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 (18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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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喆.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정치인. 199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8년 9월 6일 경상북도 경주군 경주면 성건리에서 출생했다. 초명은 김천근(金千根)이다. 어린 시절 집안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경주사립 계남학교를 졸업한 후 대구계성중학교에 재학했다. 중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가서 중앙대학법과 전문부를 수료하고, 귀국 후 경주 계남학교 교원으로 일했다. 그러던 1919년 3월 11일과 12일 경주읍 노동리에서 박내영(朴來英)·윤기효(尹琪涍) 등과 함께 3월 13일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하고, 박문홍(朴文泓)의 집에서 태극기 300여 매를 만들었다. 그러나 대서업을 경영하던 일본인 모로가 히데오의 밀고로 발각되었고, 김철은 수사를 피해 달아났다.

3월 15일 박봉록, 서봉룡 등과 함께 경주읍 장날에 장터에 모인 군중 사이에 숨어들었다가. 태극기를 앞세워 기습적인 시위를 전개하였으나 곧 체포되었다. 이 일로 재판에 회부되어 1919년 4월 15일 대구지방법원 영덕지청에서 징역 4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1] 출옥 후 계남학교로 복귀하여 교직 생활을 하였고, 신간회 경주지부장을 맡기도 했다. 이후 신문 기자를 맡다가 8.15 광복 후 미군정청 경주군 고문을 맡았고,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경주군지부장, 민족통일 총본부 경주군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1948년 제헌 국회 선거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출마하여 경상북도 경주군 갑에서 40.11%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1950년 일민구락부 후보로서 재선을 노렸으나 낙선했고, 1954년 무소속으로 출마해 33.18%로 당선되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의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2.19%의 저조한 지지율로 낙선했다. 1978년 3월 21일 경주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김철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