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세연

權世淵. 자는 조원(祖源), 호는 성대(星臺).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36년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내성현 유곡리(현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에서 시골 유생인 아버지 권진하(權鎭夏)와 어머니 의성 김씨 김재익(金在翼)의 딸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안동에서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1870년 식년시 생원시에 급제한 뒤 1890년 숭릉참봉((崇陵參奉)) 벼슬을 역임했다. 1895년 을미사변단발령이 잇달아 발발한 후, 1896년 1월 초 수백 명의 의병이 안동에 모여서 안동의 관찰사부(觀察使府)를 점령하고 무기를 빼앗으니, 관찰사 김석중(金奭中)은 달아났다.

이후 김흥락(金興洛)과 유지호(柳止浩) 등을 중심으로 한 의병 참모진에서는 권세연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이상오(李尙五)를 좌익장(左翼將)으로 임명하는 등 부서를 정하니 진용이 차츰 정비되었다. 권세연은 격문을 각처 의병과 각 지방으로 보내어 상호간의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인심을 격려, 고무했다.

안동격문(安東檄文)


안동 창의 대장은 눈물을 씻고 격문을 띄웁니다. 천지가 위치를 정했으며, 중화와 오랑캐의 한계는 벗어날 수 없고, 춘추(春秋)가 엄연히 있으며 난적(亂賊)의 죄는 도망 못합니다. 그러므로 국가에 욕이 되는 망극한 변이 있으면, 백성은 분개하여 반드시 설욕(雪辱)할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저 호전(胡銓)이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를 돌리며 천리 밖에서도 낙담(落膽)을 했고, 안고경(顔 卿)이 적을 꾸짖어 의리로 항거하며 여러 나라가 휩쓸려 호응하였으니, 이는 모두 의분심이 가슴속에서 격동되어, 천하의 강상을 붙잡아 놓은 것입니다. 지금 왜놈을 물리치고 흉적을 토벌하는 일에 있어서도, 모두가 목숨을 버리고 의를 택하는 인물이 아니겠습니까.

아! 저 왜놈들은 계급으로 말하면 2백년 동안 우리에게 조공을 바치던 나라요, 원수로 말하면 4백년 동안 우리가 이를 갈던 적이니, 설사 성의와 호의로 우리에게 화친을 청한다 해도 오히려 그 놈들을 죽여 없애고만 싶고 똑바로 보기도 싫은데, 감히 방자하게 간사한 꾀를 부려 까닭 없이 트집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망명(亡命)한 역적과 결탁하고, 무뢰배들을 종용하며, 한 가지 기술의 장점을 과장하여 우리 용기를 좌절시키고 오영(五營)의 군사를 억압하여 우리 수족을 놀릴 수 없게 하여, 우리 임금을 협박하고, 우리대신을 죽이고, 연호(年號)를 황제의 예로 쓰게 한 것은 중국과 이간을 붙이자는 수작이요, 재정을 내어 구제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백성을 우롱하는 데 불과하며, 열성(列聖)의 헌장(憲章)을 함부로 고치고, 선왕의 법복을 강제로 무너뜨리며, 악독한 손길이 대궐 안에 뻗치니 신자(臣子)로서 차마 말할 수 있는 일입니까. 머리 깎는 칼이 도마에 올랐으니 고금에 이런 변이 없을 것입니다.

어찌 생각인들 했겠습니까. 작지 않은 나라가 한 번 싸워 보지도 못하고 위태하게 될 줄을. 저 개 돼지 같은 외국놈의 침략은, 실로 극흉극악한 역적놈들의 내응이 있는 때문입니다. 전일 사흉(四凶)의 죄는 만 번 죽여도 도리어 경하고, 지금 십신(十臣)의 악은 온 나라가 함께 분히 여기는데, 오히려 감히 임금의 위령(威令)을 빙자하여 장차 민생을 다 머리 깎으려 드니, 참으로 원통하구려. 그 괴수를 없애지 못하면 지하(地下)에 가서 선왕을 뵈올 낯이 없고, 이 머리를 보전하지 못하면 무슨 마음으로 세상에 산단 말입니까. 세연(世淵) 등은 문명의 고장에 생장하여, 충효의 훈계를 복습하였던 바 있거니와, 부모가 병이 들었을 때, 어찌 명(命)에만 맡기고 다스리지 않으리오. 운수가 비록 비색하지만 혹시 하늘을 힘입어 극복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일신상 장래를 생각해 보면, 반드시 목전에 말못할 일이 있고야 말 것이니, 살아도 보람없이 산다면 어찌 죽을 자리에서 죽는 것만 같으리까. 비록 임금의 조서(詔書)는 받들지 못했지만, 스스로 격동하는 기분을 참지 못하여, 마침내 고을 사람을 규합해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칼과 창은 무신년의 구장(舊藏)을 꺼내고, 병대의 규모는 임진년의 전례를 모방하였습니다. 군사는 지치고 양식은 떨어져 저놈들은 대낮에 나타난 도깨비와 같을 것이요, 지리와 인화를 얻어 우리는 부우(負 )를 의지한 범의 형세가 될 것이니, 굳이 서로 심력(心力)을 합한다면 씨 없이 다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 우리 동지 여러분께서는 함께 좋은 꾀를 토의하지 않으시렵니까. 혹은 밭 갈다 쟁기를 던지고 손을 부비며, 혹은 칼로 책상을 치고 마음으로 맹서하며, 혹은 주의(周衣) 안에 갑옷을 입고, 혹은 수레로 군량을 수송하여,청해(靑海)에서 장사의 칼을 씻고, 고가(藁街)에다 간신의 머리를 매달지니 성공하면 큰 공훈이요, 죽어도 넋이 될 것입니다. 아! 인정은 대개 서로 마찬가지인데, 윤강(倫綱)이 어찌 영원히 땅에 떨어지오리까. 이 격문의 사연을 듣는다면, 반드시 통곡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을미 12월 일 경상도 안동 창의 대장 권세연은 격(檄)함.

한편, 그는 곽종석에게 부대장 직에 임명할 테니 함께 하자고 제안했지만, 곽종석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며 임금에게 대항하는 격이 되니 안 된다며 단호히 거부했다. 이후 문경의 이강년, 영양의 조승기(趙承基), 제천의 유인석, 예안의 이만응(李晩應), 그리고 김도화, 김도현 등 각지의 의병장들과 상호 긴밀한 연결을 갖고 북진을 꾀했다. 그러나 1896년 1월 28일 안동 관찰사 김석중이 지방과 서울의 관군을 규합한 뒤 안동부로 쳐들어오자, 권세연은 결사 항전했으나 의병의 전투력이 너무 약하여 끝내 패배를 면치 못했고, 결국 1월 29일 안동부를 내주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권세연은 패배의 책임을 지고 의병장 직을 사퇴했고, 김도화가 그를 대신해 대장을 맡았다.

그후 자택에 은거한 그는 몇년 후 병세가 깊어지자 차남 권상규(權相圭)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일찍이 감히 의병장에 임명되어 나라의 원수를 통설(痛雪)하지 못했으니 부끄럽다. 내가 죽더라도 명(銘)을 쓸 경우 진실로 창의한 일에 대해 떠벌려서 확대시키지 말라.

이후 1899년 12월 10일 사망하니, 향년 64세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권세연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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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