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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유철도]]의 원류.</ref>은 이미 확보된 자재를 사용할 수 있는 [[미터 궤간]]에 의한 공사를 주장하였고<ref>이는 추정컨대, 당시 이미 [[프랑스]]가 경부철도 및 [[경의선|경의철도]] 부설을 주장하고 있고, 경의선의 경우 대한제국 정부가 [[서북철도국]]을 통해 직접 공사를 추진하면서 재정상 미터궤를 잠정 채용하려는 의도를 보이기도 한지라, 여기에 편승하여 프랑스로부터 자재 도입을 꾀한 것으로 생각된다.</ref>, 한편으로 일본 군부에서는 본토에서 사용중이어서 자재와 [[철도차량|차량]]을 그대로 활용할 수 있는 [[케이프 궤간|3피트 6인치 궤간]]을 채용할 것을 주장하였다.<ref>상게서, 15쪽.</ref> 또한 철도작업국은 레일의 규격 역시 일본 본토와 동일한 60파운드(미터당 30kg) 레일을, 군부에서는 더 저렴한 50파운드(미터당 25kg) 레일의 채용을 주장하였다.<ref>상게서, 15쪽.</ref> 이 역시 건설비를 최대한 저렴하게, 그리고 가능한 자재를 조달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제기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가사이 기사장은 대륙 연결 간선으로서의 경부철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표준궤로 부설할 것을 강력히 천명하였고, 궤도 역시 중국에서 채용한 80파운드(미터당 40kg)레일 대신 75파운드(미터당 37kg)의 레일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당시 경부철도 주식회사의 대표였던 [[시부사와 에이치]]의 결정으로 최종적인 건설규격이 되었다. ===착공 및 완성=== '''경부철도주식회사 설립''' 노선 선정이 진행되는 한편으로 1896년부터 한국에 상당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던 관료 및 자본가들은 경부철도의 부설권을 획득하기 위한 민간회사를 만들고자 주식회사의 설립 특허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수상 이하 일본 정부 각계에 청원하고 있었다. 이는 일본 국내에서 일종의 애국운동으로 번져서 경제계 유력자 약 150명을 끌어들여 경부철도 주식회사 발기위원회를 발족하였다. 이후 수상 및 정계 원로에 요청하여 1900년 2월에 '한국경부철도속성에 관한 건의안'을 통과시켰으며, 그 해 2월 21일에 '제국신민의 외국에 있어서 철도 부설에 관한 법률안'이 중의원과 귀족원에 의해 통과되었다. 이 법률은 주식회사 성립에 대한 보조금 및 사채모집, 주식회사 설립 등에 대한 각종 특혜를 부여하는 등 경부철도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후 정부는 특별보조 명령을 내려 정부가 이자지급 보증하는 등의 예산지원까지 붙여지게 되었다.<ref>{{서적 인용|저자= |제목=한국철도100년사 |날짜=1999 |출판사=철도청 |쪽= 69-70|ISBN= }}</ref> 이후 자본금 모집은 거국적인 동원이라고 할 만큼 각계각소에 홍보와 참여 요구를 벌였다. 그 결과 전국 각지에서 주주를 포섭할 수 있었으며, 서구 열강으로부터의 차관 내지 자본 참여를 배제할 수 있었다. 