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역학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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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인슈타인의 광양자설 ====
==== 아인슈타인의 광양자설 ====
[[파일:Photoelectric effect.svg|섬네일|오른쪽|광전 효과의 개념도]]
[[파일:Photoelectric effect.svg|섬네일|오른쪽|광전 효과의 개념도]]
19세기 말 물리학자들이 한 쪽에서 흑체 복사에 대해 연구하는 동안, 다른 쪽에서는 전혀 새로운 신기한 현상을 연구하고 있었다. 몇몇 과학자들은 [[금속]]의 표면에 자외선을 쬐었을 때 [[전하]]를 잃는 현상을 발견했고, 이를 [[광전 효과]]라고 불렀다. 이 현상은 비교적 쉽게 설명할 수 있어 보였다. 빛은 곧 전자기파이므로, 금속 내의 전하가 빛의 전자기장에게서 에너지를 흡수하여 금속 표면을 탈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에 의하면 빛의 세기는 곧 전자기파의 세기이므로, 더 강한 빛을 쪼이면 전자는 더 강한 세기의 전자기장 에너지를 흡수할 것이고 더 큰 에너지를 가진 채로 탈출할 것이다. 만약 빛의 세기가 약하더라도 충분히 오랫동안 쪼이면 전자는 오랜 시간동안 충분한 에너지를 흡수해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전자가 충분한 에너지를 흡수해야만 탈출할 수 있으므로, 빛을 쪼이기 시작한 뒤 약간 시간이 지나야 전자들이 탈출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이 현상을 더 자세히 연구하자 곧 이상한 결과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전자가 가진 에너지는 빛의 세기와는 관련 없었고 빛의 진동수와만 관련이 있었다. 아무리 강한 빛을 쪼여도 특정 진동수보다 낮은 진동수의 빛이라면 전자가 전혀 탈출하지 않았다. 전자는 에너지를 흡수할 시간이 없이 빛을 쬐자마자 거의 즉각적으로 탈출하였다.
19세기 말 물리학자들이 한 쪽에서 흑체 복사에 대해 연구하는 동안, 다른 쪽에서는 전혀 새로운 신기한 현상을 연구하고 있었다. 몇몇 과학자들은 [[금속]]의 표면에 자외선을 쬐었을 때 [[전하]]를 잃는 현상을 발견했고, 이를 [[광전 효과]]라고 불렀다. 이 현상은 비교적 쉽게 설명할 수 있어 보였다. 빛은 곧 전자기파이므로, 금속 내의 전하가 빛의 전자기장에게서 에너지를 흡수하여 금속 표면을 탈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에 의하면 빛의 세기는 곧 전자기파의 세기이므로, 더 강한 빛을 쪼이면 전자는 더 강한 세기의 전자기장 에너지를 흡수할 것이고 더 큰 에너지를 가진 채로 탈출할 것이다. 만약 빛의 세기가 약하더라도 충분히 오랫동안 쪼이면 전자는 오랜 시간동안 충분한 에너지를 흡수해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전자가 충분한 에너지를 흡수해야만 탈출할 수 있으므로, 빛을 쪼이기 시작한 뒤 약간 시간이 지나야 전자들이 탈출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이 현상을 더 자세히 연구하자 곧 이상한 결과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전자가 가진 에너지는 빛의 세기와는 관련 없었고 빛의 진동수와만 관련이 있었다. 아무리 강한 빛을 쪼여도 특정 진동수보다 낮은 진동수의 빛이라면 전자가 전혀 탈출하지 않았다. 전자는 에너지를 흡수할 시간이 없이 빛을 쬐자마자 거의 즉각적으로 탈출하였다.  


[[1905년]] 아인슈타인은 세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하나는 [[브라운 운동]]을 통해 [[원자]]의 존재를 증명하는 논문이었다. 또 하나는 [[상대성 이론|특수 상대성 이론]]으로 잘 알려진 논문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에너지 콴타''의 개념을 도입해 빛의 특성을 설명하는 논문이었다. 이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광전 효과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는데 성공하였다. 플랑크는 콴타가 단지 수학적인 개념에 불과할 것이라다고 추측했지만, 아인슈타인은 콴타가 정말 물리적으로 실존하며 광전 효과를 통해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인 것이다. '''빛의 에너지는 실제로 불연속적인 단위 에너지들의 합으로 이뤄져 있었다.''' 이 에너지 콴타의 개념은 훗날 [[광자]]로 불리게 된다.
