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하고 있지 않습니다. 편집하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적으로 기록됩니다. 계정을 만들고 로그인하면 편집 시 사용자 이름만 보이며, 위키 이용에 여러 가지 편의가 주어집니다.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일본 제국]]의 대응 == 3·1 운동 소식을 접한 일본 사회는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조선 통치에 대한 비판이 일본 언론을 장식했고, 제국체제의 재편이나 개조까지 거론되었다. 3·1 운동 직후 신임 조선 총독이 된 [[사이토 마코토]]는 경성일보 사장을 맡다가 1918년에 그만뒀던 기자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를 참모로 삼고, 3·1 운동이 일어난 원인을 조사하게 했다. 1920년 5월 시찰을 명목으로 조선에 방문한 아베는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지방 유지들과 교류하고, 경성에 이른 뒤에는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인사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그는 이때의 시찰 여행을 바탕으로 <아베 미쓰이에 의견>을 작성했다. 아베는 서두에서 일본인과 친근한 조선인을 위주로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마음속에 쌓인 원한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3·1 운동의 원인을 다음 세 가지로 지적했다. * 미국의 민족자결주의 등장으로 일본의 국제적 위상이 절하했다. * 한일병합 이래 총독정치에 대한 반감이 쌓였다. * 신교육의 결과 자유사상을 배운 청년층이 형성되었다. 아베는 이중에서도 두 번째와 세 번째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먼저 청년층에 대한 지적은 ‘사회주의화’에 대한 경계심과 연결된다. 아베는신교육을 받은 청년층을 3·1 운동의 주도세력으로 보았다. 이미 자유사상에 눈뜬 이들은 최근에 일어나는 사상계의 변화, 즉 사회주의에도 금방 감화될 것으로 우려했다. . 1차대전으로 각성된 혁신의 기운은 조선사회에 신구전환을 일으켰으며, 신교육을 받은 청년층이 구세력인 양반유생과 길항하게 되었다. 아베는 이를 사회주의화의 경향으로 보고 조선통치의 첫 번째 난관으로 지목했다. 한편 ‘총독정치에 대한 반감’ 또한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였다. 신총독에 의해 문화정치가 표방된 지 1년이 지났음에도 조선인은 여전히 그 실천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총독정치에 대한 반감이 깊은데, 아베는 그 원인이 하급관리를 비롯한 재조일본인들의 조악한 행실에 있다고 지적했다. 이상의 문제를 지적한 아베는 향후 대책으로서 ‘통치방침의 확립’을 주장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의견을 피력했다. {{인용문2|오늘날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인심수람(人心收攬) 외에 없다. 인심수람이라고 하면 매우 추상적이라 혹자는 구식이라고 비웃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의 법령을 시행할 때도 인심의 귀향(歸向)을 잘 살피고 그 질고(疾苦)를 자세히 알고 굉장히 이해심이 많은 동정을 가지고 임해야지만 인민은 당국자의 뜻을 양해하고 충심(衷心)으로 만족하고 복종하여 안도감을 보이게 된다. 이것이 정치의 상승(上乘)으로, 어찌 신구의 차별을 둘 필요가 있겠는가. 총독정치는 유래부터 이 점에 결함이 있었다. (중략) 인심수람은 모든 정치기관을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한 휘발유과 같은 것이다. 만약 당국자가 하루 만에 마음을 여기에 잡고 완미(玩味)한다면, 그것이 지금 전도(全道)에 충만해 있는 총독정치에 대한 조선인의 반감을 완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약재가 되지 않겠는가.