이는 경부철도의 건설이 단순한 민간적 사업이 아닌 일본의 국가적 이해관계가 강하게 엮인 국책사업에 가까운 것이었다는 방증이라 할 것이다. '''초기 공사''' 이러한 과정을 거쳐 경부철도는 1901년 8월 20일 한강 이남의 [[영등포역|영등포]]에서 북부 기공식을 거행하였으며, 동년 9월 21일에 부산 초량에서 남부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이에 따라 영등포~사근천(군포 남측)간 13마일간, 그리고 초량~[[구포역|구포]]간의 11마일의 공사가 개시되었다. 공사는 선로의 연장을 따라 순차적으로 착공되어, 북부선은 명학, 진위<ref>현재의 [[진위역]]이 아닌 과거 존재했던 역으로, 오산과 서정리 사이에 존재했었다. 개업 당초의 역명 목록에는 무배치역으로 존재했으나, 1910년 경 시간표에서는 이미 폐지되었다. 현재 진위역 서북쪽에 위치해 있던 것으로 추정. </ref>에 1903년 말에 이르렀다. 한편으로 금강을 통해 자재를 반입하여 [[부강역|부강]]에서 전의까지 36마일 여의 공사가 1904년 1월까지 진척되었다. 이 과정에서 지지대를 터널로 경유하려던 노선이 대한제국 정부의 반대로 인해 1902년에 [[군포역|군포]]를 경유 사시현으로 우회하는 선형으로 변경되었다. 한편 남부는 초량~구포 구간의 11마일 간은 1901년 10월부터 초량으로부터 공사가 순차적으로 진척되어 1903년 말에는 공사 진척이 밀양을 지나 [[남성현역|성현]]에 이르고 있었다. 터널 공사가 다수 존재하여 토목의 준공은 1904년에 이르러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러일전쟁과 속성공사''' 경부철도가 건설되는 와중에 러일간의 긴장 강도가 올라가면서 군사수송상의 필요가 상승함에 따라 빠른 공사가 요구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1903년 12월 2일 경부철도 주식회사에 대해 일본정부는 속성명령을 내려서, 해당 철도를 1905년중에 전 구간을 개통할 것을 지시하였다. <ref>상게서. 30쪽.</ref> 경부철도로서는 일개 사설회사로서 이러한 요구에 대응하기 어렵다고 보고 조직을 개편하여 주요 임원을 관선으로 변경하기로 하고, 회사가 발행하는 채권에 대해 정부의 지불보증을 해 줄 것, 그리고 부설비에 대한 보조를 일본 정부에 건의하였다. 일본정부는 이를 가결하여, "경부철도 속성 보조 및 책임 지출에 대한 자구안"이라는 칙령으로 공포하였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서 정세가 급박해짐에 따라 1904년 연내에 영등포에서 초량에 이르는 전 노선을 개통하도록 명령을 변경하였다. 이에 따라, 이미 어느정도 진척이 있던 부산~성현 간의 남부 구간과 영등포~부강 간의 구간 외에 미완성 상태의 성현~부강 간의 121마일 구간의 급속 진행에 착수하였다. 북부에서는 부강에서 영동까지, 남부에서는 성현에서 영동까지의 공사를 진척하여, 1904년 10월에는 남부구간이 준공되었으며, 여기에서 심천까지 6.6마일을 더 북진하였다. 반면 북부 구간은 11월에 이르러서 남은 구간을 준공하였다. 다만 급속 공사를 위해 이들 구간 중 일부에서 규격을 낮추어 구배나 곡선 반경등이 열악한 임시선로를 부설하였다. 특히 대전 이남의 증약, 구복 터널 공사의 지연 때문에 [[스위치백]] 식의 가설선로를, 또한 남부에서는 성현 터널을 대체하여 8단 스위치백의 가설선로를 부설하여 공사를 진행하였다. 이들 공사를 진행하는 와중에 러일전쟁이 발발하게 되면서, 철도 건설은 더 한층 긴급수단이 되었다. 이 와중에 공사 진척이 느린 70마일 구간에 대해서 24파운드(미터당 12kg)의 레일을 채용한 임시 협궤철도 안까지 제기가 되어서 긴급발주 형태로 자재를 도입해 반입하였으나, [[제물포 해전]]에서 러시아 군함이 조기에 격침되어 철도부설의 긴급성이 크게 줄어들어서 임시철도는 중단되었다. 