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하고 있지 않습니다. 편집하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적으로 기록됩니다. 계정을 만들고 로그인하면 편집 시 사용자 이름만 보이며, 위키 이용에 여러 가지 편의가 주어집니다.편집을 취소할 수 있습니다. 이 편집을 되돌리려면 아래의 바뀐 내용을 확인한 후 게시해주세요. 최신판 당신의 편집 1번째 줄: 1번째 줄: {{한국사의 시대 구분}}{{한반도 존재 역대 국가 및 통치 세력}} 後三國時代後三國時代 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한반도 존재 역대 국가 및 통치 세력}} 後三國時代 892년 ~ 936년 == 개요 == [[견훤]]이 892년에 [[신라]]로부터 사실상 독립한 때부터 후백제가 [[고려]]에 항복하여 후삼국이 통일될 때까지의 시기이다. 엄밀히는 [[발해]] 및 그 후계국가가 평안남도 이북 지역에 잔존하고 있었고, 도중에 신라의 한 왕자가 또다른 나라를 선포한 적도 있으므로 이 시기에 존재한 국가 수가 3개뿐이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거의 유일한 '군웅할거' 시대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지방 [[호족]]의 발흥과 [[신라|중앙권력]]의 붕괴, 이로 인한 호족 군벌간의 항쟁과 삼국정립 등 이 시대는 여러모로 [[삼국지|중국의 삼국 시대]]와도 비슷한 면을 많이 띠고 있다. 이는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요소가 되기 때문에 문화 컨텐츠의 소재로 많이 활용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드라마 [[태조 왕건|태조 {{ㅊ|궁예}}왕건]]. == 배경 == [[혜공왕]] 이후의 하대신라는 [[진골]] 사이의 왕권다툼이 격화되며 중앙권력이 점차 약해지고, 이에 따라 지방에 대한 통제력도 점차 상실해가고 있었다. 중앙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지방 각지에서는 그 지방의 유력자들이 [[호족]]으로 성장하여 사실상 독립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비록 [[헌강왕]](875-886) 시기 "짚이 아닌 기와로 지붕을 덮고, 나무가 아닌 숯으로 밥을 지어 먹는다"는 {{ㅊ|개드립}}기록이 있기는 하나, 이러한 모습은 권력과 돈이 집중된 경주 중심부의 모습이었을 뿐 지방은 이미 따로 놀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진성여왕]](887-897) 대에 이르면 상황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호족들은 본격적으로 군벌화되었으며(당시의 대표적인 군벌이 [[원주시|북원]] 일대를 장악한 [[양길]]이다) 이들의 군사행동 또한 노략질 수준에서 본격적인 [[전쟁]]으로 발전하였고, 신라 중앙은 이를 전혀 통제할 수 없었다. 진성여왕 이후 신라의 세력권은 경주와 그 주변 수십 ㎞ 정도로 축소되고 말았다. 신라가 지방의 독립을 막을 수 없었던 데는 통일 이후의 지방정책 또한 한 몫을 했다. 백제와 고구려의 기존 세력은 신라의 [[골품제]]에 흡수되는 과정에서 많은 차별을 받았고, 통일신라 자체가 극단적으로 [[경주]] 중심으로 돌아간 국가였기 때문에 소외된 이들 지역은 신라 중앙에 반감이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견훤]]과 [[궁예]]가 각각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을 기치로 내걸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호응했던 것은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 전개 == === 태봉(후고구려)과 후백제의 성립 === 일반적으로 [[견훤]]이 독립한 892년을 후삼국시대의 시작으로 본다. 호족 출신으로 신라 중앙의 장군직에 있던 견훤은 서남해안의 [[해적]]과 호족들을 공격하는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는데, 견훤은 오히려 이들을 비롯한 지방세력을 포섭한 후 무진주(현 [[광주광역시]])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신라로부터 실질적으로 독립했다. 이후 견훤의 세력은 북쪽의 완산주(현 [[전주시]]) 일대까지 확대되었고, 백제의 주요 지역이었던 완산주를 중심으로 견훤은 백제의 부흥을 선언하며 정식으로 [[후백제|(후)백제]]의 왕위에 오른다(900년). 