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하고 있지 않습니다. 편집하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적으로 기록됩니다. 계정을 만들고 로그인하면 편집 시 사용자 이름만 보이며, 위키 이용에 여러 가지 편의가 주어집니다.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金俊吉.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2001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일제 경찰이 기록한 <경찰정보철 공>(1936년) '중국중앙육군사관학교 낙양분교 졸업생 등 검거이관의 건'과 <경찰정보 사>(1936년) '조선혁명간부학교(군관학교)졸업자송국이관의 건'에 따르면, 김학무의 본명은 김준길 또는 김원길로,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태어나 만주에서 은신중학을 마치고 난징 중앙대학에 재학했다고 한다. 은신중학은 캐나다장로회 선교부에서 1920년 용정에 설립한 한국인 남학교였으므로, 김학무는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성장하다가 용정으로 이주하였거나 은진유학에 유학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제 정보기록에는 김학무가 1911년생으로 기재되었으나, 은진중학의 학적부에는 1909년 12월 11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또한 학적부에는 그의 본적지가 온성군 유포면 세선동<ref>인근의 향당동, 남양동과 함께 경주 김씨 집성촌이다.</ref>으로 기록되었으며, 1927년 4월 은진중학에 입학하여 1931년 2월 28일에 제9회로 졸업되었다고 기재되어 있다. 김학무가 재학 중이던 1929년 11월부터 국내에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은진중학도 이에 호응하여 1930년 1월 만세시위를 벌인 여파로 휴교하기도 했다. 또한 이 지역에는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거셌고, 그는 여기에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학무는 은진중학을 마친 뒤 관내 지역으로 옮겨 독립운동에 참가하고자 했다. [[김학철(1916)|김학철]]의 회고록 <무명용사> '항전별곡'에 따르면, 김학무는 상하이에서 [[윤봉길]]과 함게 몇 개월 함께 생활하면서 사상 논쟁을 하였다고 한다. 윤봉길이 [[훙커우 공원 의거]]를 단행하기 이전에 [[안공근]]의 집에 머물고 있을 때 학생들과 일시 합숙하였는데, 김학무가 그때 함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1935년 6월 <사해공론> 잡지에 김준길이란 본명으로 기고한 '북평의 봄' 중 '산 하나 뵈쟎는 먼 지평선엔'을 보면, 그는 "열하사변때 북평 해공원"에 있었다고 기록했다. [[열하사변]]은 1933년 2월에서 5월까지 벌어졌으므로, 그는 그 시기에 베이징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정명의 <조선독립운동> Ⅱ (1967) p.685에는 김학무가 베이징 평민대학을 졸업한 것으로 기록되었으나 이를 입증할 기록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김학무는 1934년 [[김구]]의 휘하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의 정보기록인 <사상 정세 시찰 보고집>에 따르면, 김학무가 김구에게 선발된 낙양군관학교 생도로서 1934년 7월에 난징에 돌아온 인원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1933년 [[장제스]]와 김구가 협의하여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 학생들만 입학하는 특별반이 마련되었다. 특별반은 김구가 운영을 총괄하였지만, 교육훈련은 [[지청천]]이 주관하는 이원적 지휘체제였다. 그러나 김구와 지청천의 주도권 다툼이 야기된 끝에 1934년 8월 김구가 입교생 25명을 퇴교시켰다. 