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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오역(吾亦) 천민(天民)의 일(一)이오, 약자(弱者)의 일(一)이라. 금(今)에 천명(天命)을 승순(承順)하고, 인심(人心)을 합응(合應)하야 이천만중(二千萬衆)의 일구(一口)로 제출(齊出)하여 자유(自由) 청가(淸歌)를 창(唱)하며 쌍수(雙手)를 견악(堅握)하야 평등(平等)의 대도(大道)로 진(進)하는 바이로다.}} 이에 중국군이 투입되어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이로 인해 17명이 죽고 30여 명이 부상당했다. 대표들은 이를 항의하기 위해 길림성장을 찾아가 발포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책임 있는 해결을 촉구했다. 뒤이어 혼춘에서도 3월 20일 독립만세집회가 개최되었다. 시위참여자는 구한국기를 손에 들고, 2열 종대의약 60명의 학생을 선두로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라고 쓴 깃발을 들고, 나팔을 불고 노래를 부르며, 독립만세를 절규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면서 행진하였다. 시위 선도자 [[황병길]](黄丙吉)은 “이번 강화회의는 의외로 한국독립의 기회를 주었다”고 하면서, 이때 일치단결하여 독립의 의지를 관철할 것을 제창하였다. 이외에도 연길, 화룡, 왕청 등 각처의 25개 조선인 마을에서 시위가 전개되어 4월 말까지 지속되었다. 서간도 지역에도 독립선언의 소식이 전해져서 3월 12일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던 유하현 삼원포에서 200여 명의 한인들이 독립선언을 하였다. 통화현에서도 한인 300여 명이 금두화락 교회에 집결하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위운동을 벌였다. 백두산 동쪽의 안도, 무송, 장백, 관전, 집안, 환인 등지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집안의 경우 3월 21일부터 4월 19일까지 16개 마을에서 5000여명이 참여했다. 연해주에서 전개된 3·1 운동은 임시정부 성격의 ‘대한국민의회’와 ‘대한국민노인동맹단’ 같은 한인 단체가 주도했다. 특히 [[박은식]], [[김치보]], [[강우규]], [[윤여옥]] 등이 결성한 대한국민 노인동맹단은 46세 이상의 연령 제한을 두었을 뿐 남녀를 가리지 않고 회원을 모집했다. 노인 동맹단은 국내외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하는 한편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총영사관에 독립요구서를 제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한편,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도 3·1 운동에 호응했다.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안창호]]는 [[이승만]]과 [[정한경]]에게 3·1 운동 소식을 전하고, 샌프란시스코의 영자 신문에도 현순의 전보 복사문을 전해 미국 사회에 알렸다. 상해에서 전보를 받은 당일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에서 개최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3·1독립선언 소식을 전하고 만세를 열창하였다.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도 현순의 전보를 받고 한인교회에 한인 6백 명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이후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3월 9일 오후 7시 30분경 한인감리교회에서 중앙총회 임시협의회를 개최하고, 3·1 운동 이후 국민회가 시급히 해야 할 안건을 선정하여 통과했다. 먼저 평화회의 파견 대표자로 선출된 이승만과 정한경이 여행권을 얻지 못할 경우에는 [[서재필]]을 대신해서 파견하며, 만일 여행권 3장을 얻을 때는 세 사람을 파견한다. 다음으로 미국 각 교계 및 단체와 교섭하여 대한독립에 대한 지지와 동정을 얻기 위하여 적극 노력하며 이러한 활동을 할 교섭위원은 [[윤병구 (1877년)|윤병구]](尹炳求), [[정인과]](鄭仁果) 두 명으로 선정한다. 또한 중앙총회로서 국기를 만들어 동포로 하여금 사두게 하였다가 행사가 있을 때 들고 나오게 한다. 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에서도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총회장 이종관은 자신의 명의로 중앙총회장 안창호에게 외교의 전권을 맡긴다고 하였다. 안창호는 서재필에게 전보를 보내 국내에서 독립선언을 한 것을 기회로 그가 한인사회에 나와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고, 북미 각지 및 멕시코 각 지방회에도 전보를 보내어 독립선언의 소식을 전하였다. 안창호는 3월 13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석상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수입의 20분의 1을 납부하도록 조치할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이에 따라 총회는 포고서를 선포하여 하와이·멕시코·미국 본토의 한인은 전체가 ‘독립의연(獨立義捐)’의 의무를 지고 3월에는 10불 이상, 4월부터는 매월, 매주 또는 매년 수입의 20분의 1을 내야 한다고 하였다. 3·1 운동 소식은 대한인국민회를 통해 멕시코 한인사회에도 알려졌다. 신한민보의 보도를 보면 3월 29일자 ‘땀삐코 지방 동포의 열성’이라는 제목으로 이 지역동포들이 모여 경건한 마음으로 경축하며 앞으로의 독립 운동 방향을 협의하였다고 했다. 한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메리다에서는 대한인국민회 북미 지방 총회 훈시를 받아 4월 15일 오후 7시 반에 대한공화국의 건설과 신정부의 조직을 축하하는 경축식을 거행하였다고 보도하였다. 프론테라 지방회에서도 <독립선언서>를 스페인어로 번역하여 멕시코 각처의 교회에 발송했다. 1919년 3월 24일 이승만·정한경·서재필 3인의 이름으로 '제1차 한인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필라델피아에서 개최할 것을 요청하고 미전역에 초청장을 발송하였다. 이들은 미국 국민에게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널리 알리기 위해, 대회의 영어식 이름을 1774년과 1775년에 필라델피아에 2차례 소집되어 미국의 독립을 논의했던 '대륙회의(The Continental Congress)'를 본 따서 '제1차 한인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라고 명명했다. 필라델피아의 리틀 극장(Little Theater)에서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제1차 한인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 Liberty Congress)가 개최되었다. 한인 120여 명이 참석하고 미국인 목사, 신부, 유대교 랍비, 대학총장이 참석하였다. 이 대회의 목적은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려서 미국 정부와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것이 목표였다. 미국인들은 자유를 향한 한국 민족의 요청에 동정과 지지를 표시하였으며 폭군적인 일본의 동기와 행위들을 규탄하였다. 이들은 미국적인 민주주의, 자유, 기독교의가치를 칭송하며, 미국이 정의와 자유를 얻은 승리자로서 한국을 도울 도덕적 의무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필라델피아에 모인 한인대표들은 ‘미국에의 호소문’을 채택했다. 호소문은 국내에 있는 1천8백만 한민족을 대표한다고 자임하였다. 호소문에서 ‘미국인들 역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고 기독교 사상과 인류애의 편에서 정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에게 지지와 동정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대회 참가자들은 대회 마지막 날 기마대와 악단을 앞세우고 행진을 하여 미국의 독립선언서와 헌법이 조인된 독립관에 집결하였다. ‘대한공화국임시정부’ ‘국무경’의 자격으로 이승만은 미국 독립선언서를 서명했던 헨콕이 앉았던 자리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앉았던 자리에서 독립관장의 환영사를 들었으며, 영문으로 된 한국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그후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미주 한인들은 재정 지원 역할을 수행했다. 요약: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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