이후 공사가 진척됨에 따라 열차 운행이 가능한 구간에 대해서는 일반인의 편승 및 화물의 임시영업이 개시되었으며, 1905년 1월 1일자로 전구간 정식 개통을 달성하게 되었다. '''노동 동원과 저항 운동''' 한편으로 경부선 및 경의선의 건설은 한반도에서는 유례가 없을 만큼의 대규모 토목공사였고, 그만큼 막대한 노동력이 소요되는 작업이었다. 그만큼 민간에 발생한 폐해도 적지 않았다. 건설 초기에는 한국계 토건업체가 노동 송출과 부자재의 공급을 하였으며, 영세농민이나 임노동자들의 임금노동 위주로 충원이 되었으며 급여 수준도 초기에는 심하게 열악하지는 않았기에, 중간 착취나 노동강도 문제로 분쟁이 생기는 정도였다. 그러나 러일간 분쟁이 가시화 되어 속성공사가 추진되면서 일본계 토건업체나 심지어 일본군의 철도대대나 공병대까지 투입되는 상황이 되면서 인근 주민을 강제동원하고, 지방관청으로부터 자원을 공출하는 식이 되면서 갈등이 첨예화되었다. 여기에 군표나 수표 지급에 따른 교환 손실, 다단계 하청에 따른 부당 공제, 농번기 강제동원이나 징발, 약탈 등으로 인한 손실등은 고스란히 한국인들의 피해로 이어졌다. 또한 폭행이나 살인까지 벌어져 치안이 지극히 악화되었고, 지방관들 조차 일인들을 통제할 수 없어 오히려 구타를 당하는 지경까지 이르기까지 하였다.<ref>상게서. 147-161.</ref>. 이런 불만은 철도 시설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게 된다. 선로에 바위를 올려놓거나, 시설물을 파괴하는 일이 일어나고, 열차에 돌은 던지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였다. 또한 이런 파괴행위가 의병운동으로 조직화되어 역을 습격하기에 이르기도 하였다. 또한, 노동 동원에 개입하여 이득을 보던 일본계 건설업자나 지방관이나 아전들이 습격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런 저항 사례 중 특히 잘 알려진 것으로, 1905년 11월 22일에 발생하였던 열차 투석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유리파편을 뒤집어써서 경상을 입은 사건이 있다. 이러한 저항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은 한국정부에 치안을 압박하다 못해, 러일전쟁기에는 치안 유지를 위해 군정과 군율을 동원해 폭압적으로 대응하기까지 하였다.<ref>상게서. 162-173</ref> ===개통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국유화와 조직개편''' 러일전쟁이 1905년 9월에 강화조약으로 종결되면서 일본은 사실상 한반도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철도 사업에 대해서도 구태여 주식회사의 형태로 놔둘 이유가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이미 1902년에 경인철도를 경부철도 주식회사에 합병하여 영등포 이북 구간을 경부철도가 공용하도록 개편해 둔 상태였지만, 한편으로 전쟁중에 임시군용철도통감부에서 건설권을 강탈에 부설을 실시한 [[경의선]] 및 건설중인 [[경원선]]이 별개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를 두고 일본 정부 부처간의 논의 끝에 조선통감부를 설치하고 여기에서 경영케 하도록 하는 방침이 결정되어, 1906년 6월에 경부철도를 정부가 매수하여 국유화 하는 것이 결정되었다.