이때 김구는 25명 중 7명을 '친병'이라 칭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김구였다. 이로 볼 때 김학무는 김구에게 깊은 신임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 형사기록인 <전봉남사건 신문조서>에 따르면, 김학무는 낙양군관학교에 재학했을 때 공산주의 사상을 거리낌없이 밝혀서 동창생들로부터 공산주의자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반공 성향이 매우 강했던 김구에게 총애받았다는 것을 볼때, 그는 적어도 1934년까지 공산주의와 함께 민족주의적 성향을 함께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낙양군관학교를 중도에서 퇴교한 그는 곧바로 난징의 중앙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는 중앙대학에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1935년 일제의 정보보고 <사상 정세 시찰 보고집>에 따르면, 김학무와 최창한은 1934년 7월 난징 중앙대학에 입학하였으나 학력부족으로 1개월 만에 퇴학하고, 1935년 6월 독학하며 김구 특무대독립군에 종사했다고 한다. 김구는 중앙육군군관학교나 중앙대학 등에 재학하는 자파 인원을 중심으로 이른바 김구 특무대독립군을 1934년 12월 30일에 결성하였는데, 김학무는 그 간부로 매주 일요일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진행되는 시사보고의 책임을 맡았다. 시사토론이란 주로 군관학교에 재학 중인 특무대독립단원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그들은 학교 내에서 교과서나 참고서, 학교 발행신문 이외의 신문·잡지 등의 열람이 금지되어 시사문제에 대해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국제적인 정치·경제·군사 등의 주요 기사나 조선 안의 혁명운동 정세 등의 시사문제를 보고하고 토론하는 모임을 가지고자 하였다. 김학무가 그 보고를 담당했다고 하고, 그가 특무대독립군의 제6소대장을 맡았다는 기록도 있다. 특무대독립군은 남경성내 고안리 1호에 위치한 3층 벽돌집에서 이뤄졌다. 구락부라고 불린 그 1층에는 국문신문 [[동아일보]]와 일본어 신문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상해일일신문>, 그리고 차이나 프레스라는 영자신문이 비치되었다. 또 잡지로는 <킹>과 <신동아> 두 종류가 있었다. 김학무는 이곳에서 이들 신문이나 잡지를 열독하였던 것 같다. [[동아일보]] 1935년 4월 6일자부터 16일자까지 9회에 걸쳐 <현중국신문소고>를 '남경 김준길'이라는 본명으로 발표했다. 이 연재의 말미에 '1935년 3월 20일 탈고'라고 된 것으로 보아, 원고를 쓰자마자 동아일보사로 보내 신문에 연재했음을 알 수 있다. 또 1935년 5월 국내에서 창간된 대중잡지 <사해공론>의 제2호(6월호)에 시를 김준길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 <현중국신문소고>는 당시 중국의 대표적인 신문들을 상하이, 난징, 광저우, 톈진, 한커우, 청도, 베이징, 그리고 주요 성이나 변강 등의 지역을 중심으로 소개하고, 신문교육기관 등도 정리했다. 특별한 연구를 반영하지는 않고 신문사와 교육기관을 소개했다. 또한 <사해공론>에 실린 시는 '북평의 봄'이라는 제목으로 '머쟎은 성 밖에선', '산 하나 뵈쟎는 먼 지평선엔'과, '겨울의 진회하안'이라는 제목으로 '신민촌의 아츰', '신방성의 아츰'이었다. 진회하는 김구 구락부가 있던 부자묘 근처를 흐르고, 신방성은 명효릉의 성루였다. 이렇듯 김구 휘하에서 활동하던 김학무는 1936년 5월경 김구를 떠나 민족혁명당에 입당했다. 민족혁명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해체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에, 김구는 이를 참여하지 않고 한국국민당을 결성하고 1936년 7월 한국국민청년단을 조직했다. 김학무는 바로 그 직전에 민족혁명당에 입당한 것이다. 그는 1935년 9월 1~2일경 공산주의자 이정환, 은진중학 동창생이자 낙양군관학교 출신의 정성언과 함께 한국독립과 공산화를 목적으로 한 혁명동지회를 조직했다. 