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바이 단란주점 살인 사건

사바이 단란주점 살인 사건
사바이 단란주점.jpeg
사건 수사중인 사바이 단란주점의 모습
사건 정보
날짜 1998년 6월 14일
장소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 사바이 단란주점 (서울 강남구 논현로 825 지하)
원인 살인
인명피해 사망 3명
부상 1명

개요[편집 | 원본 편집]

사바이 단란주점 살인 사건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의 사바이 단란주점에서 3인조로 추정되는 범인들이 단란주점 안에 있던 여주인과 손님 2명을 살해하고 손님 1명에게 중상을 입힌 후 달아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사건 발생 25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미제 사건으로 남아있다.

사건 과정[편집 | 원본 편집]

멕시코대한민국1998 FIFA 프랑스 월드컵 첫 번째 경기가 있던 1998년 6월 14일 새벽 2시 30분경. 그 날은 사람들이 온통 월드컵 경기에만 집중했던 때인지라 길거리에 인적이 드물었다. 워낙에 우리나라가 첫 번째로 붙는 경기이기도 하다보니 사람들이 월드컵 경기에만 시선을 몰았던 것이다.

당시 택시기사로 일하던 한 씨는 그 날 자신의 택시를 타고 조금이라도 있는 손님을 태우기 위해 신사동 일대를 돌아다니던 참이었다.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사바이 음식점 옆에 있는 '사바이 단란주점' 앞을 지나던 중, 한 씨는 단란주점의 계단에서 하의를 완전히 발가벗은 채 피를 흘리며 손을 흔드는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하였다. 그녀는 바로 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 최 씨였는데, 발견 당시 목과 배 부분에 칼에 찔려있는 듯한 흔적이 있었고, 한 씨가 그녀에게 다가갔을 때, 그녀는 힘겹게 아래의 단란주점에서 사건이 터졌음을 택시 기사에게 알리고, 이후 경찰에 신고하게 된다.

신고를 받고 사바이 단란주점으로 출동한 경찰은 지하의 단란주점으로 바로 진입을 했고, 눈앞에 펼쳐진 끔찍한 광경에 말을 잃고 말았다. 여주인이 씨와 택시기사로 일하던 그녀의 친구 고 씨, 마지막으로 생존자 최 씨의 친구 김 씨, 이렇게 총 3명이 참혹한 모습으로 피를 철철 흘리며 사망해 있었기 때문.

s 시신의 상태를 설명해보자면 여주인 이 씨의 경우 허벅지와 등에 칼에 깊숙이 찔린 듯한 흔적이 있었으며, 매우 참혹했던 건 그녀의 입 가장자리로는 무려 13cm 가량의 칼로 찢겨져 나간 흔적이 있었다. 택시기사 고 씨는 몸 곳곳에 무려 17군데나 칼에 찔린 상태였고, 여기저기에 베인 흔적도 시신에서 발견되었다. 김 씨의 경우 가장 끔찍한 모습의 시신으로 발견이 되었는데, 목이 12cm의 길이로 깊게 베이다 못해 잘리기 직전이었으며, 그녀의 얼굴에는 누군가 힘주어 밟은 듯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사건 발생까지의 상황[편집 | 원본 편집]

당시 단란주점에는 총 7명이 있었다. 앞서 언급한 최 씨와 김 씨, 여주인 이 씨와 택시기사 고 씨, 그리고 범인 3명. 전날 11시경까지 가게를 보던 여주인 이 씨의 언니의 증언에 따르면 범인으로 보이는 3명은 사건 발생 이전인 6월 13일 오후 10시쯤, 이 곳 사바이 단란주점에 들어왔고, 룸으로 들어가 1병의 양주와 과일을 주문하여 먹었다고 한다.

이후 오후 10시 20분쯤, 피해자 최 씨와 김 씨가 친구끼리 맥주를 마시기 위해 단란주점으로 들어왔고, 그녀들은 범인들이 쓰던 방 바로 옆방으로 들어가 주문한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떤다.

