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2세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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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4월 21일, 엘리자베스 공주는 21세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지 2년이 지났지만, 아직 사회는 어수선하고 어렵던 시절이었다. 차기 왕위 계승자로 예정되어 있던 그녀는 “나의 삶이 길건 짧건 간에,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일생을 헌신하겠습니다.”라고 맹세했다. 그리고 그녀는 2022년 9월 8일에 향년 96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그 약속을 충실히 지켰다.
1947년 4월 21일, 엘리자베스 공주는 21세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지 2년이 지났지만, 아직 사회는 어수선하고 어렵던 시절이었다. 차기 왕위 계승자로 예정되어 있던 그녀는 “나의 삶이 길건 짧건 간에,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일생을 헌신하겠습니다.”라고 맹세했다. 그리고 그녀는 2022년 9월 8일에 향년 96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그 약속을 충실히 지켰다.
== 사랑과 결혼 ==
== 사랑과 결혼 ==
한편 엘리자베스 공주는 13세 때부터 이미 [[사랑]]에 빠져 있었다. 상대는 5살 연상의 [[그리스]] 왕손인 필립이었다.
한편 엘리자베스 공주는 13세 때부터 이미 [[사랑]]에 빠져 있었다. 상대는 5살 연상인 [[그리스]] 왕자 필립이었다. 그리스 왕실이 망하면서 필립과 그의 가족은 그리스를 떠나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영국]] 등등 여러 나라들을 전전하며 떠돌이 생활을 했다.


필립은 그리스 국왕 요르요스 1세의 4남인 안드레아스의 4녀 1남 중 막내였다. 바로 위의 누나인 소피아보다도 7살이나 어렸고, 큰누나 마르가리타와는 무려 16년이나 차이가 났다. 이토록 귀한 아들이었지만, [[그리스]] 왕실이 망하면서 필립은 오랫동안 힘든 삶을 살게 되었다. 필립과 그의 가족은 그리스를 떠나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그들은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영국]] 등등 여러 나라들을 전전하며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많은 고초를 겪었다.  
필립의 가족들은 많은 고초를 겪었다. 어머니 앨리스는 선천적으로 청각장애가 조금 있었고{{ㅈ|다만 그리 심한 정도는 아니었고 독순술도 배워서, 다른 사람들이 거의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힘든 망명생활로 신경쇠약을 앓다가 정신질환([[조현병]])을 얻어서 요양원에 입원했다. 셋째 누나 체칠리아는 1937년 넷째를 [[임신]]한 만삭의 몸으로 시동생 루트비히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런던]]에 가다가 [[비행기]] 사고를 당하여 26세에 요절했고, 그녀의 남편 게오르크ㆍ장남 루트비히ㆍ차남 알렉산더도 함께 사망했으며, 너무 어려서 데리고 가지 못했던 셋째(장녀) 요한나도 얼마 후에 병으로 사망했다.


어머니 앨리스는 선천적으로 청각장애가 조금 있었고{{ㅈ|다만 그리 심한 정도는 아니었고 독순술도 배워서, 다른 사람들이 거의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힘든 망명생활로 신경쇠약을 앓다가 정신질환([[조현병]]) 증세까지 보였다. 이때부터 안드레아스와 앨리스의 결혼생활은 사실상 끝나버렸다. 안드레아스는 앨리스를 [[스위스]]의 요양원에 입원시켜 놓고서 [[프랑스]]로 이주, 그곳에서 술과 여자에 빠져 살았다.
아버지 안드레아스는 아내와 셋째 딸의 비극으로 충격을 받아서 방황하며 나머지 자녀들을 돌보지 못했고, 필립은 큰외삼촌 조지 마운트배튼으로부터 보살핌을 받았으나, 체칠리아 일가가 사망한 지 얼마 안 되어 조지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필립을 돌보는 것은 작은외삼촌 루이 마운트배튼의 몫이 되었다. 필립은 루이를 아버지처럼 따랐다. 루이도 필립을 몹시 아꼈으며, 필립의 아이들을 손주처럼 예뻐했다.
 
한편 앨리스가 정신질환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자, 안드레아스는 소문이 퍼지기 전에 서둘러 딸들을 시집보냈다. 딸들은 시집가서 잘사는 듯했지만, 3녀 체칠리아에게 큰 비극이 찾아왔다. 1937년 시동생 루트비히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런던]]에 가다가 [[비행기]] 사고를 당한 체칠리아는, 넷째를 [[임신]]한 만삭의 몸으로 불과 26세에 요절하고 말았다. 그녀의 남편 게오르크ㆍ장남 루트비히ㆍ차남 알렉산더ㆍ태중의 3남도 함께 사망했으며, 너무 어려서 데리고 가지 못했던 셋째(장녀) 요한나도 얼마 후에 병으로 사망했다. 안드레아스와 앨리스는 몹시 큰 충격을 받았다.
 