<ref>{{서적 인용|저자=교통부 편 |제목=한국교통60년약사 |날짜=1958 |출판사=교통교양조성회 |쪽= 33|ISBN= }}</ref> 이에 따라 동년 7월에 통감부 철도관리국이 설치되어 한국 내에 설치된 경인, 경부, 경의, 경원 각 철도의 통일 경영을 개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 이후의 경기 냉각으로 경영여건이 극히 악화되었던 바 그 조직을 추곳하고 경비절감을 꾀할 수 밖에 되어 이후 1909년에는 다시 통감부 철도청으로 개칭하여 조직을 축소개편하였고, 이후 다시 일본 본토의 철도원 소관으로 일원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총독부가 설립되면서, 1년여만에 최종적으로 총독부 철도국이 한국 내의 철도를 총괄하게 되었다.<ref>상게서, 36-38쪽.</ref> '''초창기 개량공사''' 국유화 이후 선로상태가 열악한 가설선 수준의 경의철도 개량이 일단락 되면서 경부선의 본격적인 개량이 추진되었다. 다수의 임시 가설구간이 존재하던 철도였기 때문에 급구배와 급곡선을 최대한 축소하려는 공사를 실시하였다. 대표적으로 [[약목역|약목]]~[[김천역|김천]] 사이의 구간은 금오산 남쪽의 산기슭을 터널로 관통하는 선형이었는데, 이를 폐지하고 [[구미역|구미]], [[대신역|대신]]을 경유하는 완경사의 우회선을 새로 건설하기도 하였다. 또한 초량까지만 건설된 철도를 남쪽으로 연장하고, 부산항의 축조와 더불어 열차가 직접 부두에 진입할 수 있는 [[인입선]] 공사를 실시하였다. 이를 통해 [[부산역]]과 구 부산잔교역이 정비되어서 전체 구간을 완성하게 되었다. 또한 1912년에는 한강교량을 복선화, 1914년에는 [[노량진역|노량진]]과 [[용산역|용산]]의 구내 개량사업을 완료하여 경인선과 공용하는 구간의 용량을 확충하였다. 성현터널 주변 역시 1920년에 개량공사에 착수하여 2,323m의 신규 터널을 굴착하고 터널 전후의 경사도도 20퍼밀에서 10퍼밀로 완만하게 바꾸었으며, 이때 [[남성현역]]을 설치하여 1923년 5월부터 운행을 개시하게 되었다. <ref>{{서적 인용|저자=센코카이 |제목=조선교통사 |권=제2권|날짜=2017 |출판사=BG북갤러리 |쪽= 52-57|ISBN= }}</ref> '''복선화''' 경부선은 일제 당시 가장 핵심 간선으로서 지속적인 개량과 정거장의 증설, 열차 증강이 이어졌으나. 1930년대에 이르러 근본적인 시설 개량이 필요할 정도가 되었으며 이에 따라 [[경의선]]과 함께 [[복선]]화 및 시설 대개량이 결정되어 1937년부터 착수가 되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신간선의 전신인 [[탄환열차]] 건설계획이 구상되고 있는 상황으로, 이에 호응하여 가급적 구배와 곡선이 최소화된 노선으로의 개량이 꾀해지지만 [[중일전쟁]]의 개전에 따른 물가상승 및 자재난으로 인해서 극적인 개량에는 이르지 못하고, 최소곡선반경 600m, 최대경사는 8퍼밀로 하되 하행선로에 한해 10퍼밀까지 허용하는 기준 하에 복선화 개량이 착수되게 되었다<ref>상게서, 66-68쪽.</ref>. 개량공사 이전에 이미 1918년에는 부산~[[부산진역|부산진]]간, 그리고 1919년에 영등포~[[서울역|서울]]간의 복선이 사용 개시되어 있었다. 1937년의 복선화 방침이 확정될 즈음에 1936년부터 이미 일대의 공사가 착착 착수되어서, 1937년에는 부산진~[[삼랑진역|삼랑진]]간 46.3km와 영등포~[[대전역|대전]]간 158.1km의 복선 공사가 착수되었으며, 1940년에는 삼랑진~대전간 234.0km구간이 착수되었다. 부산진~삼랑진간은 1940년 4월에 복선운전이 개시되었으며, 삼랑진~대전간은 1943년에 완성구간에 한한 복선운전이, 대전~영등포간은 1939년 6월에 복선운전이 개시되었다. 