세 사람은 1935년 8월 중순부터 여러 차례 회합하여 논의한 결과 한국독립운동은 유치하고 편협한 민족주의 운동보다 공산혁명의 세계대세를 따라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일제 정보기록에 따르면, 김구 특무대훈련소 졸업생과 중앙육군학교 제10기생, 낙양군관학교 중도퇴교생 등이 이 혁명동지회에 가담했으며, 김학무가 수령의 지위에 있었다고 한다. 이는 조직의 결성을 주도했던 이성환과 정성언이 각기 강서소비에트에 들어갔다가 사망하거나 일제에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김학무는 김구 휘하에 있던 은진중학 출신 인사들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경향이 두드러진 혁명동지회를 조직한 뒤 김구를 떠나 민족혁명당에 입당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일제 정보기록에 따르면, 정성언 등이 혁명동지회 활동 중 상해총영사관 경찰부에 검거되면서 특무대의 내정 일부가 폭로되자, 김구는 크게 낭패하여 표면적으로 특무대를 해산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일제 정보기록에 따르면, 김학무는 김구파의 한인애국단 소속이었으나 낙양군관학교 졸업 후 김구와 의견 출동을 빛고, 동지 정성언, 황석주, 마유신, 양철생 등과 함께 한인애국단을 탈퇴했다고 한다. 김구와 의견 충돌을 빛었다는 것은 공산주의를 불신하여 좌우합작에 나서지 않는 김구에 대한 친공산주의 계열 청년들의 반발이었을 것이다. 김학무가 주도하는 혁명동지회 세력은 이웅이라는 인물과 연계되었다. 이웅의 본명은 임병웅으로, 김학무의 은진중학 6년 선배였다. 그는 1930년대 중반 중국공산당원으로 활동하다가 일제에 체포된 뒤 변절하여, 일제의 공작원이 되어 독립운동자를 전향시키는 공작에 투입된 밀정이었다. 김학무는 이를 알지 못한 채 이웅과 교섭했다. 염인호의 <조선의연구 연구>에 따르면, 이웅은 혁명동지회 성원들이 중국공산당과 연계되었다고 믿고, 그들을 산시성 중국공산당 지역, 즉 옌안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이에 김학무 등이 제남으로 이동하다가 상하이에서 이웅의 변절을 통보받고 이웅을 처단했다고 한다. [[김학철(1916)|김학철]]의 '무명용사'에 따르면, 이웅은 공산당을 탄압하는 [[장제스]]의 암살을 김학무 등에게 의뢰했다고 한다. 또, 일제의 정보문서에는 이웅이 혁명동지회 세력에 매월 다액의 생활비를 보조하여, 그 정체를 모르는 김학무 등이 난징과 상하이의 독립운동가와 관련된 정보를 제공했다고 한다. 아무튼 김학무는 이웅의 변절을 [[윤세주]]와의 회합에서 알게 되었고, 1936년 2월 제남에서 이웅을 처단했다.<ref>김학철의 무명용사에는 윤세주 대신 '김원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아마도 [[김원봉]]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ref> 김학무는 민족혁명당에 입당한 직후인 1936년 8월 14일 김병화, 김순관 등이 중국인과 공모하여 폭탄을 제조한 뒤 상하잉서 일본인이 많이 모이는 가부키좌 등지에 폭파시키는 계획에 가담했다. 그러나 폭탄 제조 도중 폭발사고가 일어났고, 김병화는 즉사하고 김순곤은 빈사 상태에 놓이면서 실패했다. 이후 김학무는 1937년 초 민족혁명당 내부 비밀조직으로 조선청년전위동맹을 결성했다. 조선청년전위동맹은 1936년경 조선을 떠나 중국 관내에 들어온 공산주의자 [[최창익]], [[허정숙]], 한빈(왕지연) 등과 김학무 등 혁명동지회 세력이 제휴하여 조직한 것이었다. 이 단체는 사회주의혁명의 실현, 중국공산당의 지도로 조선혁명의 전개, 동북지역 노선, 관내 한인청년의 사회주의 인도 등을 강령으로 삼았다고 한다. 1947년 '해방신문사(도쿄)' 지에 <근대 조선 혁명 운동사>를 기고한 김태준은 김학무에 대해 [[조선의용군]] 대원들의 증언을 들은 뒤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인용문|그 동무의 사상을 글로서 쓰고 그 동무의 일화를 여러 동무들에 서 듯고 늣겻다. 동무야말로 발으게 살려고 생각했고 발으게 알면 곳 그것을 실천에 옴기려고 한 과학자요 빼앗긴 인민의 이익을 위하야 몸까지 밧친 귀중한 동무다.