[[1905년]] 아인슈타인은 세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하나는 [[브라운 운동]]을 통해 [[원자]]의 존재를 증명하는 논문이었다. 또 하나는 [[상대성 이론|특수 상대성 이론]]으로 잘 알려진 논문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에너지 콴타''의 개념을 도입해 빛의 특성을 설명하는 논문이었다. 이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광전 효과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는데 성공하였다. 플랑크는 콴타가 단지 수학적인 개념에 불과할 것이라다고 추측했지만, 아인슈타인은 콴타가 정말 물리적으로 실존하며 광전 효과를 통해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인 것이다. '''빛의 에너지는 실제로 불연속적인 단위 에너지들의 합으로 이뤄져 있었다.''' 이 에너지 콴타의 개념은 훗날 [[광자]]로 불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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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덴마크]]의 물리학자 닐스 보어는 원자의 구조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다. 당시 원자의 구조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은 이미 밝혀져 있었다. 원자의 내부에는 [[전자]]라는 음의 전하를 띤 입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었다. [[에른스트 러더포드]]는 그 유명한 알파선 산란 실험을 통해 원자의 대부분은 텅 빈 공간에 불과하며, 원자 질량의 대부분은 아주 작은 크기의 원자핵에 뭉쳐져 있고, 그 원자핵은 양의 전하를 띤다는 것을 밝혀냈다. 원자 내의 전자에서 방출되는 전자기파, 즉 빛을 스펙트럼으로 분해했을 때 불연속적인 특정 진동수만 나타나며 다른 진동수의 빛은 전혀 방출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원자의 구조에 대한 모형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러더포드는 자신의 발견을 태양계와 비슷하게 전자가 원자핵 주위를 공전하는 모형을 제안했지만, 이 모형은 근원적으로 불안정했다. 고전 전자기학에 의하면 공전하는 전자는 에너지를 빛의 형태로 방출하며 빠르게 에너지를 잃어 원자핵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었고, 공전하는 전자가 방출하는 빛 역시 실제 관측 결과와는 다르게 연속적인 진동수를 가져야만 했다.
한편, [[덴마크]]의 물리학자 닐스 보어는 원자의 구조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다. 당시 원자의 구조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은 이미 밝혀져 있었다. 원자의 내부에는 [[전자]]라는 음의 전하를 띤 입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었다. [[에른스트 러더포드]]는 그 유명한 알파선 산란 실험을 통해 원자의 대부분은 텅 빈 공간에 불과하며, 원자 질량의 대부분은 아주 작은 크기의 원자핵에 뭉쳐져 있고, 그 원자핵은 양의 전하를 띤다는 것을 밝혀냈다. 원자 내의 전자에서 방출되는 전자기파, 즉 빛을 스펙트럼으로 분해했을 때 불연속적인 특정 진동수만 나타나며 다른 진동수의 빛은 전혀 방출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원자의 구조에 대한 모형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러더포드는 자신의 발견을 태양계와 비슷하게 전자가 원자핵 주위를 공전하는 모형을 제안했지만, 이 모형은 근원적으로 불안정했다. 고전 전자기학에 의하면 공전하는 전자는 에너지를 빛의 형태로 방출하며 빠르게 에너지를 잃어 원자핵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었고, 공전하는 전자가 방출하는 빛 역시 실제 관측 결과와는 다르게 연속적인 진동수를 가져야만 했다.


여기에 대한 보어의 대답은 간단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전자가 안정적으로 돌 수 있는 특정 궤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 특정 궤도는 여러 개가 있으며, 각각의 궤도는 불연속적으로 분리되어 있다고 가정하였다. 마지막으로, 전자는 한 안정 궤도에서 다른 안정 궤도로 '점프'할 수 있으며, 이때 두 궤도의 에너지 차이에 해당하는 만큼의 빛을 흡수 또는 방출한다고 가정하였다. 이 빛은 플랑크가 밝힌 콴타로 표현될 수 있다.
