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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북해의 총성과 별개로, [[1940년]] [[5월 10일]], 황색 작전을 통해 독일군이 서부 전선에서 전면적으로 총공세에 돌입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낫질 계획에 따라 독일군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아르덴 산림 지대를 돌파하여 연합군의 주력 부대를 해안가로 포위하는데 성공했고, 이 일련의 돌파 작전으로 프랑스군 주력의 1/3과 영국의 대륙 원정군, 벨기에군, 네덜란드군이 모조리 괴멸당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 이런 북해의 총성과 별개로, [[1940년]] [[5월 10일]], 황색 작전을 통해 독일군이 서부 전선에서 전면적으로 총공세에 돌입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낫질 계획에 따라 독일군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아르덴 산림 지대를 돌파하여 연합군의 주력 부대를 해안가로 포위하는데 성공했고, 이 일련의 돌파 작전으로 프랑스군 주력의 1/3과 영국의 대륙 원정군, 벨기에군, 네덜란드군이 모조리 괴멸당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 ||
영국군은 황급히 됭케르크에서의 철수 작전을 강행하여 대륙 원정군을 빼내왔지만, 그러는 동안 독일군은 텅 빈 프랑스 내륙을 향해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프랑스의 또 다른 주력 부대 중 1/3은 [[ | 영국군은 황급히 됭케르크에서의 철수 작전을 강행하여 대륙 원정군을 빼내왔지만, 그러는 동안 독일군은 텅 빈 프랑스 내륙을 향해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프랑스의 또 다른 주력 부대 중 1/3은 [[마지노 선]]에서 독일 C집단군과 대치하여 움직이지 못해 독일군은 압도적인 숫적 우세와 화력, 제공권을 바탕으로 고속 진격을 거듭, 마침내 프랑스 정부는 파리를 무저항 도시로 선포하고 후퇴, [[6월 13일]] 파리에 독일군이 입성하였다. 그 직전인 [[6월 10일]], 이탈리아가 독일에 가세하여 프랑스에 선전 포고했고 [[6월 17일]], 프랑스의 새로운 총리로 선출된 [[앙리 필리프 페탱]]이 휴전을 제의, [[6월 22일]] 프랑스와 독일간의 정전 조약이 체결되었다. | ||
프랑스의 항복으로 고립된 영국은 내부의 소수 강화론을 묵살하고 결전을 천명했다. 노르웨이 패전으로 실각한 [[네빌 체임벌린]]을 대신하여 새로 전시 거국 내각의 수상이 된 [[윈스턴 처칠]]은 결사 항전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이에 독일은 [[8월]]부터 대대적으로 영국 본토를 폭격, 사상 최대의 공중전이라는 [[영국 본토 항공전]]이 일어났다. 전세는 한때 독일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듯했으나, 독일측의 일부 미스와 영국 공군의 필사적인 반격으로 마침내 영국의 승리로 끝났다. | 프랑스의 항복으로 고립된 영국은 내부의 소수 강화론을 묵살하고 결전을 천명했다. 노르웨이 패전으로 실각한 [[네빌 체임벌린]]을 대신하여 새로 전시 거국 내각의 수상이 된 [[윈스턴 처칠]]은 결사 항전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이에 독일은 [[8월]]부터 대대적으로 영국 본토를 폭격, 사상 최대의 공중전이라는 [[영국 본토 항공전]]이 일어났다. 전세는 한때 독일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듯했으나, 독일측의 일부 미스와 영국 공군의 필사적인 반격으로 마침내 영국의 승리로 끝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