그러나 당초 1944년에 전구간의 복선운전을 실시하는 방침은 전쟁으로 인한 공사의 급증과 물가, 자재난으로 인해서 그 달성이 매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되었다. 특히 1939년에는 철강 등 주요자재의 할당제도가 실시되면서 교량 등의 핵심 시설물 건설을 위한 자재 확보가 어려워서 그 진척이 심각하게 지연되었다. 1944년 7월에 사이판 함락에 따른 전황의 악화에 따라 전쟁 중의 물자 전가수송이 더더욱 중시되게 되면서, [[남만주철도|만철]]이나 조선 내의 [[사철]] 등지에서 레일을 공출하여 복선화 및 [[조차장]] 건설 등에 자재를 충당하는 방침이 결정되었다. 이에 힘입어 1944년 12월에는 복선의 부설이 완료되어, 1945년 2월 25일에 전 구간의 복선 운전이 개시되었다. 다만, 교량 부설이 크게 지연된 낙동강교량과 경의선 청천강교량 및 대령강교량은 단선 운행이 실시되었으나, 최종적으로 1945년 6월 1일에 전 구간의 복선화가 완료되었다. ===해방 이후=== '''해방 직후 상황''' 경부선은 핵심 항만인 부산항과 서울을 연결하는 철도로서 해방 직후의 혼란에서 경인선과 함께 가장 우선적으로 복구와 운행 재개가 이루어졌다. 차량과 시설은 전쟁 당시의 육운전가수송으로 인한 혹사와 인력, 자재 부족으로 인한 보수의 미비로 인해 상당히 피폐해져 있었고, 해방 전후에는 석탄 등의 수급마저 멈춰서 사실상 운행중단 상태에 빠져있었다. 이 상황 하에서 행정을 인수한 미군정은 정상화를 위해 한국인 직원의 협조를 얻기 위해 일본인 직원의 해고 및 귀국을 단행하였고, 이로 생긴 공백을 해결하기 위해 미군의 철도대대를 1945년 11월부터 각각 서울과 부산에 투입하였다.<ref>{{서적 인용|저자= |제목=한국철도사 |권=제4권 |날짜=1992 |출판사=철도청 |쪽= 76-77|ISBN= }}</ref> 해방 이후 탄광시설의 사보타지와 수입 유연탄 확보의 곤란으로 인해 1947년에 이르도록 열차 운행은 상당한 파행을 겪었지만, 이후 점차적으로 운행태세를 회복하기 시작했고 여객과 화물 수송량 역시 계속 증가하였다. 미국이 전시수송용으로 제작하여 유럽 등지에 투입하던 [[소리2형 증기기관차]]를 이시기에 대거 한국에 공여하여 동력차 수급에 기여했지만, 예비부품의 부족과 좌우대립으로 인한 사보타지, 분단 등으로 생긴 석탄, 전력 수급의 장애 등이 겹치면서 해방당시의 상황은 지극히 불안정하였으나, 정부수립 이후 느리게 정상화를 향해가고 있었다. '''[[한국전쟁]]''' 이 상황에서 결정타를 입힌 것은 한국전쟁의 발발이었다. 개전 초기에 빠른 전선 후퇴 과정에서 정부는 경부선을 따라 후방으로 철수하였고, 이후 미군의 거부폭격으로 인해 서울 및 용산 일대의 철도시설이 큰 타격을 입었으며, 한강철교, 금강철교, 낙동강철교 등 주요 병참선에 걸치는 경부선의 철교 역시 폭파 처분되었다. 이후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의 철수에 따라 서울을 수복하고 복구작업이 개시되었지만, 1951년 1.4후퇴로 인해 재차 서울에서 철수하였다. 1951년 3월 14일에 이르러서야 재수복이 달성되었으며, 당시 격전과 남북간의 시설 사용거부 조치로 서울지구의 시설은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산업화 연간의 발전=== '''여객수송의 발전''' 1955년 UN군 관할의 군수수송 우선 체제에서 다시 한국정부로 철도 관할이 이관되면서, 경부선을 위시한 각 철도의 복구와 발전이 본격화되었다. 