여주인 이 씨가 가게를 보던 자신의 언니와 교대한 시간은 13일 오후 11시쯤, 언니가 마지막으로 가게를 나간 시간은 오후 11시 50분쯤이였다. 이 씨의 언니가 마지막으로 가게를 나갈 때 들었던 소리에 대해 증언을 남겼는데, 범인으로 보이는 3명은 이 씨의 언니가 나가는 그 순간까지도 가수 최유나의 '흔적'을 열창하고 있었으며, 목소리는 여느 평범한 남성들처럼 그저 이상할 게 없는 목소리였다고 한다. 그 외에도 범인들은 1998년 당시 유행했던 '장난감 병정'이라던지, '문 밖의 그대' 등의 노래들을 열창하였다. 후에 이 씨의 언니가 자신의 생각을 인터뷰했는데, 이렇게 차분한 노래를 부르던 그들이 이러한 끔찍한 범행을 저지를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한다.

당시 단란주점에 있던 7명이 모두 현장에 있었던 시각은 택시기사 고 씨가 월드컵 시청을 위해 단란주점에 들어왔던 6월 14일 오전 12시부터였다. 그는 대한민국이 치르는 첫 번째 경기의 근황이 궁금했던 것인지 잠시 월드컵 좀 보겠다며 단란주점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당시 현장에 있던 7명이 모두 채워지게 된다.

이 때까지만 해도 단란주점은 그저 평화롭고 노랫소리로 흥이 넘치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 아무도 잠시 후에 벌어질 참혹하고 잔인한 일들을 예상하지 못한 채.

사건 발생 당시의 상황 (생존자 최 씨의 증언)[편집 | 원본 편집]

천만다행히도 생존자가 존재했기 때문에 사건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생존자였던 최 씨는 13일 오후 10시 20분경, 자신의 친구 김 씨와 함께 수다를 떨기 위해 사바이 단란주점으로 들어왔고, 그녀는 범인들이 쓰던 바로 옆 방에서 김 씨와 함께 술을 마시며 얘기를 하던 참이었다.

그렇게 한창 술을 마시며 수다를 떨던 도중, 여주인 이 씨가 김 씨와 최 씨에게 범인들과의 합방을 제안하게 된다. 원래 단란주점이라는 곳이 서로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합방을 자주 하는 장소이다 보니 이러한 상황이 그렇게 이상할 것 없었고, 둘은 범인들의 방으로 합방을 하면서 범인들의 얼굴을 처음으로 목격하게 된다. 이후 범인들과 합방하여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던 둘은 시간이 지나면서 뭔가 꺼림칙하고 섬뜩한 기운도 들고 점점 재미도 떨어지자, 그들과 헤어져서 다시 자신들의 방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최 씨가 두 번째로 목격자들을 마주한 것은 방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잠시 방에서 나왔을 때, 범인들과 여주인, 택시기사 고 씨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진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물론 최 씨는 자신과는 전혀 상관 없는 일이었기에 이내 관심을 끄고 화장실을 갔다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방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3명의 용의자들이 여주인 이 씨와 택시기사 고 씨를 끌고 방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당시 고 씨와 이 씨는 손이 묶인 상태였으며, 범인들은 이 씨와 고 씨를 발로 차면서 방 안으로 넣었다고 한다. 당시 여주인 이 씨는 "살려주세요"를 연발하며 범인들에게 호소하였고, 택시기사 고 씨는 "말로 해결합시다"라며 범인들을 진정시키려 노력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김 씨와 최 씨가 보는 바로 앞에서 범인들은 이들을 칼로 극악무도하게 살해하게 된다. 당연히 최 씨와 김 씨는 영문도 모른 채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고, 이 때, 범인들은 김 씨가 당시 목에 걸고 있던 금목걸이를 자신들에게 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김 씨는 이를 거절하였고, 이에 분노한 범인들은 김 씨의 목을 칼로 난행한 뒤 그녀의 머리를 발로 짓밟아 잔혹하게 살해하게 된다.

당연히 최 씨 역시 목과 배 부위를 칼에 찔렸으며, 당시 최 씨는 배에 칼을 맞는 즉시 엄청난 고통과 함께 정신을 잃어 목에 칼을 맞은지도 몰랐다고 한다. 어쨌든 다행히 최 씨는 그나마 피해를 적게 입어 살 수 있었으며, 범인들이 나갈 때까지 계속 죽은 척을 했다고.

