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열

朴泰烈. 이명은 박종식(朴棕植), 박운서(朴雲瑞), 박원도(朴元道), 장운서(張雲瑞).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74년 4월 15일 황해도 은율군 일도면 농림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안창호가 평양에 개설한 대성중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수학하는 동안 윤치호, 장응진, 나일봉, 차이석 등 교사들에게 감화되어 독립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3월 3.1 운동이 발발하자, 은율군 일도면 농림리에서 적극 가담하였고, 4월 하순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오동진(吳東振)·윤하진(尹河振)·장덕진 등과 함께 제청년단(廣濟靑年團)을 조직하였으며, 1920년 7월에는 관전현(寬甸縣)에서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의 조직에 참여하여 오동진을 총영장으로 하고, 그는 장덕진·조병준(趙秉準)·윤하진 등과 함께 그 막료가 되어 무장항일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0년 7월, 광복군총영은 미국 국회의원단이 방한한 걸 기회삼아 국내에서 무장투쟁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그들은 결사대를 3대로 나누어 국내에 파견했는데, 박태열은 제2대 결사대장을 맡아 장덕진, 문일민, 우덕선(禹德善)·김예진(金禮鎭)·안경신 등과 함께 입국하다가, 안주에서 일본 경찰을 만나자 이를 사살하고 무사히 평양에 들어왔다. 이후 평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었다. 하지만 8월 3일 평남 경찰부 청사에 폭탄을 투척해 장벽 일부가 파손되고 경찰관 2명이 폭사했다. 또한 평양시청에도 폭탄을 투척했으나 불발했다. 이후 장덕진과 함께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광복군총영으로 귀대했다. 일제는 궐석재판을 열어 박태열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박태열은 귀환 후 재정부관을 맡아 관전현 누학석항자 대황구 만보황자에 광복군총영 통신사무부를 설치하고 독립운동 단체들과의 연락 업무를 맡았고, 1921년 2월에는 군자금 1만 5천원을 모금하여 상하이를 왕래하며 무기를 구입하는 한편, <독립신문>을 통해 '관리에 충고함', '자본가에 경고함', '친일자에 주고(注告)함' 등의 경고문을 배포하기도 하였다.

1922년 8월에는 강석훈(姜錫勳)·이한호(李漢浩)·김성득(金成得)·방달성(方達成)·장덕진 등과 함께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여 독립운동 노선을 통일해야한다는 '선언(宣言)'을 반포하여 국민대표회의의 조속한 개최를 촉구하기도 하였다. 1926년 나석주가 식산은행을 폭파하려 할 때 이를 위한 자금을 마련해주었으며, 오동진과 협의 후 중국 하남성에서 활동하던 중국 군벌 우페이푸의 군관단에 입단하여 2년간 군사 훈련을 받았다. 1927년 오동진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상하이로 피신하여 독립신문사에 입사해 인쇄책임자가 되어 독립신문을 만주, 미국 등지에 송부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한편 한국독립당에 가입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관여했다.

1934년 5월부터 상하이 프랑스 조계 하비방 300호에 거주하다가 9월 23일 일본 형사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국내로 송환되어 수년간의 재판 끝에 1937년 2월 8일 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1] 이후 평양형무소에서 서대문형무소로 이감 복역했다가 옥사했다고 전해지나, 사망 일자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박태열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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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