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독:제멜바이스 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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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멜바이스 반사

Semmelweis Reflex

현 패러다임에 반하는 것은 무조건 틀렸다.

개요[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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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ce advances one funeral at a time.

과학은 장례식의 수만큼 발전한다.

- Max Planck

-막스 플랑크


제멜바이스 반사란 기존의 규범, 신념, 패러다임과 모순되기 때문에 새로운 증거나 지식을 (비록 옳더라도)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현상을 표현하는 말이다.

길고 긴 과학계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과학이라는 학문이 비극의 역사임을 알 수 있다. 기존에 있었던 패러다임을 뒤집는 주장이 나올때마다 작게는 조롱과 멸시부터 시작해서 크게는 화형까지 당하는 등의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브루노부터 갈릴레이까지 이어져온 천동설 vs 지동설 논쟁이 그랬고, 다윈의 진화론, 베게너의 대륙이동설, 20세기 물리학자들의 양자역학 등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이다. (다윈에 비하면 양자역학 논쟁을 했던 과학자들은 그나마 양반인 편이다.)

이 기상천외한 주장들의 공통점은 그동안 있어왔던 상식으로는 도저히 말도 안되는 '개소리'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러한 '헛소리'를 거부하지만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점차 관련 증거들이 쌓이면서 더이상 거부할 수 없게 되면 그제서야 기존 학계에서 받아들이게 된다. (물론 골상학이나 우생학같은 유사과학의 경우에는 당연히 폐기처분된다.)

20세기를 이끌었던 물리학자 중 한 사람인 막스 플랑크는 이를 두고 "과학은 장례식의 수만큼 발전한다."라고 표현을 할 정도였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결코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으며 세월이 지나 기존의 세대들이 죽고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면 비로소 과학, 혹은 지식체계와 패러다임이 한 단계 발전한다는 말이다.

제멜바이스 반사에 얽힌 이야기도 그가 죽은지 20년 정도의 세월에 걸쳐서 받아들여진 생각이다. 그 내용은 우습게도 '손을 씻지 않는 의사'에 대한 일화였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의사가 손을 씻지 않는 것이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당시는 1840년대, 세균과 미생물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손을 왜 씻어야하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제멜바이스 교수[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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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년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종합병원에 최초로 산부인과가 개원했다. 그 병원에서 산부인과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사람이 바로 '이그나츠 제멜바이스'였으며 제멜바이스 반사는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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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gnaz Semmelweis, (1818.7.1 ~ 1865.8.13)

당시 병원은 1병동과 2병동으로 나눠져있었는데 이상하게도 1병동에서 산모가 사망하는 사고가 2병동에 비해 약 3배 정도 높게 나타났다. 이 이야기는 환자에게도 퍼져나가 많은 산모들이 2병동에 입원하기를 원했다. 오죽하면 1병동에서 아기를 낳느니 길거리에서 아기를 낳는 산모도 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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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1병동(First Clinic)의 사망률이 높다.

제멜바이스는 이에 이 미스터리한 현상에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1병동과 2병동의 차이점을 조사하기 시작하기 시작한다.

환자 수나 날씨 등 다양한 변인 요소를 알아보던 그는 1847년에 이르러서야 그 원인을 찾게 된다. 그의 친구가 우연히 시신을 해부하면서 시신을 잘랐던 메스에 찔렸는데 산욕열에 걸린 산모와 비슷한 증세를 보이며 죽어간 것이다. 제멜바이스는 그제서야 1병동에서만 시신을 해부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시신에서 나오는 어떠한 물질이 산욕열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물질'은 물론 세균이지만 당시는 세균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시신에서 발생한 물질이 원인인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제멜바이스는 이 물질을 씻어내기 위해 염화석회로 손을 씻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의 생각은 그대로 적중해서 손을 씻자마자 1병동의 사망률이 엄청나게 떨어지는 성과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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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lorine handwash이후 사망률이 엄청나게 떨어져서 2병동과 비슷한 수치를 보이고 있다.

이 손씻기를 도입하자마자 사망률은 수직낙하하여 어떤 달은 사망자가 하나도 발생하지 않는 쾌거를 이룩해냈다.

제멜바이스는 당연히 이 결과가 많은 산모들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여러 산부인과 의사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또한 1848년 후반에는 런던 왕립 의학 및 외과 학회에서 강연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의사들의 반응은 제멜바이스의 의도와는 영 다르게 흘러갔다. 그는 편지만 썼을뿐 공식적인 출판물이 전무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의 발견을 오해하는 의사들이 많이 생겨났던 것이다.

또 1848년의 혁명이 유럽 전역을 휩쓸면서 헝가리 혁명, 오스트리아 제국과 합스부르크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등 국제정세가 좋지 못했다. 물론 제멜바이스가 이 사건들에 연관된 증거는 없지만 그의 형제가 헝가리 독립 운동에 참여하여 처벌받게 되면서 제멜바이스의 입지도 흔들리게 되었다.

이러한 다양한 원인이 합쳐져서 그는 1849년 3월 20일에 종합병원에서 해고 당하고 만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작은 병원의 명예 의사직을 맡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전파하려고 애썼으나 다른 산부인과 의사들은 제멜바이스의 의견을 묵살했고 결코 손을 씻지 않았다. 그들은 산욕열이 장이 불결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사실 이때에도 그는 손씻기로 주목할만한 결과를 많이 얻어냈지만 역시나 기존의 패러다임에 묶여있던 많은 의사들은 제멜바이스의 방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그는 정신병원에서 47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만다. 부검 결과로는 사망원인이 결핵-혈액 중독과 구타에 의한 상처 등이라고 한다.

제멜바이스 반사[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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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학계는 그가 죽은지 20년이 지나서 그를 인정하기에 이른다. 바로 루이 파스퇴르의 등장으로 제멜바이스가 주장했던 '물질'이 무엇인지 알아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살아 있을 때도 일부 의식있는 의사들은 손씻기를 실천하여 긍정적인 결과를 얻어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이론을 거부했다. 즉 계속해서 더러운 병동에서 출산을 했던 것이다.

물론 반대측에도 할말이 있기마련이다. 이들은 제멜바이스의 이론을 오해하여 '시체 입자'라는 개념에 주목했다. 이러한 입자가 사람을 시체로 변환시킨다는 생각을 하여 주술적이나 미신적인 생각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결국에는 파스퇴르가 이 '물질'이 '시체 입자'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미생물'임을 증명하긴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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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에야 그의 업적을 기려서 동상이 세워졌지만 그가 막 운명을 달리했을 때 그의 무덤은 초라하기 그지없었고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제멜바이스 교수는 전형적인 '죽어서 기억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화가 맞물려져서 '제멜바이스 반사'라는 말이 생겨났으며 기존의 규범, 신념, 패러다임과 모순된다는 이유로 새로운 생각을 무조건 거부하는 인간의 행동에 대한 은유로써 사용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