여기에 대한 보어의 대답은 간단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전자가 안정적으로 돌 수 있는 특정 궤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 특정 궤도는 여러 개가 있으며, 각각의 궤도는 불연속적으로 분리되어 있다고 가정하였다. 마지막으로, 전자는 한 안정 궤도에서 다른 안정 궤도로 '점프'할 수 있으며, 이때 두 궤도의 에너지 차이에 해당하는 만큼의 빛을 흡수 또는 방출한다고 가정하였다. 이 빛은 플랑크가 밝힌 콴타로 표현될 수 있다.  


==== 고전 양자론의 형성과 위기 ====
==== 고전 양자론의 형성과 위기 ====
이 세 명의 물리학자들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물리학을 '''고전 양자론'''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런 새로운 학문이 단번에 받아들여진 건 아니었다. 많은 물리학자들은 이러한 이론을 처음 접했을 때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했고, 심지어 저 세 명도 서로의 이론을 반박하려고 애쓰기까지 했다. 그 중 제일 많은 공격을 받았던 것은 단연 가장 혁명적이었던 아인슈타인의 광양자설이었다. 가장 보수적이었던 플랑크는 자신의 이론조차도 임시방편에 불과하다고 믿었으며, 아인슈타인의 광양자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인슈타인 역시 한때 자신의 주장을 반쯤 철회하기까지 했다. 닐스 보어는 자신의 원자 모형을 구상하면서 광양자 가설은 제외했고, 나중에는 새로운 복사 이론을 주창하며 광양자 가설을 파기시키려는 시도까지 하였다.
이 세 명의 물리학자들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물리학을 '''고전 양자론'''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런 새로운 학문이 단번에 받아들여진 건 아니었다. 많은 물리학자들은 이러한 이론을 처음 접했을 때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했고, 심지어 저 세 명도 서로의 이론을 반박하려고 애쓰기까지 했다. 그 중 제일 많은 공격을 받았던 것은 단연 가장 혁명적이었던 아인슈타인의 광양자설이었다. 가장 보수적이었던 플랑크는 자신의 이론조차도 임시방편에 불과하다고 믿었으며, 아인슈타인의 광양자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인슈타인 역시 한때 자신의 주장을 반쯤 철회하기까지 했다. 닐스 보어는 자신의 원자 모형을 구상하면서 광양자 가설은 제외했고, 나중에는 새로운 복사 이론을 주창하며 광양자 가설을 파기시키려는 시도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 이론들은 결국 모든 반박들을 이겨내며 살아남았다. 광양자설은 미국의 컴프턴과 사이먼이 수행한 컴프턴 효과 실험을 통해 사실로 드러났다. 보어의 원자 모형은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에 회의적이었던 독일의 좀머펠트에 의해 [[수소]] 원자의 스펙트럼을 완벽하게 설명하는데 성공하면서 진가를 드러냈다. 그렇게 당시의 양자론은 차츰 하나의 정립된 이론으로서 발전해 갔으며, 계속해서 그 적용 범위를 넓혀갔다. 이를 이끈 선봉은 단연 보어의 원자 모형이었으며, 가히 고전 양자론의 최전성기를 구사하였다.
그러나 이 이론들은 결국 모든 반박들을 이겨내며 살아남았다. 광양자설은 미국의 컴프턴과 사이먼이 수행한 컴프턴 효과 실험을 통해 사실로 드러났다. 보어의 원자 모형은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에 회의적이었던 독일의 좀머펠트에 의해 [[수소]] 원자의 스펙트럼을 완벽하게 설명하는데 성공하면서 진가를 드러냈다. 그렇게 당시의 양자론은 차츰 하나의 정립된 이론으로서 발전해 갔으며, 계속해서 그 적용 범위를 넓혀갔다. 이를 이끈 선봉은 단연 보어의 원자 모형이었으며, 가히 고전 양자론의 최전성기를 구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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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도기 ===
=== 과도기 ===
==== 드 브로이의 물질파 가설 ====
==== 드 브로이의 물질파 가설 ====
프랑스의 물리학자 루이 드 브로이는 아인슈타인의 광양자설을 받아들여 [[1924년]] 훨씬 더 혁명적인 아이디어인 ''물질파 가설''을 발표하였다. 아인슈타인의 광양자설에 의하면 빛은 입자일 개연성이 높지만, 이미 [[영의 이중슬릿 실험]]에서 밝혀졌듯이 빛은 [[파동]]의 성질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빛은 입자인 동시에 파동의 성질을 띠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빛의 입자가 파동의 성질을 띤다면, 다른 입자들 역시 파동의 성질을 띠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전자와 같은 다른 입자들도 파동의 성질을 띠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과정 끝에 그는 물질파라 불리는 파동을 예견하였다. 또한 드 브로이는 이 가설을 응용해 보어의 원자 모형에서 나타나는 안정 궤도의 조건을 재해석하였다. 그에 의하면 전자는 그 물질파가 [[정상파]]를 이룰 때 안정되기 때문에, 전자 궤도의 둘레가 물질파 파장의 정수배가 되는 궤도가 안정된 궤도라고 분석하였다.
