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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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祜雋.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20년 10월 1일 경상북도 예천군 상리면 백석동에서 출생했다. 대구사범학교에 재학중이던 1940년 11월 30일 비밀결사 문에부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문예부는 민족문화존중과 항일의식의 고양을 목적한 결사로서, 부원의 비밀엄수 및 매주 토요일 작품감상, 비판 등의 운동방침을 정했다. 이들은 1940년 11월 말부터 1941년 3월 9일까지 모임을 9번 가졌다. 선배들이 졸업을 하게 되자, 그와 이주호(李柱鎬)·유흥수(柳興洙) 등이 중심이 되어 동지를 규합하고 조직을 확대하였다.

박호준은 유흥수, 권쾌복(權快福) 등 15명과 함께 당시 대구시 대봉정 소재 유흥수의 하숙집에 모여 항일결사 다혁당(茶革黨)을 결성하였다. 다혁당은 문예부 및 동교의 다른 비밀결사인 연구회를 합쳐 개편한 것으로, 조직을 교내에 국한하지 않고 대외적으로 조직을 확대하여 타교생 및 일반 사회인까지 포섭대상으로 하였다. 당수, 부당수 아래 총무·학술·문예·연구·경기부 등 각 부서를 두었는데, 박호준은 경기부원을 맡았다. 다혁당은 비밀엄수 및 당원의 절대복종, 주2회 회합과 하급생지도 등을 당규약으로 정하고, 1941년 3월부터 동년 5월까지 세차례 모임을 갖고 당의 활동상황과 조직확대에 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민족차별교육에 반대하여 동교내 연습과 학생(주로 일본인)과 심상과 학생(대부분 조선인)에 대한 차별대우를 철폐시키는 방안도 토의하였다.

그런데 1941년 7월,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경의 손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동지들과 함께 체포된 그는 2년여 동안 미결수 신분으로 대전형무소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 1943년 11월에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8.15 광복 직후 석방되었고, 부산 가야·성지·동삼·금정초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받았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2007년 1월 30일 87세에 숙환으로 별세했다. 사후 경북 예천군 상리면 백석동 선영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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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