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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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장군. 이괄의 난정묘호란 때 활약한 인물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576년 7월 27일 한양에서 의령 남씨 남유(南瑜)와 형조판서를 지낸 류훈의 딸인 전주 류씨 사이에서 출생했다. 조부 남응룡(南應龍)은 공조 참의를 지냈고, 부친 남유는 정유재란 때 나주 목사로 지내며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해전에서 활약하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 1602년 무과에 급제하여 1603년 선전관을 맡았고, 1604년 장연현감에 부임했다. 실록에는 그가 현감으로서 선정을 베풀었다는 기록과 학정을 벌였다는 기록이 병립한다.

황해도 안문 어사(黃海道按問御史) 이지완(李志完)이 아뢰기를, (중략) 장연 현감(長淵縣監) 남이흥(南以興)은 나이 젊은 무부(武夫)로서 마음을 가다듬어 백성들을 다스리므로 치적이 퍽 소문났습니다.
— 선조실록 선조 38년 4월 26일자 기사.
황해도 암행 어사 윤효선(尹孝先)이 아뢰었다. (중략) "장연 현감(長淵縣監) 남이흥(南以興)은 제 스스로 재능이 있다고 여기고 외람된 일을 마구 저지르는가 하면 또 조사의 사행을 구실로 백성들에게 징수하는 것이 매우 번다하였습니다."
— 선조실록 선조 39년 3월 7일자 기사.

이후 1608년 의주판관에 임명되었고, 1610년 용천군수, 1611년 부령부사에 부임했으며, 1613년 통정대부에 봉해졌고, 1614년 가선대부, 오위도총부 부총관 겸 포도대장에 선임되었다. 1615년 충청병마절도사에 임명된 뒤 1616년 공홍 병사에 봉해졌는데, 1616년 9월 사간원이 남이흥을 파직시키라고 청했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공홍 병사(公洪兵使) 남이흥(南以興)은 사람됨이 패려하고 행실이 추잡스러우며 게다가 잔혹하게 형장을 사용하여 도처에서 사람을 죽이면서 초개와 같이 보았습니다. 순행 중에 진천(鎭川)에 이르러 읍비(邑婢)를 간통하고자 하다가 그가 이미 공신(功臣)의 구사(丘史)가 되어 따르지 않을까 염려하여, 먼저 위엄을 세워 그 여종을 곤장을 쳐서 죽이겠다고 위협하여 간통을 하였습니다. 그밖에도 군졸들을 침학하고 베를 징수하여 자신을 살찌운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지방의 중요한 장수의 책무를 이러한 사람에게 맡겨서는 안 되니, 파직하라 명하소서."
— 광해군일기 광해 8년 9월 9일자 기사

이에 광해군은 공홍 감사의 보고를 받은 뒤 9월 28일 남이흥을 추고하라고 명했다. 사간원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남이흥을 국문하라고 청했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지금, 공홍 감사가 병사 남이흥에 대해서 조사하여 보고한 장계를 보니, 읍비(邑婢)를 위협하여 간통한 일은 비록 분명하지 않았으나, 곤장을 맞고 죽은 사건은 과연 사실이었습니다. 임금은 존귀하기가 짝이 없는 지위인데도 죄없는 자는 한 사람이라도 감히 죽일 수가 없는데, 더구나 변방의 신하가 왕명을 받고 외방에 있으면서 어찌 감히 죄없는 백성을 멋대로 죽이는 일을 사사로이 행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 족속들의 고소로 인하여 죄없는 자를 곤장으로 죽인 일이 정상이 환하게 드러났으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남이흥을 잡아다 엄하게 국문하여 율대로 죄를 정해서, 지방관이 명백하게 조사한 것을 중시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남이흥은 이미 추고하였으니, 조사하여 처리하는 것이 옳다. 우선은 번거롭게 논집하지 말라." 하였다.
— 광해군일기 광해 8년 10월 3일자 기사.

