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봉: 두 판 사이의 차이

(새 문서: {| class="wikitable" |- !text-align:(center) colspan="2"|정봉(丁奉) |- |생몰년도|| 생년 미상~ 271년 |- |자|| 승연 |- |출생지|| 양주 여강군 안풍현 |- |국적|| (吳) |- |자식|| 정오(丁溫) |} 삼국시대 손오의 무장이며 동명이인 정봉(丁封)의 형으로 제갈량 사후 삼국시대 중후기에 두각되는 용이다. == 생애 == 어려서 용맹하여 소장(小將)이 돼, 감녕, 육손, 반장(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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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달 정월 9일 손준은 표기장군 여거, 좌장군 유찬과 군대를 이끌고 수춘을 습격하려고 했다. 군대가 동흥에 이르렀을 때, 문흠 등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19일, 군대가 탁고(橐臯)까지 진군하자, 문흠이 손준에게 투항해 왔고, 회남의 잔여 세력 수만 명도 오나라로 달려왔다. 위나라의 제갈탄이 수춘으로 진입하자, 손준은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2월, 위나라 장군 조진(曹珍)과 고정(高亭)에서 마주쳐 교전했는데, 조진이 크게 패했다. 유찬은 제갈탄의 별장 장반에게 고파(菰陂)에서 패했다. 유찬과 장군 손릉(孫楞), 장수(蔣脩) 등이 모두 해를 입었다.
윤달 정월 9일 손준은 표기장군 여거, 좌장군 유찬과 군대를 이끌고 수춘을 습격하려고 했다. 군대가 동흥에 이르렀을 때, 문흠 등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19일, 군대가 탁고(橐臯)까지 진군하자, 문흠이 손준에게 투항해 왔고, 회남의 잔여 세력 수만 명도 오나라로 달려왔다. 위나라의 제갈탄이 수춘으로 진입하자, 손준은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2월, 위나라 장군 조진(曹珍)과 고정(高亭)에서 마주쳐 교전했는데, 조진이 크게 패했다. 유찬은 제갈탄의 별장 장반에게 고파(菰陂)에서 패했다. 유찬과 장군 손릉(孫楞), 장수(蔣脩) 등이 모두 해를 입었다.


>오봉 2년(255), 위나라 장수 관구검과 문흠이 부대를 인솔하여 반란을 일으켜 위나라 사람들과 낙가에서 싸웠다. 손준은 표기장군 여거(呂據)와 좌장군 유찬을 인솔하여 수춘을 습격했다. 그러나 마침 문흠이 패배해 항복했으므로 군대를 돌렸다.
오봉 2년(255), 위나라 장수 관구검과 문흠이 부대를 인솔하여 반란을 일으켜 위나라 사람들과 낙가에서 싸웠다. 손준은 표기장군 여거(呂據)와 좌장군 유찬을 인솔하여 수춘을 습격했다. 그러나 마침 문흠이 패배해 항복했으므로 군대를 돌렸다.


257년 [[제갈탄의 난]]에 참전하고 이후 [[손휴]]가 즉위하면서 당시 권신인 [[손침]]을 치기위해 손휴파인 [[장포]]가 정봉을 추천해 정봉도 이에 가담하여 손침을 죽인 공로로 대장군으로 임명되었다.
257년 [[제갈탄의 난]]에 참전하고 이후 [[손휴]]가 즉위하면서 당시 권신인 [[손침]]을 치기위해 손휴파인 [[장포]]가 정봉을 추천해 정봉도 이에 가담하여 손침을 죽인 공로로 대장군으로 임명되었다.


263년 위나라의 등애가 촉한를 침공하자 구원을 위해 동생 정봉과 손이를 보내고 정봉 본인은 위나라의 군사력 분산을 위해 수춘으로 출전했으나 264년 후주 유선이 항복해서 회군하고 말았다.
263년 위나라의 등애가 촉한를 침공하자 구원을 위해 동생 정봉과 손이를 보내고 정봉 본인은 위나라의 군사력 분산을 위해 수춘으로 출전했으나 264년 후주 유선이 항복해서 회군하고 말았다.
손휴가 병사하고 손호를 차기황제로 추대하여 우대사 좌군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268년 11월 [[제갈탄]]의 아들 제갈정과 함께 서진의 합비를 공격하나 여음왕 사마준에게 패하고 269년 곡양성에 진군하나 성과는 없었고 270년 우장군사마를 지내 군을 보내 와구를 공격하나 공이 없음을 추궁받아 271년 12월 분노한 손호에 의해서 정봉의 도군(導軍)이 처형되었다.
271년 [[만욱]]이 정봉과 유평에게 손호를 단념하라고 발언하자, 이 발언이 손호의 귀에 들어가 272년 신년연회에 만욱과 유평에게 독주를 보내 사사시켜 죽게 만들었지만 정봉은 이 해 세상을 떠나 그의 아들 정온이 대신 처형되었다고 한다.
정봉은 승진하면서 교만한 태도를 보이며, 그가 죽은 다음 해인 272년에는 정봉을 참언한 자가 손호에게 생전의 군사생활에서의 실패를 이유로 정봉의 유족들은 임천으로 이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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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8일 (목) 14:22 판

