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기습남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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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학술

본 문서는 『6.25전쟁사2권 북한의 전면남침과 초기 방어작전』 을 기반으로 작성되었음을 알립니다
— ISSN 1739-2705
{{{전쟁이름}}}
군사 충돌 정보
날짜 1950년 6월 25일 ~ 30일
결과 북한의 승리
북한의 전략적 목표달성 실패
북한의 서울 함락
미국의 참전
교전단체
{{{단체1}}} {{{단체2}}}
강건 중장
한일무 중장
왕연 중장
무정 중장
김웅 중장
김광협 소장
채병덕 소장
정일권 소장
손원일 소장
박옥규 소장
신현준 소장
김정렬 대령
병력:
201,050
병력:
103,827

북한군의 남침계획과 기습남침

한국전쟁 직전 상황도.gif

북한군의 남침계획은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나 국방부에서는 “1950년 6월 말에 전면공격으로 전쟁개시 2일차에 신속히 서울을 점령하고, ‘인민봉기’를 유발하여 한국정부를 전복하는 것이었다. …중략… 이를 위해 북한군은 수도 서울을 전쟁 개시 2일차에 신속히 점령하고, 한강이북에 전개된 국군 전방사단의 주력을 격멸하도록 하는 것”[1]이라 말하고 있다.[2]

가장 확실한 것은 북한군의 작전은 8월 15일 전에 전쟁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3] 이를 위해서 총 3단계의 작전을 구상한다. 1단계에서 국군 주력을 격멸하고 2단계에서 국군 증원병력 격멸 및 전과확대 마지막 3단계에서는 국군 잔적 소탕하는 것이었다.

한국전쟁 북한군 작전도.jpg

북한군은 국군을 포위섬멸하기 위해서 포위소멸구역을 설정하고 서울을 2중, 3중으로 포위하여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면서 주력을 격멸하고자 하였다. 먼저, 북한군은 서울을 직접 공격하는 제1, 제3, 제4보병사단으로 서울이북에서 1차 포위를 시도하고, 2차로 개성-김포로 진출하는 북한군 6보병사단과 춘천-가평-하남으로 진출하는 북한군 제2보병사단이 한강이남에서 다시 한 번 국군 주력을 포위 격멸하는 것이었다.[4] 북한군은 이러한 작전 하에 틀:날짜/출력 새벽 4시 기습 남침하였다.

전쟁 초기 국군의 대응

전쟁 직전 6월 24일 육군본부 정보상황실은 총참모장인 채병덕 소장에게 지난 이틀간 북한군의 활동이 심상치 않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채병덕은 내일 8시까지 정보를 수집보고하라고 지시하였다.

6월 25일 01시 옹진반도 17연대로부터 북한군이 38선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보고하였고, 03:00에는 제1사단으로부터는 임진강 북한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03:30 7사단으로부터 북한군이 7사단 전역에 포격 중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에 당시 육군본부 상황실 당직 조병운 대위는 38선 전역에서 보고가 올라와 패닉상태였다. 정신을 차린 조병운 대위는 당직사령에게 보고하였고, 당직사령은 바로 채병덕에게 보고하려고 전화했으나....

전날 육군회관에서 회식을 했기에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에 당직사령은 차를 타고 채병덕 총참모장 관사로 가서 그를 깨우고 전황을 보고하였다. 보고를 받은 채병덕은 좀 큰 규모의 국지전이라 판단하고 5시 신성모 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전화통신망이 끊어진 것이다. 그 이유는 신성모가 신사는 주말에 일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하에 전화코드를 뽑아 놓아서였다. 그래도 상황보고를 해야했기에 채병덕은 상황판 제작을 지시하고 장관 비서인 신동우 중령에게 연락하여 장관의 위치를 파악하였다. 그리고 차를 타고 마포장으로 가서 신성모에게 보고하였는데 이때가 07:00 개전한지 4시간이 흐른 뒤 였다.