}} 또한 [[김학철(1916)|김학철]]은 '무명용사'에서 김학무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인용문|우리 청년 당원들 중의 교초(뭇사람 가운데서 뛰어남)였다. 그의 연설은 언제나 듣는 사람의 양심에 호소를 하는 것 같아서 진한 감동을 주곤 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 전후, 김학무는 광둥성 광저우에 파견되었다. 그는 10월 중순 중산대학 재학생을 중심으로 30~40명이 난징으로 이동할 때 동행했다. 그가 어떠한 이유로 광저우에 갔는지는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광저우에 한인 청년들이 많으므로 지원병을 모집하여 군사 훈련시키기 위해 갔을 가능성이 있다. 아무튼 김학무는 청년들과 함께 난징에 모였고, 12월 1일부터 난징 근교에 있던 중앙육군군관학교 성자 분교 특별훈련반 제4중대에 입교하여 군사교육을 받았다. 이 청년들의 모집과 입교는 민족혁명당이 주도하였는데, 전위동맹의 성원 20여 명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12월 12일 나징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자, 이들은 1938년 1월 6일 허베이성 강릉현으로 이동하였고, 3월 1일 한국인 독립중대로 편제되어 5월 24일 졸업했다. 그런데 졸업이 코앞이던 5월 19일부터 사흘동안 훈련지에서 민족혁명당 제3차 임시전당대표대회가 개최되어 극좌분자들에 대한 민족혁명당 지도부의 처결이 내려졌다. 당시 김학무는 극좌분자로 인식되었고, 최창익과 함께 민족혁명당 내의 극좌 세력의 대표자로 자리잡고 있었다. [[김원봉]] 등 당 수뇌부는 이를 경계하고 당 통일 문제를 안건에 회부했으나, 좌익 세력이 워낙 강해서 뜻대로 이루지 못하고 당 통일문제를 점진적으로 단결을 공고히 하기로 정하고 최창익과 김학무 등을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했다. 특별훈련반 졸업생들은 6월 2일 당본부가 있던 한커우에 도착하여 민족혁명당에 복귀했다. 그들은 전선 진출을 기대했으나, 김원봉 등 지도부는 동북으로의 무장 진출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김원봉 등이 중국 국민당과 협의하여 관내 공작에 투입하고자 계획하자, 6월 10일 김학무, 최창익, [[신익희]] 등 당원 11명과 훈련반 졸업생 35명 등 49명이 민족혁명당을 탈퇴하여 재한구조선청년전시복무단을 조직하였다가 7월 4일 재우한조선청년전시복무단으로 개칭되었다. 하지만 이들 내부에도 의견 대립이 일었다. 최창익은 즉각적인 동북진출을 주장하였으나, 김학무는 현실적으로 중국항일전쟁에의 참여를 강조했다. 김원봉은 민족혁명당의 분열을 막고 청년층의 획득을 목적으로 7월 초 중국 군사위원회와 교섭하여 [[조선의용대]]의 창설을 시도하였다. 그는 중국 각 전구의 일선에 이들의 배속을 요구했고, 중국 군사위원회는 한국 민족운동단체의 전부의 가맹을 전제로 승인했다. 김구 세력은 이를 거부했으나, 재정적으로 곤란한 처리에 있던 전시복무단은 이를 수락했다. 전시복무단은 9월에 조선청년전위동맹이라는 명칭으로 개편하고 조선민족전선연맹에 참여하였다. 이후 10월 10일 쌍십절에 우한에서 조선의용대가 창립되었다. 김학무는 창립에 앞서 10월 2일에 열린 지도위원회에 김원봉, 김규광, [[유자명]]과 함께 전위동맹을 대표하여 참석했다. 최창익과 대립관계에 있던 김학무가 전위동맹을 대표하였던 것은, 아마도 최창익이 당권에 도전하고 청년당원들을 이끌고 탈당한 것에 대한 조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학무는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자 전위동맹 성원들이 중심이 된 제2구대의 정치지도원을 맡았으며, 제2구대는 한커우에서 표어와 벽보를 통한 항일선전활동에 진력헀다. 그러다 우한이 일본군에게 점령되자 철수하여 하남성과 안휘성 지역인 중국 제1전구와 제5전구에 배치되었다. 김학무는 전위동맹의 지도부와 조선의용대 본대를 따라 구이린으로 이동했다. 이에 비해 최창익은 지지세력을 이끌고 독자적으로 시안으로 갔다가 옌안으로 다시 이동하여 중국 공산당과 합류했다. 김학무는 1939년 중 계림에 소환되어 있던 제1구대원 일부를 인솔하여 노하구로 이동했다가 1939년 12월 전후 계림으로 가서 조선의용대 정치조장에 취임하였으며, 뒤이어 1940년 중에 지도위원을 겸한 부대장에 임명되었다. 