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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네가 귀신이냐, 사람이냐! 만약 귀신이라면 그 자리에 있어도 좋지만 사람이라면 냉큼 물러가라.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죽어서 돌아온다면 환영하겠지만, 살아서 어미를 만나러 오는 법이 어디 있느냐!}} | {{인용문|네가 귀신이냐, 사람이냐! 만약 귀신이라면 그 자리에 있어도 좋지만 사람이라면 냉큼 물러가라.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죽어서 돌아온다면 환영하겠지만, 살아서 어미를 만나러 오는 법이 어디 있느냐!}} | ||
결국 이규풍은 밥 한끼 먹지 못하고 러시아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후 1912년경 [[우시하]]와 함께 의병 재건을 꾀했으며, 1918년 12월 [[이동녕]], [[조완구]], [[김규식 (1882년)|김규식]], [[김동삼]], [[김좌진]], [[문창범]], [[안정근]], [[윤세복]], [[이탁 (1889년)|이탁]], [[이상룡]], [[최병학]], [[한흥]], [[황상규]] 등 39명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1919년 4월 23일 국내에서 개최된 국민대회에서 [[박은식]], [[신채호]], [[ | 결국 이규풍은 밥 한끼 먹지 못하고 러시아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후 1912년경 [[우시하]]와 함께 의병 재건을 꾀했으며, 1918년 12월 [[이동녕]], [[조완구]], [[김규식 (1882년)|김규식]], [[김동삼]], [[김좌진]], [[문창범]], [[안정근]], [[윤세복]], [[이탁 (1889년)|이탁]], [[이상룡]], [[최병학]], [[한흥]], [[황상규]] 등 39명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1919년 4월 23일 국내에서 개최된 국민대회에서 [[박은식]], [[신채호]], [[조성환]] 등과 함께 평정관으로 선출되었다. | ||
이후 공산주의에 경도되어 좌익 활동을 수행하던 그는 1926년 3월 민족유일당운동의 일환으로 만주 길림에서 민족혁신파 대표대회가 개최되자 같은 공산주의자인 최소수, [[주진수]]와 함께 참석했다. 이후 정의부의 [[양기탁]], [[오동진]], 고활신, [[현정경]], 곽종대 등과 천도교 혁신파인 김봉국, [[이동락]], [[송헌]], [[최동희]], 형평사의 [[오성환]], 이동구 등과 함께 공산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의 연합정당인 고려혁명당을 조직하고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 이후 공산주의에 경도되어 좌익 활동을 수행하던 그는 1926년 3월 민족유일당운동의 일환으로 만주 길림에서 민족혁신파 대표대회가 개최되자 같은 공산주의자인 최소수, [[주진수]]와 함께 참석했다. 이후 정의부의 [[양기탁]], [[오동진]], 고활신, [[현정경]], 곽종대 등과 천도교 혁신파인 김봉국, [[이동락]], [[송헌]], [[최동희]], 형평사의 [[오성환]], 이동구 등과 함께 공산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의 연합정당인 고려혁명당을 조직하고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