신동우 중령의 회고에 의하면, “자못 놀라고 당황하는 표정이었으며 짐작은 하였지만 적이 일요일에 기습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던 것 같았다”라고 하였다.[5][6]

한편 개전 직후 육군 지도부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과 김백일 대령은 9시가 넘어서야 육본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행히 보고를 받고 가장 먼저 도착한 이치업 대령이 자신의 상관들이 부재중이자 자신이 책임을 지고 전군에 비상령을 내려 06:00에 전군에 비상령이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개전한지 2시간이 지난 후였고, 의정부 전선은 붕괴되던 중이었다.

또한 당시 국군은 23일 24:00에 비상경계가 해제되면서 장병에게 휴가와 외출 · 외박을 주었고, 대부분의 부대에는 병력이 부족하였다. 이에 육군본부는 장병소집을 위해 전화, 전령, 방송, 가두방송 등 모든 방법을 강구하였다. 그래서 25일 14:00가 넘어서야 80~90%의 장병이 소집될 수 있었다.

그러나 통신망 두절로 인해서 전황을 파악하지 못했고, 거기에 6사단과 8사단과의 연락이 두절되면서 전황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채병덕은 신성모에게 보고한 이후 다시 육본에 돌아와 상황을 보고받았다. 그러나 통신망이 파괴되어 상황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자 채병덕은 전황을 직접 살피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먼저 1사단이 있는 문산으로 방문하였다. 1사단의 경우 북한군의 공세를 충분히 막아내고 있어서 채병덕은 백선엽 대령을 칭친하고 7사단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7사단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7사단은 개전한지 6시간 넘도록 북한군의 집중 공세를 받아 사단 자체가 너덜너덜해진 상황이었다. 사단 병력도 2개 연대에서 1개 연대 규모로 축소되어 있었다. 이에 채병덕인 이번 북한의 침공이 단순한 국지전이 아님을 파악하였고, 곧바로 육군본부로 돌아가 후방 3개 사단[7]을 서울로 불러들이고 수도사단을 7사단이 있는 의정부 지역으로 투입했다.

의정부 전역을 제외한 나머지 전역은 북한군의 공세를 막고 적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문산의 1사단의 경우 북한군을 밀어내 일부 지역을 탈환하기도 하였고, 춘천의 6사단의 경우 북한군 1개 군단을 거의 전멸할 정도로 두들겨 패고 있었고, 강릉의 8사단의 경우, 사단장이 독립군 출신이어서 그런지 게릴라 전으로 북한군의 진군을 저지하고 북한군에게 큰 출혈을 감수하도록 하였다.

이에 채병덕은 의정부 전역을 지키면 적의 침공을 막고 오히려 역습을 가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였다. 그래서 이 지역에 모든 사단을 투입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급한 나머지 병력을 집결시켜 한꺼번에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 오는 족족 보내는 축차투입을 실시했고, 당연히 오는 족족 북한군에게 각개격파 당했다. 결국 의정부 전역에 투입된 5개 사단[8]은 모두 전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해군의 경우, 25일 9시 해군본부 작전명령 갑 제18호에 따라 전 군에 비상경계돌입과 전투준비를 하였다. 해군은 해안방어와 적 게릴라부대 공격 저지에 초점을 두었는데 특히 2함대의 경우, 6월 25일 야간 대한해협에서 적 게릴라부대 600명을 태운 선박을 격침했고, 옥계 근해에서도 25,26 양일간 북한군 766 게릴라부대와 제945육전대의 상륙선박을 격침했다. 인천의 제1함대의 경우 웅진에 고립된 제17연대의 해상철수를 지원하였다.