프랑스의 물리학자 루이 드 브로이는 아인슈타인의 광양자설을 받아들여 [[1924년]] 훨씬 더 혁명적인 아이디어인 ''물질파 가설''을 발표하였다. 아인슈타인의 광양자설에 의하면 빛은 입자일 개연성이 높지만, 이미 [[영의 이중슬릿 실험]]에서 밝혀졌듯이 빛은 [[파동]]의 성질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빛은 입자인 동시에 파동의 성질을 띠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빛의 입자가 파동의 성질을 띤다면, 다른 입자들 역시 파동의 성질을 띠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전자와 같은 다른 입자들도 파동의 성질을 띠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과정 끝에 그는 물질파라 불리는 파동을 예견하였다. 또한 드 브로이는 이 가설을 응용해 보어의 원자 모형에서 나타나는 안정 궤도의 조건을 재해석하였다. 그에 의하면 전자는 그 물질파가 [[정상파]]를 이룰 때 안정되기 때문에, 전자 궤도의 둘레가 물질파 파장의 정수배가 되는 궤도가 안정된 궤도라고 분석하였다.  


드 브로이의 물질파 가설은 에르반 슈뢰딩거에게 큰 영향을 끼쳐 양자역학의 탄생에 큰 공헌을 하였다. 하지만 드 브로이는 물질파 가설을 제안하면서 입자가 파동의 성질을 띠게 되는 메커니즘을 설명하지는 않았고, [[1927년]]에야 이에 대한 설명을 제시했지만 곧 주류 해석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이론을 포기하였다. 다만 물질파 가설은 아직 양자역학의 비주류 이론 중 하나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ㅊ|비주류라기엔 고딩 교육과정에선 이것'''만''' 나오는데}}
드 브로이의 물질파 가설은 에르반 슈뢰딩거에게 큰 영향을 끼쳐 양자역학의 탄생에 큰 공헌을 하였다. 하지만 드 브로이는 물질파 가설을 제안하면서 입자가 파동의 성질을 띠게 되는 메커니즘을 설명하지는 않았고, [[1927년]]에야 이에 대한 설명을 제시했지만 곧 주류 해석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이론을 포기하였다. 다만 물질파 가설은 아직 양자역학의 비주류 이론 중 하나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ㅊ|비주류라기엔 고딩 교육과정에선 이것'''만''' 나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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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는 고전 양자론 자체와 씨름하고 있었다. 당시 고전 양자론은 헬륨의 방출 스펙트럼 문제 말고도 다른 문제에 맞닥뜨려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자기장]] 내에서 수소원자의 방출 스펙트럼이 이상하게 갈라지는 현상인 이상 제만 효과가 발견된 것이다. 당시의 고전 양자론은 ''양자수''라는 개념을 이용해 원자의 방출 스펙트럼을 설명하고 있었다. 당시 존재하던 양자수는 총 3개가 있었으며, 각각은 원자 내의 전자 상태가 가지는 물리량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예를 들어, 한 종류의 양자수는 전자가 도는 궤도의 각운동량 크기를 뜻했다. 하지만 이 3개의 양자수로는 도저히 방출 스펙트럼을 설명할 수가 없었으며, 당시 물리학자들은 어떻게든 이론적 계산값이 실험 결과와 맞도록 특수한 규칙들을 계속해서 추가시키던 상황이었다. 예를 들어, 어떤 원자에 대해서는 양자수가 정수들로 표현되었지만, 어떤 원자에 대해서는 정수+1/2로 표현되는 식이었다. 게다가 기존의 보어 및 파울리의 정상파 개념으로는 정수+1/2의 양자수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었으며, 심지어 애당초 왜 전자들이 전부 다 하나의 같은 양자수를 가지지 않고 서로 다른 양자수들을 가지는지조차 설명하지 못했다. 이런 난잡한 상황에 질린 파울리는 잠시 관심을 끊고 다른 분야를 연구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다시 돌아와서 중요한 연구 결과를 이끌어내게 되었다.
