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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1939년까지 무솔리니는 폰티네 습지의 개간과 같은 공공사업과 대중교통을 위한 기반시설 확충 등을 통해 일자리를 늘리고 경제를 성장시키는 성과를 보였으며 이탈리아 제국 전반의 경제적 안정을 실현하였다. 또한 라테란 조약을 통해 바티칸 시국을 확정하고 교황청과의 문제도 해결하였다. 그러나 선거법 개정을 통한 권력의 장악, 노동조합의 해산, 언론출판 규제, 정적과 공산당 탄압 등으로 독재 정치를 강화했다. | 1924년~1939년까지 무솔리니는 폰티네 습지의 개간과 같은 공공사업과 대중교통을 위한 기반시설 확충 등을 통해 일자리를 늘리고 경제를 성장시키는 성과를 보였으며 이탈리아 제국 전반의 경제적 안정을 실현하였다. 또한 라테란 조약을 통해 바티칸 시국을 확정하고 교황청과의 문제도 해결하였다. 그러나 선거법 개정을 통한 권력의 장악, 노동조합의 해산, 언론출판 규제, 정적과 공산당 탄압 등으로 독재 정치를 강화했다. | ||
1939년 5월 22일, 무솔리니는 사위인 치아노 외무장관의 반대를 무시하고 강철협약이라 일컬어지는 독일-이탈리아 군사동맹을 체결하여 독일과 종속적인 우호관계를 맺었다. | 1936년 7월 18일에 터진 스페인 내전에 개입했다. 1939년 5월 22일, 무솔리니는 사위인 치아노 외무장관의 반대를 무시하고 강철협약이라 일컬어지는 독일-이탈리아 군사동맹을 체결하여 독일과 종속적인 우호관계를 맺었다.<ref>처음에는 히틀러를 부정적으로 봤지만 에티오피아 침공 후 태도가 바뀌었다.</ref> | ||
그래서 이탈리아도 독일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에 대한 인종차별정책을 실시했지만 오랫동안 무솔리니와 육체적 관계를 맺었던 마르게리타 사라팟티가 유대인이라서 이탈리아에서는 독일같이 강한 통제와 유대인의 탄압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 |||
=== 추축국과 패전 === | === 추축국과 패전 === | ||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 [[프랑스]]가 [[독일]]에게 패배할 것이 확실해지자, 1940년 6월 10일 영국·프랑스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이 해 9월 27일에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삼국동맹이 체결되자 이탈리아는 추축국의 일원으로서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 [[프랑스]]가 [[독일]]에게 패배할 것이 확실해지자, 1940년 6월 10일 영국·프랑스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이 해 9월 27일에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삼국동맹이 체결되자 이탈리아는 추축국의 일원으로서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