공군의 경우, 해군보다 상황이 안좋았다. 해군이 소수의 교전이 가능한 함정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공군이 보유하고 있던 것은 L-4 연락기 8대, L-5 연락기 4대 그리고 AT-6 택산 훈련기 10대로 이 중에서 단 한대도 공중전은 커녕 폭격조차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으므로 한국 공군은 보유한 기체들을 동원해 북한군에 대한 정찰을 나서는 동시에 가지고 나간 폭탄과 수류탄을 북한군에게 집어 던지는 식으로 최대한 피해를 입히려 시도했다.[9]

25일 전쟁 발발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신성모를 불러서 "군사경력자들의 자문을 받아 난국을 타개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신성모는 26일 10시 국방부에 현역 및 재야원로 군사경력자들을 불러들였다.[10]

문제는 이 회의에서 군사경력자들의 의견은 그냥 씹혔다. 신 장관과 채 총참모장은 회의를 주관하면서 “현재 우리 국군이 의정부에서 북한군을 격퇴하였고 지금 해주에서는 북진 중이다"라 주장하였다.

하지만 육군 소장이던 김홍일 장군은 지금 국군의 통신망이 두절되어 지휘체제가 무너진 상황이니 이를 우선적으로 확보하고 그 다음에 반격이든 지연작전이든 있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가볍게 씹혔다.

사실 회의를 들어가기 전에 채병덕 총참모장은 수도사단장 이종찬 대령을 불러 수도를 포기하려고 하는데 어떠냐고 물었고, 이에 이종찬은 수도 서울을 사수해야한다고 강력하게 어필하였다.[11][12]

군 원로회의 이후 채병덕 총참모장은 비상국무회의(26일 11시)에서도 “적을 의정부 밖으로 격퇴하였다. 3일 안으로 평양까지 점령하겠다.”라는 낙관론을 전개하였다. 26일 심야에 의정부 축선이 다급해지는 상황임을 파악하자 육해공 총참모장과 국방장관은 정부의 망명을 고려하게 된다. 그러나 다음에 있던 비상국무회의에서 신 장관과 채 총참모장은 낙관론만 전개하였다. 또 회의 이후 국회에도 참석하여 “서울만은 사수할 것이며 반격으로 전환하여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을 것이다.”라는 요지의 발언만 되풀이하였다. 이때 신성모는 국무총리 자격으로 정부의 이동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암시하였다. 27일 05:00 신성모는 정부 이동을 명령하고 방송을 지시하였다. 전쟁 중 혼선으로 인해 6시에 방송이 나갔지만 곧 취소되고 정부가 이동하지 않는다는 정정발표가 있었다.

6월 27일 09:00 전황이 좋지 않음을 알게된 신성모 장관은 수도 사수가 어렵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지만, 분위기가 싸해지자 말을 바꾸고 정부는 이동하더라도 군은 서울을 사수하자는 발언을 하였다. 그래서 정부와 국방부, 해군과 공군은 수원으로 철수하게 되었고 육군본부는 서울에 잔류하기로 하였다.

개전 초 정부의 대응

이승만 대통령은 10:00에 경무대 경찰서장 김장흥 총경으로부터 소식을 접하게 된다.[13] 이후 11:00 신성모 국무총리 서리 주재 하에 임시국무회의가 열리나, 전황에 대한 정보가 없어 산회하였다. 14:00 대통령 주재 하에 속개된 국무회의에서 채 총참모장은 북한군의 침공을 국군이 반격할 수 있다는 요지의 발언을 하였다. 이에 이 대통령은 긴급명령 1호(비상사태하의 범죄처단에 관한 특별조치령) 등을 공표하였으나 계엄령은 선포되지 않았다.

남침상황보도는 25일 07:00 중앙방송에서 처음으로 보고하였다. 이 당시 방송의 요지는 국군이 잘 사수하고 있으니 국민들은 걱정하지 말라는 것과 휴가 중인 장병들은 긴급히 원대로 복귀하라는 것이었다. 당일 12:00 국방부 정훈국은 “북한군이 전면 남침하였지만 국군이 격퇴하고 있다”는 요지의 발표를 하였다. 이후 국방부는 “국군 17연대가 해주로 돌입하였다.”라는 오보를 냈다. 그러나 이러한 방송은 시민들이 피난민으로부터 듣는 상황과 너무나도 다른 내용이었지만 전황의 호전만을 바라는 시민들의 심리로 인해 낙관적인 보도를 믿게 되었다.