동년 8월 15일에 특급 [[통일호]]가 운행개시하면서 서울~부산간의 7시간대 운전이 개시되었으며, 이는 이후 디젤 견인열차인 [[무궁화호]]가 6시간 30분, 그리고 이후 이보다 빠른 재건호의 투입으로 일제당시의 특급 보다 빠른 6시간 10분대 주파를 달성하게 되었다. 이후 산업화 연간의 여객과 화물의 물동량이 급증하면서 경부선의 교통량은 이후 지속 증가추세를 보이게 된다. 이에 따라 설비의 현대화도 적극 추진되어, 자동폐색장치(ABS)의 도입 및 [[새마을호|관광호]] 운행의 안전확보를 위한 [[ATS]]의 도입도 1960년대에 이루어진다. 1974년에는 [[서울 지하철]] 및 경인, [[경원선]]과 연계하여 서울~[[수원역|수원]] 간의 전철화가 개통되어 전동열차의 운행이 개시되었다. 다만 이 당시에는 일반열차들과 [[복선]]을 공유하였기에 배차간격은 40분에 1대 정도에 그치는 수준이었다. '''컨테이너 수송과 화물 기능의 집적화''' 경부선 화물의 주종을 이루는 컨테이너 화물의 도입은 1973년에 용산~부산간의 노선으로 최초로 시작되었다. 이후 도로의 발달로 [[유개차]] 수송에 의존하던 일반 잡화들이 쇠퇴하였으나, 컨테이너 수송은 꾸준히 성장세를 유지하였다. 이후 화물취급의 효율화를 위하여 남부화물기지(현재의 [[오봉역]]) 및 부산진역의 개량, [[의왕역|부곡역]]의 조차장화 및 [[대전조차장]] 설치가 이루어졌으며, 경부선 각역의 대피선 증설 및 유효장 확대 또한 병행되었다. '''혼잡문제의 대두''' 핵심 간선인 경부선 연선은 다수의 인구와 대량의 산업이 집적되어 있었던 만큼 산업화 시기의 높은 경제성장률에 힘입어 그 여객과 화물 수요가 급속히 성장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처리능력의 한계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다수의 대책이 제안되었으며, 그 중에는 [[경부고속선|경부고속철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경제규모나 재정적 여유가 부족한 상황에서 실제 적극적인 추진은 90년대까지 미루어졌으며, 그 중간 대안으로 전철화와 복복선화가 추진되었다. <ref> {{서적 인용|저자=세종종합기술단 |제목=경부선 서울~부산간 수송력증강기본조사 |날짜=1976 |출판사=삼광문화사 |쪽= 9-12 |ISBN= }}</ref> 영등포에서 수원에 이르는 부분 복복선화는 1976년 6월에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포함되어 77년부터 80년까지의 계획으로 추진되었으며, 1981년 12월 23일에 개통되었다. 이를 통해 일반열차와 전동열차가 별개의 선로를 사용하게 되면서 선로용량이 대폭 확충되었으나, 수원역에서 전동열차 회차시의 교차지장이 잔존하여 이 부분이 추후 추가 복복선화가 진행될 때 까지 병목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1975년에 경부선 전구간에 걸친 전철화계획이 수립되었다. 이는 특히 1973년 10월 발발한 "욤 키푸르" 제4차 중동전쟁으로 인해 제1차 오일쇼크로 유가가 급등하면서 철도운영에 상당한 위기를 겪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럽 혼성 차관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투입 대비 효율에 대한 의문으로 중단되기도 하였으며<ref>{{뉴스 인용 |성= |이름= |날짜=1974년 11월 28일 |제목=늘려야할 간선수송량 경부선전철화 계획 백지화 따른 과제 |url= |뉴스=매일경제 |출판사= |위치= |확인날짜= }}</ref>, 이후 전철화 계획은 신경부선 등의 고속전철 대안과 경합하면서 추가로 진척되지 못한 채 다음 시대를 기다리게 되었다. '''고속화와 PP새마을의 등장'''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고속철도 도입 지연을 만회하기 위한 여객열차의 증속이 추진되었다. 