김학무는 이 시기 조선의용대 창설 1주년을 기념하여 <1년간 조선의용대 사업 총화와 향후 사업방향>을 발표했다. 그는 이 글에서 무장 부대를 형성하여 공작을 전개하기 위해 적 후방에 연락거점이나 활동 근거지를 건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화북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창익의 동북노선을 반대했던 김학무가 화북진출을 주장하게 된 것은, 당시 화북 일대에 유격활동이 빈번하게 전개되었고, 조선의용대 내부에 여전히 동북노선을 지지하는 세력이 적지 않았으며, 국민당 지역에서 반공운동이 강화되고 있어서 이를 벗어나야 할 필요성 등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용대는 1940년 11월 충칭에서 확대간부회의를 개최하여 통일전선의 건립, 적후방공작의 전개, 동포 쟁취, 무장부대의 건립 등을 결의하였다. 이는 조선의용대가 화북 지역으로 이동하여 일본군을 상대로 무장투쟁하기로 정했음을 의미했다. 본부대를 제외한 조선의용대 각 구대는 1940년 말부터 낙양에 집결하였고, 1940년 여름을 전후하여 4개 그룹으로 국민당 관할구역을 벗어나 중국공산당 세력 지역인 태행산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낙양에 집결하던 시기인 1940년 10월 15일 김학무 등 전위동맹구성원들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탈퇴하고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을 결성했다. 이들은 조선민족전선연맹이 각 단체를 해산하고 단일 단체로 통합하자는 방침을 내세우는 것에 반대하고, 전위동맹 만의 구성체를 유지하기 위해 연맹 방식의 통합을 주장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퇴를 결행한 것이다. 1941년 1월 31일 투쟁동맹 중앙위원회는 ‘통일전선 조직형식문제에 관한 결의’를 하였는데, 각 단체 연맹과 함께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에 집중할 것을 내용으로 한 것이었다. 이 결의는 중앙위원 7인 중 4대 3으로 표결로 결정되었으나, 이에 반대한 한빈, 김학무, 김인철 3인이 결의에 불복하여 탈퇴했다. 이에 투쟁동맹은 이들을 기회주의자, 종파주의자라고 비판했다. 이후 세 사람은 조선민족전선연맹에 복귀했다. 이렇듯 내부 분열이 심화되는 와중에도 조선의용대의 화북 진출이 이뤄졌다. 김학철의 회고에 따르면, 김학무는 낙양에서 북상을 강하게 주장하였고, 1941년 봄 임현, 평순을 거쳐 태행산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또한 일본 정보기록인 <특고월보> 1941년 4월호의 '불령인 단체 조직 계통표'에 따르면, 1941년 1월 태행산에서 중국공산당의 원조 하에 화북조선청년연합회가 결성된 뒤, 김학무가 계림으로 낙양으로 공작지도를 위해 왔다고 한다. 이후 김학무는 1941년 7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개편되었을 때 화북지대의 정치지도원에 임명되었으며, 8월에 개설된 화북조선청년학교, 즉 간부훈련반의 교원을 맡았다. 간부훈련반의 교육은 8월 말부터 10월 말까지였는데, 김학문은 '시사문제 요강'을 담당했다. 그는 <신화일보>와 한국어 신문, 중국어 잡지를 재료로 매주 시사제강을 작성하여 분석, 연구하였다. 한편, 김학무는 정치지도원으로서 과외교육도 담당하였다. 정상적인 훈련 이외의 시간에 조직의 강령이나 정책 등의 교육, 매주 1회 저녁에 학술회를 실시하여 학과 이해를 돕고, 강연회를 개최하여 발표능력을 높였으며, 야담회를 통하여 민족혁명의식을 제고시켰다. 벽보의 발행, 새로운 가곡의 교수, 오락회 개최, 구호 제출 등도 과외교육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교육은 민족 자각과 단결의식, 긴장의 유지 등을 위한 조치였다. 김학무는 이와 함께 선전 부분도 담당했다. 화북지대에서는 일본어와 한국어로 ‘일본군 병사들에게 고함’이나 ‘조선 동포들에게 고함’ 등의 전단지를 석판으로 인쇄하였는데, 그 기초공작을 그가 책임졌다. 