사간원은 이후에도 남이흥을 국문하고 율대로 죄를 정하라고 청했지만, 광해군은 체차하라는 명을 내린 것을 끝으로 더 이상 벌을 내리지 않았다. 1617년 경상 병사 겸 진주목사에 봉해졌고, 뒤이어 1619년 구성부사 겸 방어사에 봉해졌으며, 1620년 안주목사 겸 방어사에 임명되었고, 1622년 자헌대부에 봉해졌다. 그런데 1622년 8월 20일 감군에 아첨하여 자급을 얻으려 했다는 이유로 또다시 탄핵당했다.

양사가 합계하기를, "황제가 보낸 사람을 접대하는 것은 더할 수 없이 중대한 일입니다. 더구나 양 감군(梁監軍)의 내방은 국가의 안위와 존망이 달려있는 일입니다. 안주 목사 남이흥(南以興)은 감군에게 아첨해서 잘보이려고 관창(官倡)에게 남자 옷을 입혀 들여보내 감군에게 대단히 환심을 샀습니다. 감군이 이흥을 표창한 것은 실로 이 일 때문입니다. 감군은 우리 나라에 와서 오래 머물러 있기만 하고 바로 바다로 나가지 않아 백성들의 힘을 고갈시키고 변방의 근심만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이흥은 품계가 높은 무신으로서 나라의 은혜는 생각하지 않고 한갓 자급만 얻어낼 계책을 하여 이런 전에 없었던 큰 변고를 일으켰으니, 어찌 가슴 아프고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를 잡아다 국문할 것을 명하소서. 감군의 접반 상사와 부사도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고 두루 막지 않았으니,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모두 파직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천천히 결정하겠다." 하였다.
— 광해군일기(중초본) 광해 14년 8월 20일자 기사.

이 일로 체직되어 1년간 벼슬길이 막혔다가, 1623년 인조 반정 뒤 별장에 임명되어 도원수 장만의 부관이 되었다. 이괄의 난이 발발하자 정충신과 함께 반란 토벌에 앞장섰으나 황주 신교에서 이괄의 군에게 대패했다. 이에 장만이 남이흥에게 공을 세워 죄를 씻을 기회를 달라고 청해 허락을 받아냈다. 그 후 관군이 안현에 이르러 한양에 입성한 이괄군과 대치하였다.

장만은 처음에 둘러싸고 지켜서 적을 지치게 하려 했는데, 정충신이 "지금의 계책으로는 곧바로 안현에 올라가 적과 싸우는 것만 못하다. 이것은 병법에 이른바 먼저 북쪽 산을 차지한 자가 이긴다는 것이다."라고 하니 남이흥이 찬성했다. 이에 정충신, 나이흥 등은 밤을 틈타 안현에 진을 쳤다. 이괄은 이튿날 아침에 병력을 출동시켜 안현 언덕에 주둔한 관군을 공격하였다. 이에 정충신, 남이흥 등은 지형의 이점을 활용해 힘을 다해 맞서 싸웠고, 마침 바람이 적을 향해 불어준 덕분에 기세를 타 적을 격파하여 적병 4백여 급을 베고 3백여 명을 사로잡았다.

이괄의 난이 평정된 뒤, 진무일등공신에 제수되어 숭록대부의 품계와 의춘군의 군호를 받았고, 연안부사 겸 방어사와 비변사 당상에 부임했다. 이후 인조는 남이흥, 정충신과 함께 여진족을 막을 방안을 논의했다.[1]

"경들은 오랑캐의 정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랑캐가 기세를 몰아 쳐들어 온다면 어떻게 막을 것인가?"

이에 정충신은 "신은 오랑캐의 소굴에 출입하였으므로 적의 정세를 잘 알고 있는데,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어서 대적할 수 없을 뿐더러, 철기(鐵騎)로 충돌해 오면 야전(野戰)으로 맞서 싸울 수 없고 오직 성을 지켜야만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고, 남이흥은 군사가 적다며 우려를 표했다.

"금년에는 남방의 군사를 징발하지 않았으므로 변장(邊將)이 군사가 적은 것을 걱정할 것입니다."

이에 인조가 나무랐다.