범인들은 이후 한 명씩 발로 툭툭 차보면서 죽은 것이 확실한지 확인하였고, 최 씨의 진술에 따르면 서로 증거를 남기지 않았는지 확인하였다고 한다. 이후 범인들은 서둘러 단란주점을 빠져나가게 되고, 최 씨가 힘겹게 지상으로 올라가 택시기사 한 씨를 통해 이 사건을 경찰에 신고하게 되면서 수사가 시작된 것이다. 최 씨가 말에 따르면 범인들이 "우리도 직장을 잃어서 아줌마(여주인 이 씨)와 같은 처지이다. 우리가 이렇게 안 변하게 했으면 좋았잖냐"라며 그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이로 보아 범인들은 생활고를 겪고 있었기에 무언가를 훔치려던 것으로 추정이 되며, 실제로 김 씨에게 금목걸이를 요구했다는 점, 여주인과 손님들의 소지품 중 현금과 카드 등이 다수 없어졌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가능성은 더욱더 높아진다.

사건 현장의 상황[편집 | 원본 편집]

아래 사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워낙에 잔혹하고 극악무도했던 사건이었기에 사건 현장도 굉장히 어수선하고 정신이 없었다. 또한 범인들이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별의 별 짓을 다 해놓고 갔기 때문에 바닥 역시 온통 난장판이었다.

3명의 피해자들은 무려 케이블 타이로 손이 결박된 채 시신으로 남아 있었으며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이름이 없는 ref 태그는 반드시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화장실의 세면대는 배수구가 막힌 채 물이 틀어져 있어 물이 넘치면서 피해자들의 피와 섞여 바닥이 온통 흥건한 상태였다. 바닥에는 깨진 접시 조각과 유리컵 조각들이 온통 나뒹굴고 있었으며, 더욱더 참혹했던 것은 피해자들의 머리카락이 잘려져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아무리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다 쳐도 이렇게 번거롭고 오랜 시간이 드는 작업을 굳이 왜 했는지는 아직까지도 큰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카운터의 수화기가 전화기로부터 분리되어 있었고, 카운터에는 무언가 급하게 뒤진 듯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경찰은 이 사건을 강도살인, 즉, 강도범들의 소행이라고 추측하게 되고, 또 하나의 예로, 택시기사 고 씨의 바지 주머니가 칼로 찢긴 듯이 뜯겨나가져 있었는데, 누가봐도 강도짓을 하려다 제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흔적으로 보였다. 카운터에서 역시 금품과 현금, 카드 등이 싸그리 없어졌고, 후에 생존자 최 씨의 증언에서 그들이 생활고에 시달리던 것을 알게 되면서 이 사건은 강도범들의 소행, 즉 강도살인사건으로 판명이 났다.

범인들이 남겨놓은 잔해들[편집 | 원본 편집]

그런데 범인들도 참으로 꼼꼼한 인간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 행여나 지문이 묻었을지 모르는 유리컵이나 접시들을 전부 잘게 깨트려 바닥에다 뿌려놓았으며, 단란주점 룸 내의 바닥에 자신들의 DNA 증거가 될 만한 혈흔 등이 행여나 남아있을까, 화장실과 보조 주방의 수도꼭지를 틀고 배수구를 잠가 룸 바닥을 흥건하게 적셔 피해자들의 혈흔과 섞이게 해놓았다. 위 문단 맨 위의 사진처럼 당시 사건의 현장이 그토록 정신없게 되어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고 말이다.

그들은 이렇게 증거를 모두 인멸하고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대로 현장을 나섰다. 물론 시신의 상태도 그랬지만 그들이 남겨놓은 이러한 수많은 잔해들은 사건 현장의 참혹함을 더욱더 키우는 데에 한 몫 했다. 어쩌면 앞서 언급한 피해자들의 머리카락을 모조리 잘게 잘라서 바닥에다가 뿌려놓은 행위도 증거를 인멸하려던 의도와 관련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볼 수 있겠다. 그들이 피해자들의 머리채를 잡고 돌아댕겼다고 가정하면, 피해자들의 머리카락에서 그들의 혈흔 등 흔적이 발견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머리채를 안 잡고 다녔으면 말고

사건의 수사[편집 | 원본 편집]

경찰은 이 사건이 일어난 시각을 6월 14일 새벽 1시 30분에서 2시 30분까지로 보았다. 여주인 이 씨의 언니가 이 씨에게 안부전화를 건 것이 새벽 1시 30분이었고, 이 때까지만 해도 단란주점 안의 분위기는 그저 차분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 그리고 지나가던 택시기사 한 씨가 피범벅이 된 생존자 최 씨를 발견하고 신고한 것이 새벽 2시 30분이었기에, 범행은 1시 30분부터 2시 30분까지 1시간 내에 벌어졌다는 말이 된다.