이미 관광호 차량 도입시점에 150km/h 대응이 가능한 객차를 도입하고 있었으나, [[철도 신호|신호]] 및 시설 수준은 이에 미치지 못할 뿐더러, 동력차의 성능 역시 한계가 있었다. 이에 따라 종합적인 증속을 추진하기 위하여 선로, 차량, 신호, 운전분야에 걸쳐 경부선 속도향상위원회가 1984년 6월 7일 구성되었으며, 차량의 개선 및 궤도 중량화, 시설 기준 개량, 등의 개량과 함께 최고속도 135km/h를 낼 수 있는 [[표준선구]]를 설정하여 최대한의 속달화를 추진하였다.<ref>{{서적 인용|저자= |제목=한국철도차량 100년사 |날짜=1999 |출판사=(사)철도차량기술검정단 |쪽= 1540-1546 |ISBN= }}</ref> 이를 통해 1985년 열차시각 개정을 통해 기존 4시간 40분에 주파하던 새마을호는 4시간 10분의 운전시간을 달성하게 되었다.<ref>"새마을호 서울→부산 30분 단축|여객열차 증설…운행시간 개편". 중앙일보, 1985년 11월 9일 보도.</ref> 물론 이를 위해서 정차역은 이른바 "서대동부"라 불리는, 대전과 동대구만 정차하는 극단적인 속달운전을 실시하는 상황이었으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속도를 달성하였다. 이후 1987년에는 새마을호의 고급화를 달성하기 위한 전후동력형 새마을호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 차량은 경량화된 동력차(축중 17톤)을 전후에 연결한 [[동차]]형의 차량으로, 고출력에 기반한 고속성능과, 종착역에서의 [[입환]]이 생략되어 그 운용효율이 높아서 상당기간 경부선의 간판열차로 활약하였다. ===근래의 발전=== '''병점차량기지 신설 및 복복선 구간 연장''' PP새마을의 투입과 여객열차의 증강이 잇따르긴 했지만 90년대의 경부선은 혼잡이 격심하여 주말에는 좌석매진이 일상이었다. 또한, 수원역에서 전동열차의 반복을 위해서 교차지장이 생기는 문제로 전동열차 증강의 어려움은 물론, 안전 문제<ref>과거 수원역의 전철 승강장은 1선 사이에 위치해 있는데다, 표준선구 종점이어서 상당한 고속으로 통과열차가 지나다녔었다. 안전대책으로 통과 열차 접근시에는 경광등과 경보음이 울리는 장치까지 설치되어 있었을 정도.</ref>까지 있어서 그 해결이 필요한 실정이었다. 이에 따라 경부선 복복선을 [[천안역|천안]]까지 연장하고, 중간에 병점에 차량기지를 신설하여 전동열차를 대폭 증강, 지속되는 좌석난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1991년에 천안까지의 복복선화 사업에 착수하였으며<ref>{{뉴스 인용 |성= |이름= |날짜=1991년 1월 17일 |제목=수도권전철 천안까지 연장 |url= |뉴스=동아일보 |출판사= |위치= |확인날짜= }}</ref>, 중복투자 논란 및 용지매수 지연 등의 우여곡절을 거치면서<ref>{{뉴스 인용 |성= |이름= |날짜=1994년 5월 2일 |제목=수원~천안 전철건설 중단될듯 |url= |뉴스=동아일보 |출판사= |위치= |확인날짜= }}</ref> 당초 계획된 95년에서 5년여가 지연된 끝에 2003년 4월 30일에는 수도권전철의 병점연장 및 병점차량기지가 이루어져 수원역에서의 교차지장 문제가 해소되었으며, 2005년 1월 20일에는 천안 연장과 상시 [[급행열차]] 운행이 개시되었다. '''전철화''' 경부고속철도가 1992년 기공되어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전구간 