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석운

權奭運.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00년 8월 18일 경상남도 울산군 하상면 남외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비밀결사 병영청년회에서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1919년 3월 전국 각지에서 3.1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청년회 간부 이현우(李鉉禹)·이문조(李文祚)·이종욱(李鐘旭)·박영하(朴永夏) 등과 수차례 협희아겨 4월 4일로 거사일을 정하고 만세운동을 추진했다. 4월 3일 기미독립선언서 200여 매를 작성하였고, 태극기 500여 개를 제작했으며, 종이와 명주에 '구대한국독립만세(舊大韓國獨立萬歲)'·'독립만세'라고 대서특필한 깃발을 제작하였다. 또한 그들은 거사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심동체의 혈맹(血盟)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결의 아래 오른손 가운데손가락을 깨물어 '결사보국(決死報國)'의 네 글자를 혈서로 서명하였다.

1919년 4월 4일 오전 9시경, 권석운은 청년회원들과 함께 병영일신학교(兵營日新學校) 교정으로 집결하여 학생들을 동원한 뒤 오전 11시 40분경에 축구공을 높게 차올리는 것을 신호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준비해 간 태극기와 깃발을 앞세우며 만세시위를 거행하였다. 이후 수백 명의 시위대를 이끌어 면내 각 동리를 행진하다 일경에 탄압에 의해 주동 인물 몇몇이 체포되자 일단 해산했다. 4월 4일 저녁에 간부들과 다시 모여 내일 만세시위를 재개할 것을 결의했다. 4월 5일 오후 3시 일신학교에 동료들과 집결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해, 천여 명의 군중과 함꼐 주재소를 에워싸고 전날에 검거한 주동인물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때 울산에서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가 무차별 사격을 가해 문성초(文星超) 등 4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다수가 총상을 입었다.

이 일로 재판에 회부된 그는 1919년 4월 23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1943년 5월 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권석운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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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