당시 단란주점 안에 있던 사람들은 피해자 4명을 포함하여 범인 3명까지 불과 7명. 월드컵으로 전국민이 열광하던 시절이었던지라 단란주점에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있었다. 당연히 단란주점을 방문한 사람들 중 4명을 제외한 3명이 범인이란 말이므로 경찰은 당시 범인을 쉽게 검거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물론 단란주점 안의 남아있던 3명이 범인이라는 것만 가지고 범인을 쉽게 검거하리라 확신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 범인들은 너무나도 많은 지문들을 현장에 남기고 갔다. 현장에서 경찰이 발견한 지문만 40개 가량 되며, 지문을 그렇게 멍청하다 생각이 될 정도로 많이 남겨놓았기에 경찰은 이 지문을 이용해서 분명히 빠른 시일 내에 범인을 검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찰들의 예상 외로 범인들은 쉽게 꼬리를 잡혀주지 않았다. 우선적으로 범인들에게 가장 큰 적인 CCTV가 당시에 그렇게 많이 보급되지가 않았다. 1998년 당시만 하더라도 CCTV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았으며,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1998년 당시 보급되던 CCTV가 수사에 큰 도움을 줄 만큼 성능이나 화질이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그 날은 우리나라가 월드컵 첫 번째 경기를 치르고 있던 때이고, 더군다나 사건이 발생한 추정시각은 한참 많은 사람들이 월드컵에 열광하고 있었을 시간이었기 때문에 거리에 인적이 드물었고, 목격자도 당연히 없었다. 물론 CCTV가 없더라도 경찰이 현장에서 40여개나 되는 지문을 발견하였으므로 충분히 범인을 잡을 수 있지 않았겠느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국과수 의뢰 결과, 대조 가치가 있다고 판명이 난 지문은 40여개 중 고작 8개. 그런데 그마저도 대조 결과 단란주점의 주인 및 종업원의 것들로 밝혀졌다. 또한 앞서 언급했듯이 범인들이 증거 인멸을 위해 자신들의 지문이 묻었을 것으로 보이는 유리컵과 접시 등을 모조리 깨뜨려 놓았기 때문에 그 외의 지문 감식은 당연히 이뤄질 수 없었다. 더구나 요즘 시대였다면 과학 기술이 뛰어났을테니 그 대조 가치 없는 지문들이나 죄끄만 유리조각에 붙은 지문을 서로 이어붙여서라도 당연히 범인들을 잡을 수 있었겠지만, 90년대 당시에는 과학수사 기술도 미흡했던지라..

경찰은 유일한 생존자였던 최 씨에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당시 상황을 물어봤고, 그녀의 증언을 얻어 범인들이 잘 불렀던 노래[2], 범인들의 체격 또는 인상착의 등을 얻어내는데에 성공한다. 천만다행히도 최 씨는 범인들과 합방을 했던 이력이 있었기에 범인들 중 한 명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으며, 경찰은 그녀가 설명한 인상착의와 체격, 잘 부른 노래 등을 토대로 위 사진처럼 몽타주를 만들었다. 참고로 최 씨가 자세히 얼굴을 보았던 범인은 용의자 '갑'에 해당하는 얼굴이었다고 한다.

범인과 범행 동기에 관한 여러 가설[편집 | 원본 편집]

상당히 크고 잔혹한 사건이었다보니 범인과 범행 동기에 관한 여러 가설이 쏟아졌다. 이 중에는 청부살인이라는 가설이 있기도 했는데, 사실 이 단란주점의 여주인 이 씨는 남편과 이혼한 이혼녀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와 택시기사 고 씨가 매우 친한 관계를 유지하며 지내자, 일각에서는 이 씨의 남편이 이에 대해 불륜 관계로 의심했다거나 화가 나서 사람을 보내 고 씨와 이 씨를 살해한 것이 아니냐는 얘기가 쏟아져 나왔다.