"군사가 적더라도 적절히 사용하는 것은 장수에게 달려 있다. 지킬 수 있으면 지키고 싸울 수 있으면 싸워야 하는 것이다. 싸우기만 해서도 안 되고 지키기만 해서도 안 될 것이다. 요는 임기응변하기에 달려 있다. 지키기만 하고 나가 싸우지 않으면 쳐들어오는 적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이후 인조는 누르하치를 과소평가하는 발언을 했다.

"오랑캐의 추장은 한낱 하찮은 자일 뿐이다. 우리 나라 수천 리의 지방에 어찌 적을 제어할 만한 사람이 없으랴마는, 찾는 데에 정성스럽지 못하므로 쉽게 얻지 못할 뿐이다. 지금 장신(將臣)들이 모두 들어가 지킨다는 것으로 말하면서 출전할 생각을 갖고 있지 않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이에 정충신이 반론했다.

"우리 나라는 본시 군사가 없는 나라인데 아무리 훌륭한 장수가 있더라도 누구와 함께 싸울 수 있습니까. 지금 10여 만의 무리를 뽑아서 1∼2년 동안 훈련시킨다면 요동(遼東)도 진격하여 빼앗을 수 있을 것인데, 어찌 반드시 수어하려고만 하겠습니까. 지금 창성(昌城)·의주(義州)·안주(安州)의 제진(諸鎭)이 가장 요충지인데 이들 본진에 각각 민병(民兵)을 거느려 굳게 지킬 계획을 세우도록 당부하고, 입방(入防)하는 군사에 있어서는 그 수의 다소에 따라 편의대로 수어하도록 하고, 패강(浿江) 이서에는 가을 이후에 청야(淸野)하여 대비하도록 경계하면, 적이 오더라도 그 형세가 반드시 오래 머무르지 못할 것입니다."

남이흥도 인조의 의견에 반대 의사를 밝혔다.

"부원수의 수하 군사는 2천이 못 되니, 어떻게 이것으로 큰 적을 대항하겠습니까. 정병 수만을 교련할 수 있다면, 신처럼 못난 자도 목숨을 바쳐 싸워서 스스로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1624년 12월 22일, 인조가 체찰사 장만, 총융사 이서, 평안병사 남이흥, 훈련대장 신경진을 인견하여 여진족을 막는 문제를 논의헀다.[2] 인조가 "1년을 쓸 수 있는 저축이 있어도 부족할까 걱정인데, 더구나 한 달 양식도 없으니 앞으로의 일을 계획하기가 정말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그대들이 힘을 다해 꾸려나가야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하여 놔둘 수 있겠는가."라며 근심을 드러내자, 남이흥이 아뢰었다.

"서쪽의 근심이 하루가 다르게 심해지고 있는데, 신은 한 번 죽을 것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의 몸이야 아까울 것이 없지만 국가의 일은 어찌할 것입니까. 관서(關西)에 가면 그 쪽의 형세를 갖추어 진달드릴까 하는데, 묘당에서 선처해 주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이후 인조가 모문룡의 횡포가 심한 걸 걱정하자, 장만은 "모병(毛兵)이 갈수록 더 침해하고 있는데, 조만간 내지(內地)에서 난동을 부릴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난동을 부린 뒤에는 격파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라고 답했다. 인조는 이에 놀라 "이것이 무슨 말인가? 승부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고, 남이흥도 우려를 표했다.

"격파하는 것이야 어렵지 않다 하더라도 일단 이기고 난 다음에 장차 국가의 처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후 남이흥이 새 안건을 제시했다.

"서쪽 변방의 군졸은 사노(私奴)가 절반을 차지하는데, 한 몸에 두 가지 신역(身役)을 치르고 있는 일이야말로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대동역(大同驛) 이북으로는 수공(收貢)하는 사람을 금단했으면 합니다."

그러나 인조는 거부했다.

"안 된다. 우리 나라의 사대부는 중국과 달라 얼마 안 되는 녹(祿)에만 의존하고 있는데, 노비에게 수공하는 것까지 금한다면 무엇을 가지고 의식(衣食)을 해결하겠는가."

그 후 국경 방어의 임무를 맡던 남이홍은 1625년 안주로 물러나 수비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우찬성 이귀가 남이흥을 탄핵했다.