승려 출신으로 양길 휘하의 장수였던 [[궁예]]는 894년 [[강릉시|명주]] 일대를 장악한 이후 신라의 동쪽과 북쪽 변경을 차례차례 접수하였고, 896년 [[왕륭]]과 [[왕건]] 부자를 비롯한 서북부의 호족들이 자신에게 투항해 오자 왕륭의 본거지인 [[개성|송악]]을 수도로 삼고 본격적으로 독립하였다. 궁예 또한 고구려의 부흥을 기치로 내걸었으며 이후 {{ㅊ|빡친}} 양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신라 북부의 넓은 영토를 장악, 왕위에 올라 국호를 [[후고구려|고려]]로 정했다.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건국되었다고 해서 수많은 호족들이 다 정리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즉 후백제와 후고구려는 사실상 각각 견훤과 궁예를 지지하는 수많은 호족들의 연합체에 더 가까웠다. 그래서 하위 호족들의 동향에 따라서 후삼국의 정세가 크게 흔들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패서 지역의 호족들이 궁예에게 등을 돌리면서, 패서 호족을 대표하는 왕건이 궁예를 축출하고 왕위에 오른 것 등이 있다. === 태봉과 후백제의 세력 확대와 항쟁 === 후고구려와 후백제는 주변의 호족들을 정복하거나 포섭하면서 계속 세력을 넓혀 나갔다. 신라는 완전히 무력해져 경주 주변 지역만을 다스리는 소국으로 전락했고, 400여 년 만에 왕위가 김씨에서 박씨에게 다시 넘어가는 등 계속된 혼란 속에 빠져 있었다. 후고구려와 후백제의 본격적인 첫 충돌은 엉뚱하게도 후백제에서도 한참 남쪽에 있는 금성(현 [[나주시]] 일대) 지역에서 벌어졌다. 궁예는 해상세력인 왕건 일가를 중심으로 수군을 편성, 한참 남쪽의 금성으로 출병했던 것. 이후 후백제는 이 지역을 탈환하고자 여러 차례 전쟁을 벌이지만, 함대가 화공을 당하는 등(...) 여러 차례 패배하면서 꽤 오랫동안 되찾지 못했다. 한편 신라에 대한 공세도 계속되었다. 후백제는 유명한 [[대야성]](경남 합천)을 여러 차례 공격하였고, 후고구려는 신라의 북쪽 변경을 공격하여 세력권을 죽령 동북부까지 넓혔다. === 왕건의 고려 건국과 후백제-고려 전쟁 === 한편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목표로 하던 궁예는, 패서 호족의 심장부인 송악에서 [[철원]]으로 수도를 옮기고<ref>철원의 궁궐 터는 현재 [[비무장지대]] 한가운데(!!) 있다.</ref> 새 수도에 [[청주]] 지역의 주민을 이주시켜 새로운 친위세력을 만들고자 하였다. 또한 국가명을 [[마진]], [[태봉]]으로 바꾸면서 기존에 이용했던 고구려의 색채를 최대한 지워 나갔다. 이러한 움직임은 당연히 기존의 중심 세력이던 패서 호족들과의 갈등을 낳았고, 궁예는 자신의 정책을 강력하게 밀고 나가기 위해 [[미륵불]]이라 자칭하고 불교 사상을 이용한 강압 통치를 시도하였다. 패서 호족 출신인 왕비와 두 아들까지 처형하는 지경에 이르자 위협을 느낀 패서 호족들은 [[왕건]]을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켰고, 결국 궁예는 살해당하고 왕건이 왕위에 올라 국호를 다시 [[고려]]로 바꾸고 다시 송악으로 천도했다. 다만 다른 지역의 호족들은 왕건의 정변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도 많았는데, 명주의 호족 김순식은 약 4년간이나 왕건에게 항복하지 않고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였으며<ref>이후 왕건에게 항복하여 왕씨 성을 하사받고 고려의 통일에도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ref>, 특히 궁예의 친위세력이었던 청주와 웅진의 호족들은 왕건에 대항하여 대규모의 반란을 잇따라 일으키기도 했다<ref>[[훈요십조]]에서 언급된 '차령 이남'은 호남지방이 아니라 이 두 지역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최근의 대세다.</ref>. 처음 내부 안정이 급선무였던 고려는 후백제나 신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고, 후백제와는 인질을 교환하는 등 전쟁을 가급적 피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고려에 인질로 온 견훤의 조카가 급사하는 사건을 기화로 후백제와 고려는 본격적으로 충돌하게 되었고, 초기에 왕건은 후백제와의 접경지역에 있던 호족들이 잇따라 후백제에 투항하며 어려운 싸움을 하게 되었다. 왕건은 이례적으로 후백제와 내통한 호족들을 대거 처형하는 등 강경한 모습을 보이며 전의를 다졌지만 상황은 계속 불리하게 돌아갔다. 