26일 08:00 의정부를 탈환하고 북진중이다 라는 방송이 나갔다. 그러나 27일 06:00 갑작스런 정부의 수원이전 소식은 시민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에 당황한 공보처장은 내용을 바꾸어 6시 발표내용을 취소하였다. 27일 22:00부터 23:00까지 이승만 대통령의 녹음방송이 나갔다. “국군이 잘 버티고 있으니 국민은 참고 기다리면 된다.”라는 식의 방송이었다.

국회의 경우 25일 비상국회를 열어 채 총참모장의 의견을 청취하였다. 여기서 수도 고수론과 수도 포기론이 대립하였는데 채 총참모장이 전선에 복귀한 이후 국회에서는 이것을 두고 큰 논쟁을 오갔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수도 사수 결의안을 채택하였고, 이를 경무대에 전달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26일 아침에 경무대를 국회의장 신익희와 일부 사람들이 방문했는데 이승만이 있어야 할 경무대에 아무도 없는 것이었다. 심지어 경비원조차 없었다고 카더라. 이에 깜짝 놀란 신익희과 국회의원들은 아 정부가 도망갔구나 파악하고 곧바로 국회에 돌아가 정부이전을 명령했다.

사법부의 경우 처음에는 대법관을 중심으로 이전논의가 있었으나, 국군과 정부가 수도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발언에 손을 놓고 있었다. 그런데 26일 요인들만 이동시킨다는 원칙에 설마 수도가 함락되겠는가는 판단 속에 모든 자료를 서울에 남기고 기차를 타고 수원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수도가 함락된 것이다. 당연히 그 결과 각종 법률 문서들이 소각되어 모든 국민들의 범법행위, 재산 등이 리셋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

한강교 폭파와 수도 함락

국군은 북한군이 서울에 진입한 2시간 뒤에 한강교를 비롯, 한강에 있는 모든 교량을 폭파하기로 하였다. 폭파 예정시간은 27일 16시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수도경비사령관 이종찬 대령[14]은 서울 시민의 피난조치도 강구하지 않고 군부가 먼저 철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더욱이 시민과 서울 북쪽에서 전투중인 국군의 유일한 퇴로인 한강교를 조기에 폭파하는 것은 안 된다며 반대하였으나, 임진강 철교 등 중요한 교량이 시기를 놓쳐 파괴되지 못했음을 전례로 들면서 한강교 파괴는 강행되었다. 파괴가 지연되기도 했으나 혼선으로 인해서 한강교를 파괴되었고 이로 인해 국군 5개 사단과 지원부대의 퇴로가 차단되었다. 이로 인해 국군의 46%인 4만 4000여 명의 병력이 흩어지게 되었다. 또한 차량 1,318대가 모두 서울에 남아 있어 국군의 기동력 상실과 북한군의 기동력 향상에 도움이 되었다.

6월 28일 한강교 폭파로 인해서 고립된 국군은 급조한 나룻배를 이용해 한강이남으로 도하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혼란이 빚어졌고, 사단과 연대 등 군사조직자체가 와해되었다. 이에 국군은 6월 28일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신설하고 김홍일 소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시흥지구전투사령부는 퇴각병들의 병과와 소속을 따지지 않고 혼성부대를 편성하여 노량진 부근에 투입하여 한강 방어선을 급편하였다. 이 과정에서 육군본부 참모들이 병력을 수습하고 있음을 파악하고 이 부분을 시흥지구전투사령부가 대신하고 육군본부 참모들을 육본이 있는 수원으로 보냈다. 또한 민간인을 동원하여 안양과 시흥의 두 곳에 취사장을 설치하고, 집결된 병력을 중심으로 혼성사단을 편성하여 한강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서울 함락 후 한국군에게 제대로 화기를 갖춘 사단은 춘천 축선에서 승리하고 퇴각하는 6사단과 강릉축선에 있던 8사단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1사단이 있기는 했지만 장비를 모두 포기하고 몸만 빼내 한강을 건넌 상태였다. 1사단만이 아니라 서울을 포기하면서 예비물자 등을 죄다 포기하고 가면서 장비와 물자를 건지지 못했다.[15] 그밖에 옹진에서 철수한 17연대, 지방의 소규모 병력과 경찰병력[16]가 있긴 했지만 당장 숫적인 열세가 명백했다.