한편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는 고전 양자론 자체와 씨름하고 있었다. 당시 고전 양자론은 헬륨의 방출 스펙트럼 문제 말고도 다른 문제에 맞닥뜨려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자기장]] 내에서 수소원자의 방출 스펙트럼이 이상하게 갈라지는 현상인 이상 제만 효과가 발견된 것이다. 당시의 고전 양자론은 ''양자수''라는 개념을 이용해 원자의 방출 스펙트럼을 설명하고 있었다. 당시 존재하던 양자수는 총 3개가 있었으며, 각각은 원자 내의 전자 상태가 가지는 물리량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예를 들어, 한 종류의 양자수는 전자가 도는 궤도의 각운동량 크기를 뜻했다. 하지만 이 3개의 양자수로는 도저히 방출 스펙트럼을 설명할 수가 없었으며, 당시 물리학자들은 어떻게든 이론적 계산값이 실험 결과와 맞도록 특수한 규칙들을 계속해서 추가시키던 상황이었다. 예를 들어, 어떤 원자에 대해서는 양자수가 정수들로 표현되었지만, 어떤 원자에 대해서는 정수+1/2로 표현되는 식이었다. 게다가 기존의 보어 및 파울리의 정상파 개념으로는 정수+1/2의 양자수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었으며, 심지어 애당초 왜 전자들이 전부 다 하나의 같은 양자수를 가지지 않고 서로 다른 양자수들을 가지는지조차 설명하지 못했다. 이런 난잡한 상황에 질린 파울리는 잠시 관심을 끊고 다른 분야를 연구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다시 돌아와서 중요한 연구 결과를 이끌어내게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24년]]에 파울리가 제안한 것은 두 가지로, 그 첫 번째는 네 번째 양자수의 도입이었다. 이 양자수를 도입함으로써 파울리는 이상 제만 효과의 상당 부분<ref>이상 제만 효과를 완벽히 설명 가능하게 된 것은 나중에 상대론적 양자론이 완성된 뒤의 일이다.</ref>을 설명하는 데 성공하였다. 두 번째 제안은 바로 파울리의 ''배타 원리''로, '서로 다른 두 전자는 동일한 양자상태에 있을 수 없다'는 원리를 창안하였다. 양자상태를 나타내는 값이 바로 양자수이므로, 배타 원리는 어째서 전자들이 서로 다른 양자수들을 가지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24년]]에 파울리가 제안한 것은 두 가지로, 그 첫 번째는 네 번째 양자수의 도입이었다. 이 양자수를 도입함으로써 파울리는 이상 제만 효과의 상당 부분<ref>이상 제만 효과를 완벽히 설명 가능하게 된 것은 나중에 상대론적 양자론이 완성된 뒤의 일이다.</ref>을 설명하는 데 성공하였다. 두 번째 제안은 바로 파울리의 ''배타 원리''로, '서로 다른 두 전자는 동일한 양자상태에 있을 수 없다'는 원리를 창안하였다. 양자상태를 나타내는 값이 바로 양자수이므로, 배타 원리는 어째서 전자들이 서로 다른 양자수들을 가지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배타 원리의 진정한 의미는 고전 양자론에 있던 고전역학적 설명을 제거했다는 점이다. 기존의 원자 모형에서 각각의 양자수들은 실제 고전역학적 의미를 가졌던 데에 비해, 파울리가 제창한 네 개의 양자수 및 배타 원리는 고전역학적 설명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양자론적인 개념으로서 도입된 것이었다. 파울리에게 있어서 원자 내부에 전자가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가는 의미 없는 질문이었으며, 중요한 것은 실제로 관측되는 결과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제안한 양자수들의 의미나 배타 원리의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것을 철저히 거부했으며, '궤도'나 '각운동량'과 같은 고전역학적인 설명을 배제한 채 철저하게 개념적인 혁명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배타 원리의 진정한 의미는 고전 양자론에 있던 고전역학적 설명을 제거했다는 점이다. 기존의 원자 모형에서 각각의 양자수들은 실제 고전역학적 의미를 가졌던 데에 비해, 파울리가 제창한 네 개의 양자수 및 배타 원리는 고전역학적 설명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양자론적인 개념으로서 도입된 것이었다. 파울리에게 있어서 원자 내부에 전자가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가는 의미 없는 질문이었으며, 중요한 것은 실제로 관측되는 결과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제안한 양자수들의 의미나 배타 원리의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것을 철저히 거부했으며, '궤도'나 '각운동량'과 같은 고전역학적인 설명을 배제한 채 철저하게 개념적인 혁명을 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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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판 ====
