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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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英文.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강영대는 1888년 2월 19일 부친 강명화(姜明化)와 모친 송씨 사이의 셋쨰 아들로 태어났다. 그에게는 맏형 강영대, 둘째 형 강영소가 있었고, 남동생으로는 강영상(姜永商)과 강영렬(姜泳烈), 강영각(姜泳珏)이 있었으며, 여동생으로 강봉강(姜鳳姜)이 있었다. 그는 아버지와 형제들이 화와이로 이주한 뒤 고향에서 어머니 송씨와 여동생 강봉강과 함께 살았다. 그러던 1913년 아버지가 다시 고향을 찾자, 그는 미국으로 유학가기로 결심하고 1914년 3월 29일 샌프란시스코에 이동하여 9년만에 형제들과 재회했다.

이후 그는 1919년 1월 16일 미국 오하이오주 애크론에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애크론지방회를 발기하고 서기로 선임되었으며, 1920년 2월 캘리포니아주 월로우스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과 김종림(金鍾林) 등이 한인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하자 이에 참여하여 서기로 활동했다. 1923년 2월 남캘리포니아주 태프트지방회를 설립하고 서기 겸 재무로 활동했으며, 이후에는 시카고로 이주하여 하워드 식당을 경영해 후에 형제들이 시카고에서 사업을 벌일 기반을 마련했다. 그는 시카고에서 형제들의 사업을 도왔고, 1930년 태프트지방회 재무 겸 실업, 1931년 실업 겸 구제 업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부회장, 대표원, 집행위원장, 집행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1938년 1월 흥사단에 가입하여 단우번호 299번을 수여받았다.

1939년 10월 중국피난민후원회가 설립되자, 변준호(卞俊鎬)의 부탁을 받고 시카고에서 후원회를 조직했다. 중국피난민후원회는 뉴욕, 시카고, 로스엔젤레스 등지에서 조직되어 일화배척, 군수품 일본수출 반대, 선전책자 발행, 강연회, 모금 및 시위 등을 전개했다. 이 단체는 1941년 2월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1943년 1월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로 개편되었다. 1944년 10월28일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개편될 때 홍언과 함께 임원으로 선출되어 의장인 한시대를 도왔다.

1946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한 그는 박희도의 여동생 박영복과 결혼했다. 1947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부회장을 맡았으며, 1961년에는 한시대와 함께 이사부장이 되었고 1962년에는 이사부장에 단독으로 선임되었다. 1965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했으며 로즈데일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부인 박영복 역시 사망 후 남편과 함께 매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강영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가족 관계[편집 | 원본 편집]

강영소 가족.gif

뒷줄 왼쪽부터 강영대, 강영상, 강영문, 강영각. 앞줄에 강영소 부부와 아들.

  • 강명화(姜明化, 1868~1933): 강영소의 부친. 1900년 1월부터 1902년 8월까지 증산군 공립소학교 부교원으로 재임했고, 1905년 가족들을 데리고 하와이로 이주한 후 공립협회에 가임하여 활동하는 동시에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12년 대한인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회장을 역임하였고, 1917년부터 사업차 칠레, 멕시코, 샌프란시스코, 한국 등을 오갔다. 1933년 2월 3일 한국으로 귀국했다가 한 달만에 고향에서 사망했다. 201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강영대(姜永大, 1885~1948): 강명화의 첫째 아들. 아버지를 따라 하와이에 가서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다가 다시 아버지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해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이후 강영소와 함께 대한인 국민회 및 신한민보에서 활동했고 1917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대표원을 맡았다. 이후 1929년 11월 시카고에서 동생들과 함께 카페테리아 사업에 동참하여 1930년 말 강씨 브라더스 카페테리아 회사의 지배인으로 일했다. 그러나 강영소가 사망한 뒤 사입이 부진하자 결국 다른 사업가들에게 넘겨주고 1933년 12월 대한인 국민회 시카고 지방회 부회장에 선임되었으며, 흥사단 사업에 적극 참여해 독립금, 국방 공채 구입 등 독립운동 자금을 꾸준히 지원했다.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강영소(姜永韶, 1886~1934): 강명화의 둘째 아들. 아버지를 따라 하와이로 이주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다가 1906년 호놀룰루에서 공진회를 결성했다. 이후 1909년 대한인 국민회에 가담해 하와이 대표로 활동했으며, 1910년 10월 미국 본토로 이주해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등지에서 활동했다. 이후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 서기, 샌프란시스코 지방대의원, 신한민보사 사무원 등을 역임했으며, 1913년 5월 안창호흥사단을 조직했을 때 단원으로 참여했고, 1916년 대한인 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1919년 국내에서 3.1 운동이 발발하자 황사용과 함께 하와이로 파견되어 한인들에게 독립운동을 원조할 것을 호소했고, 1919년 7월 18일 하와이 국민회와 독립단의 합동식을 거행했지만 양측의 입장이 대립하는 바람에 통합이 결렬되었다. 이후 1919년 11월 대한인 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으로 재선출되어 미주지역 한인 사회에 많은 기여를 했으며, 이후 시카고에서 형제들과 함께 '강 브라더스 카페테리아 회사(KANG BROTHERS CAFETERIA CO.)'를 창립해 왕성한 사업을 벌이면서 한인 사회 지원 활동을 전개했다. 2011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강영상(姜永商, 1892~?): 강명화의 넷째 아들. 아버지와 형제들과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고, 1919년 대한인 국민회 오하이오 주 지방회 발기회원으로 참여했다. 형 강영소와 함께 국민회에 지속적으로 자금을 지원했고, 재미한인사회에서 임시정부 재원의 대부분을 조달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1920년대 이후 형제들과 함께 시카고에서 레스토랑을 경영했다. 그러다가 1944년 이후로 소식이 끊겼고 그가 어떻게 살아갔는지는 현재까지 파악되지 않았다. 201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받았다.
  • 강영렬(姜泳烈, ? ~ 1922): 신한민보 1922년 2월 9일자 <강영문 씨의 참보> 기사에 따르면, 강영렬은 강명화의 여섯 형제 중 다섯 째이며 만주에서 독립군에 가담해 항일 운동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22년 경에 독립군끼리 이념 문제로 대립하며 서로를 죽이는 것에 절망해 "나는 차마 붉은 군인이나 내 동족을 죽일 수도 없으며 그들에게 죽기로 애원하니 자살한다."라는 말을 남기고 자살했다고 한다.
  • 강영각(姜泳珏, 1897~1946): 강명화의 여섯번째 아들. 8살 때 아버지를 따라 하와이로 이주했다가 12살 때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 업랜드 소학교와 클레아몬트중학교를 재학했고 포모나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1920년에 하와이로 돌아가 와히아와에서 교사 생활을 했고 1925년에 영문격월간 '한인소년'을 창간했다. 이후 포모나 대학을 졸업한 뒤 형 강영소 등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국민회에 가담해 여러 잡무를 맡았고, 1931년 흥사단에 입단해 단우 번호 261번을 획득했고 1944년에 제12반 하와이 반장이 되었다. 이후 독립운동에 쓰일 자금을 지원하다가 1946년 2월 4일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형제들 중 유일하게 그의 유족이 현재까지 살아있으며, 그 중 딸 수산 강이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가문이 건국훈장을 수여받은 사실을 통보받았다. 1997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 강봉강(姜鳳姜, ?~?): 강명화의 막내 딸. 독립운동가 양우조와 결혼했다가 이혼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