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로

朴昌魯. 자는 덕순(德順), 호는 이은(二隱).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46년 5월 12일 충청도 대흥현 일남면 은사동(현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은사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895년 정산에서 의병을 모았고, 1896년 1월 안병찬, 채광묵 부대와 홍주에서 합류하여 김복한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송병목(宋炳穆)을 서면소모관(西面召募官)으로 하여 정제기(鄭濟驥)와 함께 임존산성(任存山城)을 수축하는 등의 활동을 수행했다.

그러나 홍주관찰사였던 이승우(李勝宇)의 변심으로 김복한과 이설, 안창식, 안병찬 부자 등이 붙잡히는 바람에 의진이 와해되었다. 이후 1906년 1월에 안병찬·채광묵 등과 다시 기의하여 대흥에서 3월 중순에 전투태세를 가다듬어 홍주로 진격하였으나 일본군부대와 접전을 벌이다가 패전하여 안병찬 등 10명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4월에 공주 감옥에서 동지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1906년 4월 민종식이 홍산에서 기의하여 홍주로 진격하면서 삼신당리에서 적을 맹렬히 공격했다. 일본군이 예산 방면으로 도주하자 홍주을 탈환하였다. 이에 박창로는 민종식 의병대에 가담하여 안병찬·안창식 등 5명과 함께 참모사로 임명되어 의진(義陣)을 정비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역습으로 10일 간에 걸친 홍주성 공방전을 치른 끝에 홍주성을 내주고 말았다. 그후 재기를 도모하기 위하여 1906년 10월 예산 지방을 중심으로 자주 모임을 가졌으며, 11월 20일 예산읍을 근거지로 삼아 김덕진·황영수(黃英秀) 등과 함께 민종식을 대장으로 재추대하기로 하고 거사할 준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한곡 근처의 일진회 회원으로 추정되는 밀정에 의해 사실이 일본헌병에게 누설되면서, 10월 2일 민종식이 붙잡혀 거사하지 못하였다. 이후 자택에 은거했고, 1918년 12월 3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6년 박창로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88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 디지털예산문화대전[1]
  • 독립유공자 공훈록[2]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