==== 비판 ====
코펜하겐 해석이 비록 널리 받아들여지긴 했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물리학자 역시 많았다. 슈뢰딩거는 자신의 파동역학이 확률이라는 모호한 형태로 해석되는 것을 거부했고, 따라서 그는 이 확률의 개념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보여주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실험을 고안했다. 아인슈타인 역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여러 사고실험을 통해 코펜하겐 해석을 반박하려고 시도했으며, 아인슈타인과 포돌스키, 로젠이 공동으로 제시한 [[EPR 역설]]은 아직까지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코펜하겐 해석은 이 모든 공격을 방어해내는데 성공했고, 양자역학의 주류 해석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비록 그 과정에서 ''비국소성''과 같은 이해하기 어렵고 논쟁적인 개념이 도입되기도 했지만, 아무튼 코펜하겐 해석은 모순점 없이 양자역학의 수학적 이론이 가진 의미를 해석해 내었다.
코펜하겐 해석이 비록 널리 받아들여지긴 했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물리학자 역시 많았다. 슈뢰딩거는 자신의 파동역학이 확률이라는 모호한 형태로 해석되는 것을 거부했고, 따라서 그는 이 확률의 개념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보여주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실험을 고안했다. 아인슈타인 역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여러 사고실험을 통해 코펜하겐 해석을 반박하려고 시도했으며, 아인슈타인과 포돌스키, 로젠이 공동으로 제시한 [[EPR 역설]]은 아직까지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코펜하겐 해석은 이 모든 공격을 방어해내는데 성공했고, 양자역학의 주류 해석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비록 그 과정에서 ''비국소성''과 같은 이해하기 어렵고 논쟁적인 개념이 도입되기도 했지만, 아무튼 코펜하겐 해석은 모순점 없이 양자역학의 수학적 이론이 가진 의미를 해석해 내었다.  


하지만 양자역학을 해석하는 방법이 코펜하겐 해석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학자들이 코펜하겐 해석을 대체할만한 다른 여러 해석들을 제안했으며, 이 중 몇몇은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다. 가장 유명한 '대안 해석'은 '''[[다세계 해석]]'''으로, 파동함수의 붕괴를 통해 한 가지 결과만이 확정된다는 코펜하겐 해석의 골치아픈 문제를 피하고, 대신 모든 결과가 각기 다른 세계에서 동시에 실재하게 된다는 해석이다. 코펜하겐 해석에서는 전자를 이곳에서 관측했다면 전자가 저곳에 존재할 확률은 붕괴를 통해 사라졌다고 설명하지만, 다세계 해석에서는 우리 세계에서는 전자가 이곳에 관측되었고 다른 세계에서는 전자가 저곳에서 관측되었을 뿐이며, 확률은 사라지지 않고 다른 세계에서 현실화되었을 뿐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양자역학을 해석하는 방법이 코펜하겐 해석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학자들이 코펜하겐 해석을 대체할만한 다른 여러 해석들을 제안했으며, 이 중 몇몇은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다. 가장 유명한 '대안 해석'은 '''[[다세계 해석]]'''으로, 파동함수의 붕괴를 통해 한 가지 결과만이 확정된다는 코펜하겐 해석의 골치아픈 문제를 피하고, 대신 모든 결과가 각기 다른 세계에서 동시에 실재하게 된다는 해석이다. 코펜하겐 해석에서는 전자를 이곳에서 관측했다면 전자가 저곳에 존재할 확률은 붕괴를 통해 사라졌다고 설명하지만, 다세계 해석에서는 우리 세계에서는 전자가 이곳에 관측되었고 다른 세계에서는 전자가 저곳에서 관측되었을 뿐이며, 확률은 사라지지 않고 다른 세계에서 현실화되었을 뿐이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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