평가

최근까지 한국전쟁에서 한국군의 패배에 대한 이야기는 '국군의 장비가 열악했기 때문이다'라고 서술되어왔다. 이 설명이 틀린바는 아니지만 한국전쟁 초기에서 국군의 패퇴는 장비보다는 방어준비태세가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 컸다.

국군은 분명히 북한보다 열악했다. 전체 벙력은 2:1로 차이가 났고, 화력면에서도 큰 차이를 내었다. 북한군은 122mm 곡사포와 76mm 곡사포, 45mm 대전차포, 82mm 박격포 120mm 중박격포 등 다양한 장비로 무장을 했고, 그에 반하여 국군은 105mm 곡사포와 37mm 대전차포, 57mm 무반동총, 2.36인치 로켓포, 60mm 박격포, 81mm 박격포만 보유한 상황이었다. 특히 국군의 57mm 대전차포나 2,36인치 로켓포는 북한의 T-34/85 전차를 격퇴하기는 부족함이 많았다. 공군의 경우 국군 공군이 단 한대의 전투용 기체도 보유하지 못한 반면 북한군은 야크-9 100대를 포함한 다수의 전투용 기체를 보유하고 있었다. 전쟁 발발 직후 바우트 원작전을 통해 10기의 무스탕을 지원받아 지상공격에 나서지만 북한군의 남진에 대해 끼치는 효과는 미미했다.

그러나 국군이 패배하게된 가장 큰 이유는 국군의 병력 및 장비면에서의 준비태세 미흡보다는 전쟁지휘 및 방어작전계획부분에서의 실책이 더욱 크다. 국군의 방어작전계획은 존재했으나 개전 1개월 전에 감행된 대대적인 인사조치 왠지 독소전쟁 초기를 보는 것 같다?는 국군이 방어작전계획을 숙달하는데 어려움을 만들었다. 또한 국군의 첩보원이 북한군에 침투하여 T-34/85전차를 촬영하여 보고했으며 전선에서 북한군이 증가됨을 첩보부에서 보고를 했음에도 수뇌부는 이를 단순한 병력교체로만 판단하는 실책을 범했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전쟁지도측면에서 국군 수뇌부는 혼란만을 보여주었다. 전면남침임을 파악하는데까지 6시간이 걸렸고(6월 25일 10:00에 파악) 6월 26일 오후 전황이 불리한 상황임에도 반격!! 북진!! 이라는 허울뿐인 구호만 외쳤다. 결국 이 허울뿐인 구호는 방송을 통해 전파되었고 이는 수많은 서울 시민들을 한강이북에 고립시키는 문제를 만들었다.

국군의 전술측면에서도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물론 국군 1, 6, 8사단은 충분히 역할을 다했으나[17] 의정부의 7사단은 개전초기 북한군의 포화에 크게 당해 병력의 상당수를 상실했다. 이후 병력을 수습하고 저지하고 있었으나 북한군의 공세는 1개 사단이 막기에는 어려운 것이었다. 이에 국군 지도부는 의정부 축선에 2, 3, 5사단 총 3개 사단을 투입하였다. 그러나 투입을 동시에 한 것이 아니라 도착하는대로 투입하면서 축차투입이라는 우를 범했고, 결국 3개 사단은 모두 북한군을 저지하지 못했고 이는 의정부 방어선이 붕괴되었고, 이는 전 전선의 붕괴를 의미했다.