이렇듯 어린 시절 필립은 부모로부터 보살핌을 받을 처지가 되지 못했다. 필립은 기숙학교에서 생활했고, 큰외삼촌인 조지 마운트배튼이 부모를 대신하여 그를 돌봐주었다. 그러나 체칠리아 일가가 사망한 지 얼마 안 되어 조지도 암으로 세상을 떠나, 이후 필립을 돌보는 것은 작은외삼촌 루이 마운트배튼의 몫이 되었다. 필립은 루이를 아버지처럼 따랐다. 루이도 필립을 몹시 아꼈으며, 필립의 아이들을 손주처럼 예뻐했다.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필립은 열심히 공부하여 영국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훤칠한 장신의 미남이었으며, 공부도 운동도 모두 잘하는 전도유망한 젊은이였다. 1939년 조지 6세 영국 국왕이 보우스라이언 왕비, 큰딸 엘리자베스 공주, 작은딸 마거릿 공주와 함께 해군사관학교를 방문했을 때, 18세의 생도였던 필립은 국왕 일가를 안내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엘리자베스 공주는 필립을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다.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필립은 열심히 공부하여 영국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훤칠한 장신의 미남이었으며, 공부도 운동도 모두 잘하는 전도유망한 젊은이였다. 1939년 조지 6세 영국 국왕이 보우스라이언 왕비, 큰딸 엘리자베스 공주, 작은딸 마거릿 공주와 함께 해군사관학교를 방문했을 때, 18세의 생도였던 필립은 국왕 일가를 안내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엘리자베스 공주는 필립을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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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12월, 휴가를 맞이한 필립은 왕궁에서 열린 왕족들의 [[크리스마스]] 파티에 참석하여 오랜만에 엘리자베스 공주와 만났다. 17세가 된 그녀는 한층 아름답고 성숙해져 있었고, 그제야 필립도 그녀에게 반했다. 이듬해에 필립으로부터 청혼을 받은 엘리자베스 공주는 그 자리에서 즉시 수락했으나, 아버지 조지 6세는 “아직 엘리자베스는 어리니까, 좀 더 시간이 지나면 결혼하라”고 만류했다.
1943년 12월, 휴가를 맞이한 필립은 왕궁에서 열린 왕족들의 [[크리스마스]] 파티에 참석하여 오랜만에 엘리자베스 공주와 만났다. 17세가 된 그녀는 한층 아름답고 성숙해져 있었고, 그제야 필립도 그녀에게 반했다. 이듬해에 필립으로부터 청혼을 받은 엘리자베스 공주는 그 자리에서 즉시 수락했으나, 아버지 조지 6세는 “아직 엘리자베스는 어리니까, 좀 더 시간이 지나면 결혼하라”고 만류했다.


1947년 11월 20일, 26세의 필립과 21세의 엘리자베스 공주는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종전된 지 고작 2년밖에 지나지 않아서 사회의 모든 부분들이 부족하고 혼란스럽던 중에, 장래 왕위 계승자가 될 [[공주]]의 결혼은 국민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경사였다. 필립은 [[그리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고, [[영국]]으로 [[귀화]]했으며, 종교도 [[정교회]]에서 [[성공회]]로 개종했다. 한편 엘리자베스 공주의 시누이들과 그 가족들은 아무도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는데, 시매부들이 모두 [[나치당]]원 내지는 [[나치 독일]]의 군인이었기 때문이다.{{ㅈ|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싸웠기에, 종전 직후 독일에 대한 감정이 몹시 험악하였다.}} 시아버지 안드레아스는 1944년에 사망하여, 시가에서는 시어머니 앨리스만이 결혼식에 참석했다.{{ㅈ|이후 앨리스는 [[영국]]에서 살며 며느리의 대관식과 손주들의 탄생까지 모두 보고, 1969년에 세상을 떠났다.}}
1947년 11월 20일, 26세의 필립과 21세의 엘리자베스 공주는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종전된 지 고작 2년밖에 지나지 않아서 사회의 모든 부분들이 부족하고 혼란스럽던 중에, 장래 왕위 계승자가 될 [[공주]]의 결혼은 국민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경사였다. 필립은 [[그리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고, [[영국]]으로 [[귀화]]했으며, 종교도 [[정교회]]에서 [[성공회]]로 개종했다. 한편 필립의 누나들과 그 가족들은 아무도 하나뿐인 남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는데, 필립의 매형들이 모두 [[나치당]]원 내지는 [[나치 독일]]의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싸웠기에, 종전 직후 독일에 대한 감정이 몹시 험악하였다.)


이듬해(1948년) 11월 14일, 22세의 엘리자베스 공주는 첫째 찰스 왕자를 낳았다. 공주 부부는 첫 아이의 탄생을 무척 기뻐했고, 찰스 왕자는 부모와 양가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1950년 8월 15일에는 둘째 앤 공주가 태어났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남편, 아들, 딸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이듬해(1948년) 11월 14일, 22세의 엘리자베스 공주는 첫째 찰스 왕자를 낳았다. 공주 부부는 첫 아이의 탄생을 무척 기뻐했고, 찰스 왕자는 부모와 양가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1950년 8월 15일에는 둘째 앤 공주가 태어났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남편, 아들, 딸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 여왕 즉위와 재임 시절 ==
== 여왕 즉위와 재임 시절 ==
1952년 2월 6일, [[케냐]]를 순방 중이던 엘리자베스 공주 내외에게 슬픈 소식이 전해졌다. 공주의 아버지 조지 6세 국왕이 사망했다는 것이었다(향년 56세). 조지 6세는 뜻하지 않게 왕위에 올라, 어려운 시대에 재임하면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많은 고생을 했다. 과로와 [[스트레스]]로 심신의 고통이 심했던 그는 [[담배]]를 많이 피웠는데, 이 때문에 폐암에 걸려 사망하게 되었다. (그래서 보우스라이언 왕비는 시아주버니 에드워드 8세와 형님 월리스 심프슨을 무척 미워했다.)
1952년 2월 6일, [[케냐]]를 순방 중이던 엘리자베스 공주 내외에게 슬픈 소식이 전해졌다. 공주의 아버지 조지 6세 국왕이 사망했다는 것이었다(향년 56세). 조지 6세는 뜻하지 않게 왕위에 올라, 어려운 시대에 재임하면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많은 고생을 했다. 과로와 [[스트레스]]로 심신의 고통이 심했던 그는 [[담배]]를 많이 피웠는데, 이 때문에 폐암에 걸려 사망하게 되었다. (그래서 보우스라이언 왕비는 시아주버니 에드워드 8세와 형님 월리스 심프슨을 무척 미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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