이 씨의 전 남편이 범인이라는 가설은 겉으로만 들으면 의외로 신빙성이 있어 보였으나, 결국 이 씨의 전 남편은 용의선상에서 제외되었다. 1998년이면 IMF를 겪고 있던 때라 그도 상당한 경제난을 겪고 있었는데, 자신의 생업을 챙기지도 못할 망정 어느 누구가 경제난을 겪고 있던 와중에도 그 비싼 살인 청부업을 시켜서 이들을 살해할 것이냐는 반론이 제기된 것. 물론 그가 살인 청부업자를 쓸 수 있을 정도의 돈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기에 결국 이 씨의 남편이 범인일 가능성은 매우 낮아지게 되었다.

이 사건은 생존자의 증언에서 범인들이 자신들의 생활고를 피해자들에게 호소했다는 점, 여러 귀금속과 현금, 카드 등이 없어졌다는 점에서 누가봐도 강도 살인으로 보였으나, 또다른 가설로는 범행이 우발적으로 발생한 범행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주장도 가능성이 없지는 않은 게 물론 카드와 현금, 일부 귀금속 등이 없어지기는 했지만, 범인들은 고 씨가 차고 있던 금손목시계, 다른 피해자들이 차고 있던 금반지 등 여러 귀금속들을 가져가지 않았다. 이에 범인들이 범행을 우발적으로 저지르고는 강도의 소행으로 위장하기 위해 카운터의 카드와 현금, 일부 귀금속들을 가지고 도주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사건이 우발적으로 발생했다고 보기에는 강도의 흔적이 있다는 것을 제외시키더라도 무리가 있다. 우선 생존자 최 씨의 증언에서 범인들이 가지고 있던 칼이 매우 길고, 얇았다는 점, 그리고 피해자들의 몸에서 발견된 자창 등을 통해, 범행 도구는 다름 아닌 회칼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또한 피해자들의 손도 전선 설치 기사가 주로 가지고 다니는, 일반인들이 가지고 다닐거라 생각하기 어려운 케이블 타이를 사용하여 묶어놨다. 도대체 어느 일반인이 낚시를 가는 것도 아니고 단란주점을 가는데 회칼을 소지하고 다니며, 어느 누가 경찰도 아니고 돌아다닐 때 주머니에 케이블 타이를 항상 소지하겠는가? 단란주점의 주방에서 그렇게 긴 회칼을 쓴다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고, 이에 회칼은 범인들이 미리 준비해온 범행도구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케이블 타이 역시 정상적인 일반인이 태연하게 항상 소지하고 다닐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렵기에 결국 이 사건은 계획적으로 저질러진 강도 살인일 확률이 훨씬 높다. 물론 미제 사건이기도 하고, 어떻게 어떻게 상황이 겹쳐 우발적인 범행임에도 그런 흔적이 남았을 가능성이 없다고 장담은 못하기에, 이 점은 아직까지 이 사건의 큰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범인 검거 소동[편집 | 원본 편집]

경찰은 최 씨의 증언을 토대로 만들어진 몽타주를 준비하여 전국에 무려 10만여장의 몽타주를 뿌렸다. 또한 공개 수사 체제로 진행되던 지라 각종 방송 매체에서도 범인의 모습에 대한 몽타주가 공개되며, 이 때부터 각종 추리 전화며 몽타주 속 범인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봤다느니 범인을 찾았다느니 하는 제보 및 신고 전화가 경찰서로 마구 빗발쳤다.

그러던 어느 날, 경찰은 한 통의 제보 전화를 받고 마침내 범인으로 추정되는 용의자 한 명을 검거한다. 신기하게도, 이 용의자는 몽타주의 범인들 중 '을'의 모습을 그대로 찍어낸 건지 의심될 정도로 굉장히 닮았던 것이다. 어느 정도였냐면, 당시 범인들의 얼굴을 목격한 여주인 이 씨의 언니가 이 사람이 분명하다고, 그 때 왔던 그 사람 중 한 명이 확실히 맞다고 확신을 하면서 얘기할 정도였다.