후백제의 신라 서라벌 함락 및 [[경애왕]] 살해를 계기로 벌어진 [[공산 전투]]에서는 1만 명 이상의 고려군과 개국공신 [[신숭겸]]이 전사하고 왕건 자신은 간신히 도망가는 대참패를 당하기까지 했다. 왕건의 장기이던 해전에서조차 후백제군에 패하며 왕건은 최대 위기를 맞게 된다. === 견훤의 항복과 후삼국 통일 === 반전의 계기가 된 것은 [[고창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후백제는 8천 명의 병력을 잃고 다수의 장수와 책사가 포로가 되는 큰 패배를 당했는데, 신라계이던 고창(현재의 [[안동]]) 일대의 호족들이 신라에 우호적인 고려 쪽을 지원했기 때문에 고려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 이후 후백제는 거꾸로 수세에 몰리게 되었고, 얼마 뒤 후계자 분쟁이 본격화되면서 후백제는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장남 [[신검]]이 견훤을 유폐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견훤은 [[뉴스데스크 게임 폭력성 실험 사건|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대로 탈출하여 왕건에게 항복해 버렸다. 이 사태의 의미를 간파한 왕건은 견훤을 크게 환영하였고, 후삼국 통일의 명분은 완전히 고려 쪽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신라는 고려에 항복하였고, [[거란]]에 멸망당한 [[발해]]의 일부 세력도 고려에 합류하여 고려는 완전히 대세를 잡게 되었다. 신검은 내부의 혼란을 간신히 평정하고 고려에 대항하고자 하였으나, 고려는 그동안 모인 모든 역량을 끌어모아 10만 대군을 편성하여 {{ㅊ|한방러시}}공격을 감행, 후백제는 [[일리천 전투]]에서 견훤을 앞세운 고려군에게 힘없이 무너지며 멸망하고 말았다(936년). == 결과 == 대체로 후삼국시대의 종결을 진정한 민족 통합의 시점으로 본다. 먼저 통일을 이룩한 것은 [[통일신라]]였으나, [[고구려]] 영토를 대부분 중국에 양보한 반쪽짜리 통일이었던데다 그 고구려의 영토에는 고구려계의 새로운 나라인 [[발해]]가 등장하였기 때문에 진정한 통일로 볼 수는 없다는 것<ref>그래서 [[남북국시대]]라는 호칭이 나온 것이다.</ref>. 실제로 200년이 지난 후까지 백제와 고구려의 부활이라는 떡밥에 다수의 사람들이 호응했다는 것은, 신라의 통일이 그 때까지 사람들의 내면에까지 완벽히 와닿지는 못했다는 근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고려의 재통일 이후 20세기 [[남북분단]]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은 단 한 번도 둘 이상의 나라로 갈라져본 적 없이 1천 년간 살게 되었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고구려-백제-신라'라는 독립적인 의식이 온전히 하나로 합쳐지게 되었으며, 비슷한 시기 멸망한 발해의 유민 상당수를 받아들이며 실질적인 민족 통합의 모양새를 갖출 수 있었다. 이후로 한민족은 고려 중기 [[탐라]]를 흡수하고 수백 년에 걸쳐 [[압록강]]-[[두만강]]까지 이어지는 한반도 북부의 영토를 수복한 것 외에는 영토나 민족 구성에서 커다란 변동이 없이 근현대에 이르게 된다. 흥미롭게도 이는 [[삼국사기]]의 역사관과도 일맥상통하는데, 삼국사기는 신라의 삼국 통일이 아니라 고려의 후삼국 재통일까지를 기록의 대상으로 잡고 있다. 고려의 통일이야말로 진정한 삼국통일이라는 인식(고려정통론)이 있었던 셈. 물론 삼국사기가 고려시대의 기록이라는 것 또한 감안할 필요는 있다. {{각주}} [[분류:한국사]] 요약: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각주}} · {|class="wikitable" · |- · rowspan=""| · colspan=""| · |} {{lang|}} · {{llang||}} · {{인용문|}} · {{인용문2|}} · {{유튜브|}} · {{다음팟|}} · {{니코|}} · {{토막글}} {{삭제|}} · {{특정판삭제|}}(이유를 적지 않을 경우 기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드시 이유를 적어주세요.) {{#expr:}} · {{#if:}} · {{#ifeq:}} · {{#iferror:}} · {{#ifexist:}} · {{#switch:}} · {{#time:}} · {{#timel:}} · {{#titleparts:}} __NOTOC__ · __FORCETOC__ · __TOC__ · {{PAGENAME}} · {{SITENAM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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