그는 일본어와 중국어 이외에 영어에도 능통하였다고 한다. 1942년 7월 화북조선청년연합회는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개편되었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도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편되어 독립동맹 산하에 편입되었다. 김학무는 독립동맹의 11명의 중앙집행위원 가운데 1인으로 선출되었으며, 6명의 중앙상무위원 중 한 사람으로도 선출되었다. 일제 정보기록에 1942년 8월경 김학무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정치지도원으로 재임하는 것이 확인된 것으로 볼 때, 그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편되기까지 정치지도원을 맡았다가, 개편 이후에는 독립동맹 중앙상무위원회 산하 선전부의 책임자를 맡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와 함께 1942년 12월 [[김무정]]이 섭현에서 설립하고 교장을 맡은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의 교무주임을 맡았다. 그러나 그가 교무주임을 얼마나 맡았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1943년 1월 전후 화북조선독립동맹에서 [[김무정]]의 주도로 1년 전 중국공산당에서 한바탕 시행되어 많은 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정풍운동]]이 실시되었다. 김학무가 책임자로 있던 선전부에서 토론 발제문을 만들었고, 참석자들은 6일동안 토론을 벌였다. 이때 과거 혁명운동에 대한 평가문제와, 조직운영과 조선의용군 지휘권 귀속문제 등이 주된 논쟁으로 드러났다. 김무정은 조선의용군 내부에 잔존해 있는 국민당의 영향을 소멸시키고, 중국공산당 노선에 충실하고 사상적으로 통일된 광력한 무장세력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 당시 김학무가 정풍운동에 어떠한 관점을 가졌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으나, 김구의 특무대에 가담한 적이 있고, 중국 국민당의 낙양분교에서도 활동한 경력, 공산주의에 심취하면서도 민족 독립에도 강한 집념을 품고 있는 점을 볼 때 정풍운동에 연루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김학무는 1943년 3월에 일시적으로 충칭에 있었다. 1948년 2월 남북협상 시기에 [[김구]]가 [[김두봉]]에게 보낸 서찰에는 김구가 1943년 10월에 보낸 편지의 구절이 인용되었다. 이 편지는 1943년 3월 김구가 김학무 편에 김두봉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답신이었다. 이에 따른다면 김학무는 1943년 3월경 충칭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 볼 때, 김학무는 정풍운동으로 인해 입지가 불안해지자, 1943년 3월에 충칭으로 피신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강의 <조선의용군사>에서는 김학무가 이 시기 실종되었는데 행적을 찾지 못했다며, '변절이 의심되었으나 증거를 오늘날까지 찾아볼 수 없다'라고 기록했다. 이로 볼때, 조선의용군 내부에서 갑자기 태행산을 떠난 김학무가 변절했다고 의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염인호의 <조선의용군>의 독립운동에 따르면, 김학무는 김구에게 조선의용군에 대한 지도를 요청했다고 한다. 이 '지도'는 김학무가 조선의용군 화북지대의 일정 세력을 이끌고 [[한국 광복군]]과의 제휴를 꾀했다는 의미일 가능성이 있다. 