}} 이후 사이토 마코토를 위시한 조선 총독부는 무단통치의 한계를 인식하고, 조선인들의 불만을 누그러 뜨리기 위해 문화통치(文化統治)를 선포했다. 조선인 언론과 집회를 어느 정도 허용했으며, 헌병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개편했다. 또한 도, 부, 면에 자문기관 성격의 평의회나 협의회를 설치하고 이들 기관의 의원 일부를 선출직으로 정하면서 한국인들의 지방자치 참정권 보장을 천명했다.<ref>그러나 참정권을 가진 사람은 기업가, 지주, 일본인, 고위 공무원, 지식인 일부 등에 불과했으며, 이렇게 선출된 평의회, 협의회는 자문 정도나 할 수 있는 권한만 주어졌다.</ref> 여기에 회사령이 폐지되고 일본과 한국간의 관세가 철폐되었다. 또, 3·1 운동을 촉발시킨 큰 원인 중 하나인 쌀 부족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산미증식계획]]을 선포했다. 이러한 문화통치는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어, 많은 지식인이 이 시기에 친일파로 전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일본인과 조선인과의 차별 문제는 여전히 심각해서, 3·1 운동 이후에도 [[6·10 만세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 등 민족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다 [[중일전쟁]] 후 일본은 조선인의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한 일련의 정책([[내선일체]])을 단행해 [[8.15 광복]] 이전까지 추진했다. 요약: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각주}} · {|class="wikitable" · |- · rowspan=""| · colspan=""| · |} {{lang|}} · {{llang||}} · {{인용문|}} · {{인용문2|}} · {{유튜브|}} · {{다음팟|}} · {{니코|}} · {{토막글}} {{삭제|}} · {{특정판삭제|}}(이유를 적지 않을 경우 기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드시 이유를 적어주세요.) {{#expr:}} · {{#if:}} · {{#ifeq:}} · {{#iferror:}} · {{#ifexist:}} · {{#switch:}} · {{#time:}} · {{#timel:}} · {{#titleparts:}} __NOTOC__ · __FORCETOC__ · __TOC__ · {{PAGENAME}} · {{SITENAME}} · {{localurl:}} · {{fullurl:}} · {{ns:}} –(대시) ‘’(작은따옴표) “”(큰따옴표) ·(가운뎃점) …(말줄임표) ‽(물음느낌표) 〈〉(홑화살괄호) 《》(겹화살괄호) ± − × ÷ ≈ ≠ ∓ ≤ ≥ ∞ ¬ ¹ ² ³ ⁿ ¼ ½ ¾ § € £ ₩ ¥ ¢ † ‡ • ← → ↔ ‰ °C µ(마이크로) Å °(도) ′(분) ″(초) Α α Β β Γ γ Δ δ Ε ε Ζ ζ Η η Θ θ Ι ι Κ κ Λ λ Μ μ(뮤) Ν ν Ξ ξ Ο ο Π π Ρ ρ Σ σ ς Τ τ Υ υ Φ φ Χ χ Ψ ψ Ω ω · Ά ά Έ έ Ή ή Ί ί Ό ό Ύ ύ Ώ ώ · Ϊ ϊ Ϋ ϋ · ΐ ΰ Æ æ Đ(D with stroke) đ Ð(eth) ð ı Ł ł Ø ø Œ œ ß Þ þ · Á á Ć ć É é Í í Ĺ ĺ Ḿ ḿ Ń ń Ó ó Ŕ ŕ Ś ś Ú ú Ý ý Ź ź · À à È è Ì ì Ǹ ǹ Ò ò Ù ù · İ Ż ż ·  â Ĉ ĉ Ê ê Ĝ ĝ Ĥ ĥ Î î Ĵ ĵ Ô ô Ŝ ŝ Û û · Ä ä Ë ë Ï ï Ö ö Ü ü Ÿ ÿ · ǘ ǜ ǚ ǖ · caron/háček: Ǎ ǎ Č č Ď ď Ě ě Ǐ ǐ Ľ ľ Ň ň Ǒ ǒ Ř ř Š š Ť ť Ǔ ǔ Ž ž · breve: Ă ă Ğ ğ Ŏ ŏ Ŭ ŭ · Ā ā Ē ē Ī ī Ō ō Ū ū · à ã Ñ ñ Õ õ · Å å Ů ů · Ą ą Ę ę · Ç ç Ş ş Ţ ţ · Ő ő Ű ű · Ș ș Ț 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