여주인 이 씨의 언니는 이 사람이 분명히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온갖 쌍욕을 퍼부으면서 자신의 동생을 왜 살해했냐며 마구 따졌다. 그렇게 드디어 범인 1명을 검거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확신이 들었고, 이제 그 1명에게 수사를 진행하여 남은 2명의 범인만 검거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잡혀 온 용의자라는 사람이 이 씨의 언니가 자신에게 쌍욕을 퍼붓고 경찰들이 자백을 요구하자,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태도를 보였다. 당연히 사건에 대해서도 완강히 부인을 했고,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모른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는 연기라고 보기에도 어려울 정도로, 정말 사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경찰은 미제 사건을 질질 끌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건지, 해당 용의자에게 억지로 진술을 하라고 강압적으로 수사를 진행한다. 너무나도 억울했던 용의자는 끝까지 사건에 대해 완강히 부인했지만,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고, 결국 경찰의 협박에 이기지 못해 자신이 죽인 것이 맞다고 허위 자백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이 용의자는 용의 선상에서 벗어나게 된다. 자신의 형과 함께 축구를 보고 있었다는 증거가 입증이 된 것인데, 물론 형의 진술도 진술이지만 이 용의자는 몇시 몇분 몇초에, 누가 골을 넣었는지, 당시 경기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는지 전부 다 기억을 하고 있었다. 이 사건은 월드컵 경기가 중계되고 있던 와중에 일어난 사건인지라, 결국 이 사람을 범인으로 보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었고, 결국 경찰은 이를 석방하면서 사건 수사 중 하나의 해프닝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공소시효 만료로 미제 사건으로 남다[편집 | 원본 편집]

경찰들은 앞의 해프닝을 금세 잊고 끝까지 사건의 열쇠를 찾기 위해 노력을 했지만, 1998년의 사건인지라 CCTV도 없었고,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쪽지문 몇 개와 생존자 최 씨, 그리고 이 씨의 언니가 기억하는 당시의 상황을 빼고는 범인을 찾을 만한 단서가 너무나도 부족했다. 물론 지금 시대였다면 범인은 금세 꼬리를 잡혔을테지만, 90년대의 기술은 지금이랑 너무 달랐던지라.. 게다가 범인들이 워낙 치밀한 성격이라 자신들의 흔적이 될 만한 것들을 거의 다 제거해버렸고, 결국 사건은 크나큰 미궁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경찰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2013년 6월 14일, 공소시효가 만료됨으로써, 이 사건은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당연히 이제 와서 범인이 자수하거나 꼬리를 잡힌다고 해도 이 사건과 관련해서는 어떠한 처벌도 내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알고싶다의 방영분의 마지막에도 나와있듯이, 담당 형사는 "공소시효는 만료되었지만 수사는 계속 진행중"이라며 "범인에 대한 제보를 계속 기다리고 있다"고 밝혔다. 현재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경찰관들은 미제 사건을 끝까지 해결하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하고, 재수사를 시도하고 있다. 비록 처벌은 할 수 없겠지만, 사건에 대한 오랜 미스테리가 풀린다는 것이 의미가 매우 큰 것이므로, 사건에 대해 뭐라도 알고 있는 사람은 '서울지방경찰청 중요미제사건수사팀'[3]에 제보해보면 어떨까.

여담[편집 | 원본 편집]

  • 사건을 한창 수사중이었던 1998년 9월 24일 오전 1시경, 강남구 역삼동 일대에서 용의자들이 탑승한 것으로 의심되는 승용차를 미행하던 당시 경사 계급이었던 박 씨가 미행 오토바이로 미행 도중 불법주정차 차량과 사고가 발생하여 숨지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 사건 발생 이후 2009년, 여주인 이 씨의 아들이 참변을 당한 엄마에 대한 그리움 속에 살다가 결국 자살했다고 밝혀지면서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아들은 2009년의 어느 날 힘겹게 친구에게 1998년의 사건을 얘기하면서 엄마가 보고싶다고 얘기했고, 다음 날, 결국 엄마 곁으로 떠나갔다고.
  • 2001년에도 이 사건과 비슷한 성격의 울산 단란주점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같이보기[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사바이 단란주점의 구조를 모형으로 나타낸 것으로, 좌측 맨 위쪽에 있는 방이 당시 피해자 중 최 씨와 김 씨가 쓰던 방이었고, 그 바로 오른쪽이 범인 3명이 쓰던 방이었다.
  2. "장난감 병정", "문밖의 그대", "준비 없는 이별", "하나의 사랑" 등
  3. 수사팀: 02-700-40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