국군의 전쟁 초기 패배는 그릇된 전황파악으로 전쟁지도능력부재로 인한 것이었다.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한 이후 전면침공임을 파악하는데는 4시간이 걸렸고, 국군이 밀리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것은 6월 26일 오후쯤으로 약 만 하루가 지난 다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병덕은 국군이 반격할 수 있다는 헛소리주장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정부관료와 사법부, 국회의원 모두 채병덕에게 서울을 사수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결국 이런 총지휘관의 잘못된 판단은 정부의 잘못된 판단을 야기시켰고, 결국에는 제대로 된 퇴각작전 없이 서울을 포기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18]

또한 당시 국군의 지휘관 중에 사단급 이상 제대를 운용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김홍일 소장이 유일하였다.[19] 이는 한국전쟁 초기에 국군의 운용상의 문제, 특히 의정부 축선에서의 연대급의 축차투입 등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국군의 지휘관 경험 부족이 국군의 초기 방어작전에서 무력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20]

여담

여담으로 채병덕이 무리하게 수도 서울을 사수한 이유가 정치권의 무리한 요구에 의한 것이라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분명 정치권에서 수도사수결의를 한 사실은 있다. 6월 27일 새벽 4시에 신익희 의장 주도로 열린 비상국회에서 격론이 오간 이후 수도사수결의를 한 것이다. 그러나 이를 전달하려고 신익희와 조봉암 부의장이 경무대에 갔는데....이승만이 도망친 것이다. 당연히 이에 신익희와 조봉암을 잣됐구나 판단, 비상국회를 해산하고 수원으로 이전하였다.

그러니 정치권에서 수도사수결의를 한 사실은 있지만 이것을 전달받을 주체인 행정부가 공백이라 결국 무용지물이었다는 것이다. 위 내용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2권 674쪽에 나오는 이야기를 축약 서술한 것임을 밝힌다. 즉 국방부도 인정했다는 거다. 채병덕이 병신이라는 것을.....