동시개통이 아닌 단계별 개통으로 변경되었고 이에 따라 기존선인 경부선을 활용한 운행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장기 보류되었던 수도권전철 구간 외의 구간의 전철화가 결정되었으며, 이에 따라 2004년에 경부선 대전조차장~[[옥천역]]구간, [[신동역]]~[[부산역]]구간의 개량과 전철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병행하여 급곡선구간의 직선화와 건널목 입체화, 터널 및 교량의 개량공사 등도 진행되었다. 또한 경부선 잔여구간의 전철화 역시 2002년에 착공, 순차적으로 진행되어서 천안~대전조차장 까지의 전철화가 2005년에, 옥천~신동 구간의 전철화가 2006년에 달성되어 [[디젤기관차]]에 의해 운행하던 일반열차들의 전기견인이 개시되었다.<ref>{{뉴스 인용 |성= |이름= |날짜=2006년 12월 10일 |제목=경부선 개통 된지 101년만에 전구간 전철화완료 |url= |뉴스=전력신문 |출판사= |위치= |확인날짜= }}</ref>. 요약: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각주}} · {|class="wikitable" · |- · rowspan=""| · colspan=""| · |} {{lang|}} · {{llang||}} · {{인용문|}} · {{인용문2|}} · {{유튜브|}} · {{다음팟|}} · {{니코|}} · {{토막글}} {{삭제|}} · {{특정판삭제|}}(이유를 적지 않을 경우 기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드시 이유를 적어주세요.) {{#expr:}} · {{#if:}} · {{#ifeq:}} · {{#iferror:}} · {{#ifexist:}} · {{#switch:}} · {{#time:}} · {{#timel:}} · {{#titleparts:}} __NOTOC__ · __FORCETOC__ · __TOC__ · {{PAGENAME}} · {{SITENAME}} · {{localurl:}} · {{fullurl:}} · {{ns:}} –(대시) ‘’(작은따옴표) “”(큰따옴표) ·(가운뎃점) …(말줄임표) ‽(물음느낌표) 〈〉(홑화살괄호) 《》(겹화살괄호) ± − × ÷ ≈ ≠ ∓ ≤ ≥ ∞ ¬ ¹ ² ³ ⁿ ¼ ½ ¾ § € £ ₩ ¥ ¢ † ‡ • ← → ↔ ‰ °C µ(마이크로) Å °(도) ′(분) ″(초) Α α Β β Γ γ Δ δ Ε ε Ζ ζ Η η Θ θ Ι ι Κ κ Λ λ Μ μ(뮤) Ν ν Ξ ξ Ο ο Π π Ρ ρ Σ σ ς Τ τ Υ υ Φ φ Χ χ Ψ ψ Ω ω · Ά ά Έ έ Ή ή Ί ί Ό ό Ύ ύ Ώ ώ · Ϊ ϊ Ϋ ϋ · ΐ ΰ Æ æ Đ(D with stroke) đ Ð(eth) ð ı Ł ł Ø ø Œ œ ß Þ þ · Á á Ć ć É é Í í Ĺ ĺ Ḿ ḿ Ń ń Ó ó Ŕ ŕ Ś ś Ú ú Ý ý Ź ź · À à È è Ì ì Ǹ ǹ Ò ò Ù ù · İ Ż ż ·  â Ĉ ĉ Ê ê Ĝ ĝ Ĥ ĥ Î î Ĵ ĵ Ô ô Ŝ ŝ Û û · Ä ä Ë ë Ï ï Ö ö Ü ü Ÿ ÿ · ǘ ǜ ǚ ǖ · caron/háček: Ǎ ǎ Č č Ď ď Ě ě Ǐ ǐ Ľ ľ Ň ň Ǒ ǒ Ř ř Š š Ť ť Ǔ ǔ Ž ž · breve: Ă ă Ğ ğ Ŏ ŏ Ŭ ŭ · Ā ā Ē ē Ī ī Ō ō Ū ū · à ã Ñ ñ Õ õ · Å å Ů ů · Ą ą Ę ę · Ç ç Ş ş Ţ ţ · Ő ő Ű ű · Ș ș Ț 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