정봉(丁奉)
생몰년도 생년 미상~ 271년
승연
출생지 양주 여강군 안풍현
국적 (吳)
자식 정오(丁溫)

삼국시대 손오의 무장이며 동명이인 정봉(丁封)의 형으로 제갈량 사후 삼국시대 중후기에 두각되는 용이다.

생애

어려서 용맹하여 소장(小將)이 돼, 감녕, 육손, 반장 등에게 속했다. 자주 정벌에 따라가, 전투하면 항상 군에서 앞장섰다. 매번 장수를 참살하고 깃발을 뽑아 내며, 자신도 상처를 입었다. 점점 승진해 편장군이 됐다. 손량이 즉위하고, 관군장군이 됐고, 도정후에 봉해졌다.

252년 12월에 위나라의 제갈탄, 호준의 공격에 제갈각 휘하로 들어가 위군 진영을 급습해 한당의 아들이자 전향자인 한종의 목을 베었다. 이때 부하들에게 갑옷을 풀고 단병만 지니도록 하여 이를 본 위군들은 그 수가 적어 제대로 방비를 하지 않아 패배하고 말았다. 이 전공으로 멸구장군, 도양후로 승격한다.

255년 위의 장군 문흠이 투항해 오니, 정봉을 호위장군으로 삼고 손준을 따라 수춘에 가 맞이하게 하고, 적의 추격군과 고정(高亭)에서 싸웠다. 정봉이 말에 타고 긴 모을 들고 적의 진중으로 돌입하여, 수백명의 머리를 베고, 군기를 노획했다. 안풍후로 올려 봉했다.

윤달 정월 9일 손준은 표기장군 여거, 좌장군 유찬과 군대를 이끌고 수춘을 습격하려고 했다. 군대가 동흥에 이르렀을 때, 문흠 등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19일, 군대가 탁고(橐臯)까지 진군하자, 문흠이 손준에게 투항해 왔고, 회남의 잔여 세력 수만 명도 오나라로 달려왔다. 위나라의 제갈탄이 수춘으로 진입하자, 손준은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2월, 위나라 장군 조진(曹珍)과 고정(高亭)에서 마주쳐 교전했는데, 조진이 크게 패했다. 유찬은 제갈탄의 별장 장반에게 고파(菰陂)에서 패했다. 유찬과 장군 손릉(孫楞), 장수(蔣脩) 등이 모두 해를 입었다.

오봉 2년(255), 위나라 장수 관구검과 문흠이 부대를 인솔하여 반란을 일으켜 위나라 사람들과 낙가에서 싸웠다. 손준은 표기장군 여거(呂據)와 좌장군 유찬을 인솔하여 수춘을 습격했다. 그러나 마침 문흠이 패배해 항복했으므로 군대를 돌렸다.

257년 제갈탄의 난에 참전하고 이후 손휴가 즉위하면서 당시 권신인 손침을 치기위해 손휴파인 장포가 정봉을 추천해 정봉도 이에 가담하여 손침을 죽인 공로로 대장군으로 임명되었다.

263년 위나라의 등애가 촉한를 침공하자 구원을 위해 동생 정봉과 손이를 보내고 정봉 본인은 위나라의 군사력 분산을 위해 수춘으로 출전했으나 264년 후주 유선이 항복해서 회군하고 말았다.

손휴가 병사하고 손호를 차기황제로 추대하여 우대사 좌군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268년 11월 제갈탄의 아들 제갈정과 함께 서진의 합비를 공격하나 여음왕 사마준에게 패하고 269년 곡양성에 진군하나 성과는 없었고 270년 우장군사마를 지내 군을 보내 와구를 공격하나 공이 없음을 추궁받아 271년 12월 분노한 손호에 의해서 정봉의 도군(導軍)이 처형되었다.

271년 만욱이 정봉과 유평에게 손호를 단념하라고 발언하자, 이 발언이 손호의 귀에 들어가 272년 신년연회에 만욱과 유평에게 독주를 보내 사사시켜 죽게 만들었지만 정봉은 이 해 세상을 떠나 그의 아들 정온이 대신 처형되었다고 한다.

정봉은 승진하면서 교만한 태도를 보이며, 그가 죽은 다음 해인 272년에는 정봉을 참언한 자가 손호에게 생전의 군사생활에서의 실패를 이유로 정봉의 유족들은 임천으로 이주되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