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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8월 16일]] 조선인들이 붉은 기를 들며 만세를 부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곧 소련군이 온다는 소문을 상기했다. 그런 도중 회사에서 들려온 전화때문에 만류에도 불구하고 회사로 가는 길에 광장에 많은 인파가 모인 것을 보았다. 그는 [[1919년]]의 만세 사태를 기억해냈다. <ref>위의 책, p.24</ref>}} | 그는 [[8월 16일]] 조선인들이 붉은 기를 들며 만세를 부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곧 소련군이 온다는 소문을 상기했다. 그런 도중 회사에서 들려온 전화때문에 만류에도 불구하고 회사로 가는 길에 광장에 많은 인파가 모인 것을 보았다. 그는 [[1919년]]의 만세 사태를 기억해냈다. <ref>위의 책, p.24</ref>}} | ||
조선인들의 분노는 신사, 경찰서, 지방행정기관 '불상사건(不祥事件 | 조선인들의 분노는 신사, 경찰서, 지방행정기관 '불상사건(不祥事件'이 913건, 그리고 경찰관, 공무원, 학교 교원을 상대로 발생한 살상 및 폭행 사건이 267건<ref>위의 책, p.25</ref>이 보고 된 것으로 보여졌다. 특히 신사는 집중적으로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재밌는 점은 일본인 보다 조선인의 피해가 더 많았다는 점이다. | ||
문제는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인과 분리되어 살았던터라 조선인이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 문제는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인과 분리되어 살았던터라 조선인이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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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8월 19일 조선군관사령부가 이런 혼란을 수습하고 치안유지를 다 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상황 수습에 들어갔다. 또한 당시 경기도 경찰부장과 총독부 정보장관은 소련군 진주설과 같은 유언비어에 속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고 향후 정치적 군사적인 부분은 연합군과 협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ref> 이면식, 조선을 떠나며, 역사비평사, p.34</ref> | 결국 8월 19일 조선군관사령부가 이런 혼란을 수습하고 치안유지를 다 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상황 수습에 들어갔다. 또한 당시 경기도 경찰부장과 총독부 정보장관은 소련군 진주설과 같은 유언비어에 속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고 향후 정치적 군사적인 부분은 연합군과 협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ref> 이면식, 조선을 떠나며, 역사비평사, p.34</ref> | ||
지금까지 보았다 싶이 일본인들은 패전 후 극심한 혼란 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잔류와 귀국을 사이에 두고 갈등하였고, 또 앞으로 다가올 점령국의 정책에 따라 운명이 갈리게 되었다. | 지금까지 보았다 싶이 일본인들은 패전 후 극심한 혼란 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잔류와 귀국을 사이에 두고 갈등하였고, 또 앞으로 다가올 점령국의 정책에 따라 운명이 갈리게 되었다. | ||
== 잔류? 귀국? == | == 잔류? 귀국?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