우찬성 이귀(李貴)가 상차하여, 평안 병사(平安兵使) 남이흥(南以興)이 본진(本鎭)을 비워버리고 안주(安州)에 물러나 지킨 죄를 극력 진달하기를, "조종조(祖宗朝)에서 평안도 안에 5진(鎭)을 설치한 뜻이 극진하였습니다. 그런데 광해 때에 예전 규례를 변경하여 7진(鎭)을 배치하여 영변(寧邊)·구성(龜城)·성천(成川)·평양(平壤) 4진은 모두 버리고 지키지 아니하여 일도의 백성으로 하여금 뜻밖의 변란을 만나면 모두 적을 피할 곳이 없게 하였습니다. 적신 박엽(朴燁)이 이 계책을 냈는데, 혼조의 임금과 신하가 그 술책에 빠졌던 것입니다. 조종조의 2백년 동안 전해온 예전 규례에, 얼음이 얼면 병사(兵使)가 창성(昌城)에 나아가 지키고 얼음이 풀리면 영변에 물러나 지키게 하였는데, 그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남이흥은 국가가 다시 살려 준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감히 난리에 임하여 스스로 보전할 생각을 품고서 안주에 물러나 지키고 싶다고 많은 말을 늘어 놓으며 조정을 기망하였으니, 만일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여겼다면 어찌 감히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담당 관아로 하여금 율에 의해 죄를 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으나 결정하지 못하였다.
— 인조실록 인조 3년 7월 6일자 기사.

사실 남이흥이 본진에서 물러나 안주를 지키는 건 장만의 계책에 따른 것이었다. 실록에 따르면, 어느 날 장만이 비변사에서 이 계책을 설명하자, 이귀가 큰 소리로 꾸짖었다.

"남이흥이 안주에 물러나 지키다가 적이 만일 맹산(孟山)의 길을 경유하여 곧바로 해서로 향하여 그대로 서울로 들이닥치면, 이는 영공이 지난해에 이괄(李适)이 멋대로 경성을 범하게 한 때와 다름이 없다."

장만이 크게 노하여 반박했다.

"국가에서 이미 나에게 체찰사의 임무를 맡겼으니 서변의 일은 내가 스스로 주장하겠다."

이에 이귀는 "이는 국가의 존망이 매여 있는 것이다. 나라가 망하면 나도 또한 죽는데 어찌 상관이 없다 하겠는가."라고 하였고, 장만은 이에 원한을 품었다고 한다.

한편, 남이흥은 모문룡과도 갈등이 심했다. 이에 앞서 평안 감사 이상길이 파직되자, 그와 친분이 있던 모문룡이 조정에 잉임(仍任: 기한이 다 된 벼슬아치를 그대로 머물게 함.)해 줄 것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모문룡은 심히 분히 여겨 평안 병사 남이흥에게 패악한 말을 많이 하였다. 남이흥은 이 일을 조정에 보고하였는데, 김류는 오히려 남이흥을 비판했다.

좌찬성 김류는 아뢰기를, "남이흥이 그의 패악한 말을 들었을 때에 마땅히 ‘남의 신하된 처지에 이런 말을 들었으니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장군 앞에서 자결하여 죽겠다.’고 대답했어야 합니다. 그렇게 대답했다면 그도 반드시 뜻이 저상되었을 것인데 남이흥이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창졸간에 어찌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 인조실록 인조 3년 9월 13일자 기사.

뒤이어 사간원이 남이흥을 추고하라고 청해 허락을 얻어냈다. 이 일로 남이흥이 겁이 많다는 인식이 박혔는지, 대사헌 김상헌이 남이흥을 바꿔야 한다고 진언하기도 했다.

대사헌 김상헌(金尙憲)이 아뢰기를, "무릇 전쟁은 군사의 다소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적격자인 장수를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이흥은 겁이 많은데다가 무재(武才)가 없어서 심복하지 않는 장사들이 많습니다. 미리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양장(良將)을 가려 뽑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희건(李希健)은 용맹이 삼군(三軍)에서 뛰어나 얻기 어려운 명장이라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남이흥에게 대단한 과실이 없고 또 겨울철의 방수가 이미 절박해졌는데 체임을 논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였다.
— 인조실록 인조 3년 9월 19일자 기사.