일본의 정보기록인 <외사월보> 1944년 3월호 '재지불령선인단체조직계통표'에 따르면, 김학무는 1943년 5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해방일보> 1944년 8월 10일자에 실린 [[예젠잉]]의 '중공의 항전 일반 상황 소개'에 언급된 조선의용군 대원 17명의 명단에 김학무가 포함되어 있는 점을 볼 때, 김학무가 1944년 8월 이전에 사망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로 볼 때, 김학무는 충칭에서 태행산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전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창익]]의 '연안시대의 독립동맹'에 따르면 1943년 5월에 화순 전투가 있었다고 하는데, 김학무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시기와 일치한 만큼 그가 이 전투에서 전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김학무의 전사에 대해 독립동맹이나 조선의용군 자료에서는 전혀 언급이 었다. 심지어 실종되었다는 식으로 언급되기까지 한다. 정풍운동을 통해 독립동맹을 완전 장악한 김무정이 김학무의 존재를 지워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실제로 [[8.15 광복]] 후 독립동맹에 관련된 많은 기사와 증언이 나왔으나, 김학무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생전에 조선의용대와 독립동맹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그의 위상에 비하면 어울리지 않은 대우라 하겠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1년 김학무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각주}} [[분류: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분류: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 [[분류:온성군 출신]] 요약: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각주}} · {|class="wikitable" · |- · rowspan=""| · colspan=""| · |} {{lang|}} · {{llang||}} · {{인용문|}} · {{인용문2|}} · {{유튜브|}} · {{다음팟|}} · {{니코|}} · {{토막글}} {{삭제|}} · {{특정판삭제|}}(이유를 적지 않을 경우 기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드시 이유를 적어주세요.) {{#expr:}} · {{#if:}} · {{#ifeq:}} · {{#iferror:}} · {{#ifexist:}} · {{#switch:}} · {{#time:}} · {{#timel:}} · {{#titleparts:}} __NOTOC__ · __FORCETOC__ · __TOC__ · {{PAGENAME}} · {{SITENAME}} · {{localurl:}} · {{fullurl:}} · {{ns:}} –(대시) ‘’(작은따옴표) “”(큰따옴표) ·(가운뎃점) …(말줄임표) ‽(물음느낌표) 〈〉(홑화살괄호) 《》(겹화살괄호) ± − × ÷ ≈ ≠ ∓ ≤ ≥ ∞ ¬ ¹ ² ³ ⁿ ¼ ½ ¾ § € £ ₩ ¥ ¢ † ‡ • ← → ↔ ‰ °C µ(마이크로) Å °(도) ′(분) ″(초) Α α Β β Γ γ Δ δ Ε ε Ζ ζ Η η Θ θ Ι ι Κ κ Λ λ Μ μ(뮤) Ν ν Ξ ξ Ο ο Π π Ρ ρ Σ σ ς Τ τ Υ υ Φ φ Χ χ Ψ ψ Ω ω · Ά ά Έ έ Ή ή Ί ί Ό ό Ύ ύ Ώ ώ · Ϊ ϊ Ϋ ϋ · ΐ ΰ Æ æ Đ(D with stroke) đ Ð(eth) ð ı Ł ł Ø ø Œ œ ß Þ þ · Á á Ć ć É é Í í Ĺ ĺ Ḿ ḿ Ń ń Ó ó Ŕ ŕ Ś ś Ú ú Ý ý Ź ź · À à È è Ì ì Ǹ ǹ Ò ò Ù ù · İ Ż ż ·  â Ĉ ĉ Ê ê Ĝ ĝ Ĥ ĥ Î î Ĵ ĵ Ô ô Ŝ ŝ Û û · Ä ä Ë ë Ï ï Ö ö Ü ü Ÿ ÿ · ǘ ǜ ǚ ǖ · caron/háček: Ǎ ǎ Č č Ď ď Ě ě Ǐ ǐ Ľ ľ Ň ň Ǒ ǒ Ř ř Š š Ť ť Ǔ ǔ Ž ž · breve: Ă ă Ğ ğ Ŏ ŏ Ŭ ŭ · Ā ā Ē ē Ī ī Ō ō Ū ū · à ã Ñ ñ Õ õ · Å å Ů ů · Ą ą Ę ę · Ç ç Ş ş Ţ ţ · Ő ő Ű ű · Ș ș Ț ț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각주 (원본 보기) (준보호됨)틀:인용문 (원본 보기) (준보호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