941년 4월, 송철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해외한족대회를 통해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결성되고 로스앤젤레스에 집행부가 구성되자 집행부의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또한 1942년 2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가 한인국방경위대로서 맹호군(猛虎軍)을 조직하였을 때, 참위(參尉) 계급으로 주계과(主計科)를 맡아 재정문제를 담당하였다.

1943년 4월에는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 회관을 마련하고 기관지인 속쇄판 <북미시보(北美時報)>를 발행했고, 1944∼1945년에는 3회에 걸쳐 독립금 3백 원을 출연하였으며, 1945년 7월에 열린 제1회 동지회 미국대표대회에 몬타나지방 대표로 참석하였다. 8.15 광복 후에는 이승만의 활동 경비를 조달했으며, 1956년 5월에 귀국해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했다. 또한 대한인국민회를 대표하는 김호와 함께 현재 한인회관의 전신인 한인센터를 설립하였고, 1972년 무궁화한국학교를 설립하여 2세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데에도 힘썼다.

1985년 <송철 회고록-미주 이민사와 동지회의 생생한 증언>을 출간했으며, 1986년 2월 27일 93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그의 유해는 캘리포니아 잉글우드 묘지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4년 송철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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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