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녕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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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9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이동녕은 신변의 안전을 위하여 거처를 동년 10월 하바롭스크로 옮기고 독립운동의 거점 확보를 꾀했다. 1914년 초, 민충식 등이 이동녕을 찾아왔다. 그를 맞이한 이동녕은 권업회를 조직한 이상설과 대종교 신자 백순, 권대동, [[이동휘 (1873년)|이동휘]], 이종호, [[정재관]] 등을 자주 만나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할 것에 합의를 봤다.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러시아가 전쟁에 휘말려 정신이 없는 틈을 타 극동 총독 보스타빈의 양해와 협조를 얻어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했다.
1913년 9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이동녕은 신변의 안전을 위하여 거처를 동년 10월 하바롭스크로 옮기고 독립운동의 거점 확보를 꾀했다. 1914년 초, 민충식 등이 이동녕을 찾아왔다. 그를 맞이한 이동녕은 권업회를 조직한 이상설과 대종교 신자 백순, 권대동, [[이동휘 (1873년)|이동휘]], 이종호, [[정재관]] 등을 자주 만나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할 것에 합의를 봤다.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러시아가 전쟁에 휘말려 정신이 없는 틈을 타 극동 총독 보스타빈의 양해와 협조를 얻어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했다.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 때 러시아 정부와의 대일연합작전을 계획하며 군사의 모집은 물론 훈련할 수 있는 사관학교 설립 등을 계획했다. 그러나 중간에 러시아 당국이 불법 군사조직이라며 이동녕을 체포해 3개월간 옥고를 겪게 하기도 했다. . 1915년 석방되어 나온 그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민족의식의 선양이라고 믿고 이를 고취하기 위하여 각종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해야 하며, 그렇게 된 뒤에 우리나라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가르쳐 새로운 민족사관을 정립시킴으로써 민족적 긍지와 사명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를 위하여 구체적으로 재러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줄 수 있는 계기는 신문을 통한 방법이 효과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를 이루기 위해 부호 [[최봉준 (1862년)|최봉준]]의 자금을 통해 <해조신문>을 발행, 배포하였다.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 때 러시아 정부와의 대일연합작전을 계획하며 군사의 모집은 물론 훈련할 수 있는 사관학교 설립 등을 계획했다. 그러나 중간에 러시아 당국이 불법 군사조직이라며 이동녕을 체포해 3개월간 옥고를 겪게 하기도 했다. . 1915년 석방되어 나온 그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민족의식의 선양이라고 믿고 이를 고취하기 위하여 각종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해야 하며, 그렇게 된 뒤에 우리나라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가르쳐 새로운 민족사관을 정립시킴으로써 민족적 긍지와 사명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를 위하여 구체적으로 재러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줄 수 있는 계기는 신문을 통한 방법이 효과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를 이루기 위해 부호 [[최봉준]]의 자금을 통해 <해조신문>을 발행, 배포하였다.


이처럼 <해조신문>의 발행을 통해 민족의식을 선양하고 구국투쟁의 효과적인 방법을 모색하던 이동녕은 1918년 초 백순과 함께 동만주 영안으로 이동했다. 그곳엔 대종교의 교주 [[김교헌]]이 이끄는 총본사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후 기독교인이면서도 대종교에 입교한 이동녕은 단군의 국조사상을 이어 민족의 유구한 문화적 긍지를 높이 선양하여 동지와 국민들에게 용기를 주려는 의도에서 이를 신봉하게 되었다. 그는 [[신규식]]과 함께 대종교 서도본사 포교책을 맡아 선교활동에 매진했다.
이처럼 <해조신문>의 발행을 통해 민족의식을 선양하고 구국투쟁의 효과적인 방법을 모색하던 이동녕은 1918년 초 백순과 함께 동만주 영안으로 이동했다. 그곳엔 대종교의 교주 [[김교헌]]이 이끄는 총본사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후 기독교인이면서도 대종교에 입교한 이동녕은 단군의 국조사상을 이어 민족의 유구한 문화적 긍지를 높이 선양하여 동지와 국민들에게 용기를 주려는 의도에서 이를 신봉하게 되었다. 그는 [[신규식]]과 함께 대종교 서도본사 포교책을 맡아 선교활동에 매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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