이렇듯 조정의 불신이 날로 심해지고 있었지만, 남이흥은 이런 상황에서도 여진족을 막아낼 준비를 수행했다.

평안 병사 남이흥(南以興)이 치계하였다. "신이 직접 군사 1천 5백여 명을 거느리고 구성(龜城)을 향하여 출발하는 한편, 각 부대의 여러 장수들은 각기 해서(海西)의 별승군(別勝軍), 호서(湖西)의 자모군(自募軍), 본도(本道)의 정초군(精抄軍)을 거느리고 험난한 지형을 의지하여 팔령(八嶺)·차유령(車踰嶺)·능항령(綾項嶺) 등지에 복병을 설치했습니다."
— 인조실록 인조 3년 11월 14일자 기사.

또한 이완 등과 함께 곧 모문룡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니 대비해야 한다고 청했으나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윤방이 아뢰기를, "요즘 서쪽 변방의 일이 염려스럽기 때문에 체찰사가 내려가려고 합니다. 남이흥(南以興)과 이완(李莞)은 곧 변이 일어날 것이라 여기는데, 여기서 보기에는 그렇게 급박한지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일 뜻밖에 변이 생기면 사세에 따라 대처해야 하겠지만, 곧 일이 일어나기야 하겠는가." 하였다. 장만이 아뢰기를, "대체로 사태가 발생한 뒤에 대응하는 것이 옳지, 격동해서 자초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중국을 배반하여 반역의 정상이 분명하게 드러나면 천하가 함께 토벌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정상이 분명치 않은데 먼저 격동하여 치게 되면, 천하 사람들이 혹 ‘모장(毛將)이 오래도록 그 나라에 있으면서 군량을 요구해 왔기 때문에 그의 침해를 싫어하여 그러한 일이 있었다.’고 할 것이니, 그 역시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경솔하게 움직일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반역의 정상은 있지마는 이완의 무리는 지나치게 경솔히 행동하니, 만일 조정에서 조차 선동하게 되면 변방의 장수들이 필시 서로 더욱 격동할 것이다. 이 일은 잘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였다.
— 인조실록 인조 4년 8월 27일자 기사.

1627년 정월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남이흥은 안주성에 들어가 농성하였다. 후금군이 능한산성을 함락한 뒤 안주성에 이르자, 그는 목사 김준, 우후 박명룡, 강계부사 이상안 등과 함께 힘써 맞섰다. 그러나 병력이 너무 적고 무기가 바닥나서 성이 함락되는 걸 막지 못했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그는 적군이 성안에 난입하는 걸 보고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고 한다.

"조정에서 나로 하여금 마음대로 군사를 훈련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강한 적을 만나 죽는 것이 진실로 내 일이지만, 이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실록에도 남이흥이 기찰(譏察) 때문에 훈련을 제대로 못 시켰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식(李植)이 아뢰기를, "지금 군정(軍政)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서 을 살펴보건대, 건강하고 기력이 있는 자들은 모두 한가롭게 놀고 있습니다. 또 우리 나라 병사(兵使)는 군사들에게서 거두어 생활하니 어느 겨를에 군졸을 애휼하고 연습에 전념하겠습니까. 오늘날의 속오군은 위급한 상황에 결코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기찰(譏察)의 일을 과연 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남이흥(南以興)도 기찰의 문제로 한번도 합조(合操)하지 못하였다고 하니 애석한 일입니다."
— 인조실록 인조 5년 3월 26일자 기사.

안주성이 함락된 직후, 제장 수 명과 함께 화약고에 들어가 불을 질러 자결하니, 향년 51세였다.

사후[편집 | 원본 편집]

사후 안주성에 그의 충정을 기리는 충민사(忠愍祠)가 세워졌으며, 영의정에 추증되고, 의춘부원군에 추봉되었으며, 충장(忠壯)을 시호로 받았다. 그의 유해는 경기도 광주에 안장되었다가 1971년 충넘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의 충장사 인근으로 이장되었다. 1984년 충장공 묘역 일대가 충청남도 지정 문화재(기념물 52호)로 지정되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