참고문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2권 북한의 전면남침과 초기 방어작전』

각주

  1.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2』, 서울, 2005, p.5
  2. 북한군의 문서고가 개방되지 않는 이상 이는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3. 이는 상징성에 집착했던 김일성의 계산으로 모두가 알다시피 8월 15일광복절이니만큼 8월 15일에 남조선을 해방(물론 한국 입장에서 보면 복속)시키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4.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2』, 서울, 2005, p.13
  5.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2』, 서울, 2005, p.58
  6. 당시에 북한군이 침공할 것이라고는 모두가 예상한 상황이었다. 이에 국군은 약 6개월간 비상경계령을 내렸고 개전하기 딱 이틀 전에 그 비상경계령을 해제하였다. 비상 경계령을 갑자기 해제한 것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그 중 하나가 당시 6월 25일이면 모내기 시즌이었다. 당시 남북한 모두 농업국가였기에 설마 모내기를 포기하겠어 라는 사고로 비상경계령을 해제했다고 한다.
  7. 제2, 제3, 제5사단으로 이 사단들은 여수 · 순천 반란사건 이후 등장한 빨치산 토벌 중에 있었다.
  8. 7사단, 2사단, 3사단, 4사단, 수도사단
  9. http://koreanwar60.tistory.com/37
  10. 참가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 공군 총참모장 김정렬 준장, 해군 총참모장 대리 김영철 대령, 참모학교장 김홍일 소장, 송호성 준장(전 경비대총사령관), 유동열(전 통위부 부장), 이범석(전 광복군참모장), 이청천(전 광복군사령관), 김석원 예비역 준장(제1사단장) 등이었다.
  11. 이종찬 대령이 자신이 그런 발언을 하고, 당시 수도서울 고수론이 불가피했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UN군이 참전할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고, 한강선 철수 아니면 서울 사수 밖에 선택지가 없는데 둘 다 승산이 없는 상황에서 ‘서울시민을 돌보지 않고 퇴각하다가 결국에는 패하였다’라는 말을 듣기보다는 차라리 서울을 고수하는 것을 택한 것이라 말하였다.
  12.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2』, 서울, 2005, p.67
  13. 그러니 소위 이승만이 전쟁나자마자 전화해서 맥아더를 깨워 지원을 요청했다는 말은 잘못된 것이다.
  14. 서울고수론을 주장했던 인물 추가사항은 위에서 찾아보길 바람
  15. 이건 명백한 대통령 이승만의 실책. 이승만은 서울을 포기하면서 이를 정부와 협의하지 않았다. 서울이 함락 위기이니 피신하는 건 당연하지만 그걸 아무에게도 안 알리고 도망가는 바람에 행정부도, 입법부도 붕괴할 뻔 했다. 이승만의 서울사수 방송에 일반 시민들만이 아니라 정부 고위급까지 다 속았다는 것. 이 사실이 확인된 건, 피신 다음날 아침 서울 사수 방침을 확인하려고 부통령 등이 경무대를 방문하면서였다. 이러니 장비와 인력을 동반한 조직적 철수가 될 수 있나...
  16. 현대 한국의 치안유지 역할을 맡는 경찰을 생각하면 안된다. 당시 경찰들은 실질적으로 군병력 및 전투인원 계산시에 포함될 정도로 치안 역할보다 전투 임무가 상당했다. 물론 군처럼 전면전에 대비하는 조직은 아니었지만 일반 고지방어전이나 참호전, 후방 방어전이나 게릴라전 등에는 충분히 투입하여 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17. 1사단의 경우 임진강을 이용해 방어전선을 구축하여 북한군의 진군을 저지시켰고, 중동부의 6사단의 경우 북한군 2개 사단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하여 북한군의 작전계획에 큰 차질을 야기했다. 또한 동부 8사단의 경우 산악이라는 조건 속에서 병력이 분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였다. 또한 퇴각과정에서 질서있게 퇴각하여 전투력 손실을 최소화하였다. 개전 초기 활약했던 6사단(김종오 대령)과 8사단(이성가 대령)은 전투력을 거의 온존하게 보유하여 이후 지연작전에서 핵심적인 축으로 활동하게 된다. 정병준은 자신의 책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파주: 돌베게, 2006 에서 6사단이 대한민국을 구했다면서 극찬했다. 강릉의 8사단의 경우는 국방부 전사편찬연구소 발간 『6.25전쟁사』에서 한국전쟁 당시 가장 건실하고 전투력을 잘 보존한 부대라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18. 채병덕이 전황을 잘못 파악한 것은 어쩌면 그의 경력에 의한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채병덕은 일본군 조선경비대 출신으로 주로 독립군 토벌 또는 국내 도적 토벌로 공적을 쌓은 군인이었다. 당연히 전면전이나 게릴라전에 경험이 없었다. 물론 광복이후 5년에 걸친 대규모적인 게릴라전과 국지전으로 경험이 숙달되었지만 전면전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였다. 그렇기에 그는 북한군의 침공을 도적토벌이나 국지전으로 보았던 것이고, 그래서 의정부 축선에 축차투입 한 것이라 본다. 북한군의 전면 침공을 파악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고, 의정부 축선 방어에 병력을 축차투입하는등의 실책을 범한 것이다. 축차투입은 군사전략에서 가장 피해야할 것으로 여겨지나. 적보다 많은 병력을 보유할 경우 축차투입을 통해 아군에게는 휴식을 적군에게는 피로를 유발시켜 승리하는 전략도 있다. 특히 반란군을 분쇄하는데 자주 쓰이는 방법이다.
  19. 중일전쟁당시 중화민국군에 소속되어 중화민국군 군단을 통솔하여 일본군을 저지한 경력이 있다. 이러한 그의 업적으로 인해서 중화민국군에서 외국인 신분으로 소장까지 달게된다.
  20.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6사단장 김종오, 8사단장 이성가 대령 모두 사단급 이상 제대를 운영해 본 적이 없음에도 북한군에게 패배를 안겨준 사실로 부정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